权香花
2021-08-19 17:17:06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1년 8월 12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8월의 두 번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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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월

8월 12일은 양력 올해의 224일째 되는 날입니다. 올해가 마감할때까지 인제 141일이 남았습니다.

8월 12일은 국제청년절입니다. 첫 국제청년절은 2000년 8월 12일입니다.

정치와 사회 문화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세계 여러 지역에서 ‘청년’이라는 정의는 얼마간 다릅니다. 일례로 중국 국가통계국은 15세부터 34세까지의 사람을 청년이라고 정의 했습니다. 유엔은 청년의 범위를 14세부터 25까지의 사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나이와 지역은 모두 중점이 아닙니다. 국제청년절의 중점은 청년들을 격려하여 발전문제에 기여하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국제청년절은 유엔이 발기하여 설립한 명절입니다. 유엔은 1999년 결의서를 채택하고 해마다 8월 12일을 국제청년절로 정했습니다. 이듬해인 2000년 8월 12일 첫 국제청년절을 쇠게 되었습니다. 국제청년절의 설립은 여러 나라 정부가 청년문제를 중시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각 지역에서는 국제청년절의 이날이면 공연회, 세미나, 문화행사 등 여러 형식의 경축활동을 벌입니다.

국제청년절은 해마다 연도별 주제를 설립했습니다. 국제청년절의 주제와 슬로건은 해마다 변화했으며 현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주는 일련의 문제를 망라했습니다. 2000년 첫 국제청년절을 설립한후 2001년 ‘보건과 실업의 해결’을 주제로 삼았고 2002년에는 ‘청년들의 지속가능 발전을 위한 행동’을 주제로 삼았으며 2003년에는 ‘각 지역 젊은이들을 위해 적합하고 효율 있는 사업을 찾자’를 주제로 삼았습니다. 올 2021년 8월 12일은 21번째 국제청년절인데요, ‘식량 체계의 전변, 청년들이 인류와 지구의 건강을 혁신하고 촉진하자’라는 것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이 주제는 청년 군체의 참여에 의미가 있다고 강조하고 청년군체가 없으면 세계의 노력이 헛수고라는 것을 알리는데 취지를 두고 있습니다.

인구가 꾸준히 늘어나면서 세계인구는 향후 30년 동안 20억명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은 단지 보다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보다 많은 양곡을 생산하는 것으로는 인류와 지구의 복지를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또 기후변화, 생태환경의 보호, 공공보건위기, 사회 포용 등을 필요로 합니다.

국제청년절의 설립은 바로 청년들이 정치와 경제, 사회생활 그리고 행정에 참여하는 중요성을 인증하고 그들에게 계기를 주어 청년들이 글로벌 의제와 지속가능발전을 실현하는데서 역할을 발휘하도록 격려, 추진하기 위한데 취지를 두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세계적으로 청년들이 직면한 도전과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높이려 하고 있습니다.

국제청년절의 조직형식은 첫째로 손잡고 협력하는 것입니다. 국제청년절의 날 여러 나라 정부와 비정부 기구, 학술기구, 상공계 그리고 청년들은 손잡고 협력하며 지난날 거둔 성적을 회고하고 세계 청년들의 행동강령에 보다 큰 역할을 발휘합니다. 두 번째 심혈을 들여 조직합니다. 활동기간 세미나 등을 개최하고 청년문제와 그 대응 방법을 중점적으로 토론합니다. 세 번째로 성대한 경축행사를 벌입니다. 여러 가지 공연활동을 기획하고 조직하여 홍보, 청년절 경축행사를 벌이며 청년들이 현지사회에 기여하도록 격려합니다. 여러 가지 대화 활동을 열고 청년들의 재능을 전시하며 광범위한 흥미 등을 보여줍니다. 넷째 행동을 취합니다. 국제청년절 기념행사를 가지는 진정한 의미는 실제행동을 취하여 청년들의 참여와 결책 행정에 참여하는 능력을 더 늘이는데 있습니다. 이때 경축활동을 지지하여 청년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높이는데서 미디어의 역할이 아주 중요합니다.

