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1-09-03 20:02:14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1년 9월 2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9월의 첫 번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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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일은 양력 올해의 245일째 되는 날입니다. 올 한해가 마감할 할 때까지 인제 120일 남았습니다.

 9월 2일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기념일입니다.

러시아연방위원회는 얼마 전 9월 2일을 러시아에서 제2차 세계대전 종식을 기념하는 날로 정했습니다.

이 기념일을 설립한 국제법 기초는 1945년 9월 2일 일본이 항복서에 서명했고 구 소련을 망라한 동맹국이 일본의 항복을 수락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항복서 서명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을 의미하며 구 소련의 대 일본작전의 합법성을 확인했습니다. 많은 나라는 이 때문에 9월 2일을 제2차 세계대전 종식 기념일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포한 것은 1945년 8월 15일입니다. 15일 아침 7시, 중국, 소련, 미국, 영국 4개국은 각기 수도에서 동시에 일본의 항복을 선포했습니다. 점심,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포츠담 공시를 수용하였으며 무조건 항복 조서를 전국에 방송했습니다.

비록 일본이 항복한 것은 1945년 8월 15일이지만, 진정한 항복 의식은 반달이 지난 9월 2일에 있었습니다. 9월 2일 오전 9시, 일본 도쿄만에 정박한 미국 전함 미주리호에서 조인식이 거행되었습니다. 미주리호는 현재 하와이 진주만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중국은 9월 3일을 기념일로 정했습니다.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은 북경 서남쪽 교외의 로구교에 부근에서 ‘7.7’ 노구교 사변을 일으켰습니다. 노구교 사변은 일본이 중국을 전면 침략한 시작이며 중국 전국성 항전의 시발점이기도 합니다. 1945년 8월 21일, 남부의 지강(芷江)에서 일본 항복 대표인  중국 주둔 일본군 부총참모장 이마이 타케오가 중국 육군 총사령관 하응흠 그리고 미군 해당 인원과 항복 회담을 가졌습니다. 9월 2일, 일본 대표가 도쿄만 미국 전함 미주리호에서 항복서에 수표했습니다. 당시의 국민정부는 이튿날인 9월 3일 온 나라가 항전승리를 경축하기로 했으며 1946년에 9월 3일을 항전기념일로 삼았습니다.

1949년 말, 중화인민공화국 정무원은 8월 15일을 항전 기념일로 삼았습니다. 1951년 8월 13일 정무원은 9월 3일을 항일전쟁승리 기념일로 규정, 통고를 내렸으며 재차 ‘항전승리 기념일’을  해마다 9월 3일로 정했습니다.

1999년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제270호 “전국 명절과 기념 휴가 방법”에는 해당 항일 기념일을 ‘7.7 항전기념일, 9.3항전승리기념일, 9.18 기념일’이 있습니다. 중국정부는 이로써 법규의 형식으로 항일전쟁기념일을 확정했습니다.

9월 3일은 또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창립일이기도 합니다.

 1952년 9월 3일, 중국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창립대회가 길림성 연길시에서 열렸습니다. 1955년 4월, 중국 길림성 정부는 연변조선민족자치구를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고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해 12월, 연변조선자치주 제1기 인민대표대회 제2차 회의는 자치구를 자치주로 선포했습니다.

[간 주]

계속하여  중국 항전 승리와 관련한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본전범 특별군사법정의 기록원-권덕원

 

 "지금까지 취재하러 왔던 언론사가 50여개 되는 데요…" 권덕원(權德源)은 우리를 만나자 그가 문서철에 보관했던 신문 지상의 기사를 하나하나 꺼내 보였다.

  2015년 한해만 해도 여섯 개의 신문사가 그들의 얼굴을 문서철에서 내밀고 있었다.

  권덕원은 랴오닝성(遼寧省) 소재지 선양(沈陽)의 도심에서 약간 떨어진 주택가에 살고 있었다. 이른 봄의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권덕원을 찾는 기자는 아직 없었다. 뒷이야기이지만, 기자들이 권덕원을 찾은 시기는 대개 일본이 항복한 기념일 '8.15'에 즈음한 여름과 가을이었다.

  "기자들은 모두 일본전범을 심판했던 60년 전의 그 군사법정을 알고 싶어 했지요."

  권덕원은 대륙의 제일 마지막 일본전범 특별군사법정의 기록원이다. 군사법정의 판사나 통역관은 물론 전범들이 모두 저 세상으로 사라지고 있는 현 주소에서 그는 또 한 번 그 역사의 충실한 '기록원'으로 재임하고 있는 것이다.

  권덕원은 선후로 중앙정법간부학교 심양분교, 중공 단둥시(丹東市) 당 학교, 랴오닝(遼寧)정법관리간부학교, 요녕 공안(公安)사법관리 간부학원 등 부문에서 근무했다. 그는 《형사죄행 도책(圖冊)》, 《노동법학 교수과정》 등의 주필을 맡았고 "노동분쟁 중재를 논함" 등 민법과 경제법 분야의 논문을 펴냈다