 

지명과 연변

계속하여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이런 제목으로 지명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옛날 이주민이 정착했던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의 ‘간구자’ 마을 이야기입니다.

간구자, 메마른 골짜기의 마지막 추억

항간에서 그곳은 메마른 골짜기라는 의미의 간구자干溝子로 통하고 있었다. 간구자는 골짜기를 흐르는 시냇물이 늘 말라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막상 장마철에 비가 한 줄금 내리면 금세 싯누런 흙탕물이 사납게 골짜기를 휩쓸었다고 한다.

“정말입꾸마(정말인데요), 물을 건너다가 밀려 갈 뻔 했던 일이 있스꾸마(있습니다).”

누군가 골물에 빠져 하마터면 물귀신이 될 뻔 했던 일은 최명숙 노인의 기억에 깊은 골짜기를 파고 있었다.

기실 이름이 마른 골짜기이지 예전에는 사내들이 자주 물에 들어서서 고기잡이를 했다고 한다.

“‘세치네’가 많았스꾸마(많았습니다). 한 종지를 제꺽 잡았스꾸마(잡았습니다).”

‘세치네’는 말 그대로 세치도 되지 않는 잔 물고기를 이르는 말이다.

최명숙 노인의 조부는 광서(光緖, 1875~1908) 연간 조선 경상남도 밀양에서 홀로 이 고장에 이민을 왔다고 한다. 최명숙 노인이 어섯눈을 떴을 때 벌써 여러 가구 생겨나 옹기종기 골짜기를 메우고 있었다. 조선인이 10여 가구 되었고 중국인이 2가구 있었다. 그들은 삼삼오오 여러 골짜기에 갈라져 있었다. 골짜기마다 그들의 성씨를 따서 팡개골方家溝이요, 왕개골王家溝이요, 춘개골春家溝이요 하고 이름을 지어 불렀다.

그러든 말든 메마른 골짜기라는 훗날의 이름처럼 땅이 척박했다. 조와 보리 등속의 잡곡을 심었는데 별로 소출이 없었다. 보릿고개에는 쌀독이 텅텅 비어서 하루건너 끼니를 걸러야 했다.

“말도 맙소(하지 마세요). 밭에서 김을 매는데 맥(힘)이 없어서 호미질을 할 수 없었스꾸마(없었습니다).”

배고픔은 마치 호미로 창자를 올올이 긁어내리는 것 같았다. 최명숙 노인은 이야기를 하다가 부지중 눈시울을 붉혔다. 부친은 형제자매가 열다섯이나 되었지만 세파에 부대끼다 보니 나중에 셋만 겨우 살아남았다고 한다.

“복은 홀로 오지 않고 화는 쌍으로 온다.” 후더분한 성미의 조부는 선뜻 이웃집의 대출보증을 섰다가 빚을 한 꾸러미나 지게 되었다. 그들이 나 몰라라 하고 타향으로 솔가도주를 했던 것이다.

희비극의 인간사는 그렇게 시냇물처럼 골짜기에 흘러갔다. 물이 흐르면 도랑이 생기듯 날이 갈수록 골짜기에 정이 들었다. 초가는 엉성할망정 그들의 보금자리였고 골짜기는 메마를망정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나무가 자라서 수림을 이루듯 최 씨네는 어느덧 10여명의 가족으로 불어났다.

그런데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1937년 경, 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골짜기 어구에 내려와 이삿짐을 풀게 되었다. 괴뢰 만주국 정부가 항일군과 백성들의 연계를 차단하기 위해 여기저기 산재한 가구들을 한데 집중시켜 집단부락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때는 박달나무가 떵떵 얼어터지는 동지섣달이었다. 11살의 어린 나이었던 최명숙 노인은 엉성한 오두막 때문에 그때의 기억이 어제처럼 또렷하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땅 위의 눈을 치고 앞뒤에 나무기둥을 세웠으며 잔가지들을 서까래처럼 용마루에 걸쳤다. 오두막에는 숨구멍처럼 뙤창문이 간들간들 달려 있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장작불에 언 몸을 쬐이는 사람들은 흡사 야인시대로 다시 돌아간 듯 했다.

이런 움막은 이듬해 봄을 맞아 눈석임처럼 사라졌다. 나중에 산기슭에 2~30가구의 초가가 올망졸망 줄지어 늘어섰고 그 주위에는 키를 넘는 목책이 길게 나타났다. 이때 집단부락은 황폐한 작은 골짜기라는 의미의 ‘소황구툰小荒溝屯’이라고 불렸다.

일본 순사들이 자주 마을에 들락거렸다. 제복을 입고 하얀 장갑을 낀 그들이 나타나면 어린 최명숙은 숨도 크게 내쉬지 못했다. 순사들은 이따금 산에서 내려오는 늑대처럼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농가에 들어와서 흰 장갑으로 살창문을 쓱 문질러 보기도 했다. 흰 장갑에 시꺼멓게 때가 묻어나면 그 무슨 벌을 받아야 했단다.

“순사에게 잡히면 하다문哈達門에 가서 군도로 목을 친다고 합더꾸마(들었습니다.)”

솔직히 황당한 얘기였다. 그때 순사가 얼마나 험상궂게 굴었으면 이런 이야기까지 나올까 싶다.

순사들은 마을에서 약 20리 상거한 하다문哈達門의 훈춘국경경찰대에 있었다. 하다문은 만족 말인데 원명은 ‘하다마哈達瑪’라고 한다. 출입 문門은 마노 마瑪의 음역이다. 하다哈達는 만족 말로 ‘산’이라는 뜻이며 마노 마瑪는 ‘산간의 평지’라는 뜻이니 하다마는 ‘산 둔덕’이라는 의미가 되겠다. 실제 하다문 지역은 북부가 거개 산이며 골짜기가 가로세로 거미줄처럼 늘어서있다.

하다문은 청나라 순치(順治,1643~1661) 초년 만족들이 형성한 촌락이다. 광서 연간 봉금령이 해제되면서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들어와서 황무지를 개간했고 이에 따라 촌락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선통宣統 2년(1910) 훈춘청琿春廳을 설립할 때 하다문 지역에는 소황구툰을 비롯하여 24개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기왕 말이 났으니 망정이지 간구자 마을에는 늘 늑대가 내려와 돼지 따위를 물어갔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동구 밖의 더기에 돌로 제단을 쌓고 해마다 산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좌상 노인이 미리 이래라 저래라 하고 지시를 내렸으꾸마(내렸습니다). 그러면 돼지랑 잡아서 제물로 올려놓고 그랬으꾸마(그랬습니다).”

이 풍속은 훗날 어디론가 잠적한 늑대처럼 차츰 소실되었다고 한다. 산기슭에 있던 제단도 언제인가 가뭇없이 종적으로 감췄다.

그러고 보면 아직도 동북쪽 산등성이에 토성으로 남아있는 천 년 전의 옛 산성은 그 자체가 기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산성이 최명숙 노인의 기억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고 있지 않다는 것을 좀처럼 해득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무명의 촌부村婦로 세상을 무심하게 살아오면서 혹여 옛 성을 산골짜기의 어디서나 흔하게 자라는 피나무, 오리나무처럼 그저 골짜기의 일부분으로 여겼을까…

옛 산성은 부근에 집단부락이 설 무렵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훈춘현지琿春縣志의 기록에 따르면 민국(民國, 1912~1949) 시기 촌민이 성터에서 개간하다가 구리거울을 발견했다고 한다. 성터에서는 또 많은 뇌석과 활촉, 쇠솥, 연자방아 등 유물들이 나왔다고 전한다.

그러고 보면 간구자의 골짜기에는 오랜 옛날부터 인간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천 년 전의 옛길은 바로 마을 남쪽을 지나고 있었다. 그 길 위로 괴리 만주국 시기 부설한 철길이 흑룡처럼 멀리 기어갔다. 1945년 8월, 붉은 깃발을 든 소련군이 철길 위에 꾸역꾸역 나타났다.

그 무렵 소황구툰도 간구자로 개명한다. 이 간구자는 1962년 ‘동쪽이 붉다’는 의미의 동홍東紅村으로 개명하며 1981년부터는 또 동쪽의 일송정촌一松亭村에 귀속되었다. 일송정은 마을 귀퉁이에 있는 오랜 소나무가 마치 정자 같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일송정촌은 기실 이 소나무보다 2천 년 전 북옥저의 문화유적으로 소문을 놓게 된다.

간구자는 옛 산성이 있었지만 그처럼 유명하진 않았다. 그럴지라도 최명숙 노인에게는 명소 일송정을 뛰어넘어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현장이었다.

그의 마음을 헤아린 사위와 딸은 일부러 고향방문을 했다. 최명숙 노인은 꼬박 20여 년 만에 고향땅을 다시 밟았다. 그러나 고향은 진짜 골짜기에 흘러내리는 골물처럼 탄식을 쏟아내고 있었다.

“옛날의 모습은 하나도 없었스꾸마(없었습니다.) 그때는 남향집이 아니라 다 동향집이었습지(동향집이었습니다).”

전성기에는 30여 가구에 이르렀던 마을은 불과 10여 가구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와중에 초가가 여럿 보였지만 역시 이전의 가옥이 아니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간구자의 원주민은 단 한명도 없었다. 옛날 그들이 초가를 짓고 땅을 일구며 살았던 마을은 벌써 사람들의 기억에서 바닥까지 하얗게 말라버리고 있었다.

사실 10대의 나이에 하산했던 최명숙 노인이 어언 90고개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그제 날의 다른 원주민을 찾는 자체가 어리석은 발상일지 모른다.

최명숙 노인은 사위와 딸과 함께 울퉁불퉁한 흙길을 따라 북쪽으로 7,8리 더 들어갔다. 한숨은 간구자의 골짜기처럼 더구나 깊어졌다. 지난 70여 년 동안 기억 속에 보배처럼 소중히 담아두고 있던 고향집 옛터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골짜기는 어디라 없이 그 무슨 탈바꿈을 한 것 같았다. 사처에 나무가 꽉 들어서서 방향조차 분간하기 힘들었다. 다행이 일행은 골짜기의 평지에서 가까스로 그제 날의 옛 집터 하나를 찾아 사진을 한두 장 기념으로 찍을 수 있었다.

결국 고향방문은 노인의 향수를 더 애잔하게 만들었고 그의 가슴에 더더욱 메울 수 없는 골짜기를 만들었다. 세상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추억이었지만 더는 기댈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지명과 관련한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도문에는 ‘까울령’라는 산 이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명 ‘까울령’은 도대체 무슨 의미로 지은 이름일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명 ‘까울령’은 무슨 의미로 지은 이름일까요.

중국 길림성 연길시의 박철원 청취자가 정답을 보내왔는데요, 이와 함께 까울령 부근의 이야기를 적어주셨습니다.

[옛날의 까울령  고려촌 부근은  지금은  도문시  수남촌으로  합병되여  부르고  도문시의  수원지인  봉오저수지를  뒤에 업고 있다.

“전국특색민속마을”,  “민속문화마을”로  불리는 수남촌은  봉오동 전투,  홍범도장군이  대첩을 거둔  유적지로서  기념비들이  세워져있고  애국주의교양기지로  되어  해내외  유람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퀴즈 답안과 함께 까울령 부근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박철원 청취자님, 감사합니다.

네,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박은옥(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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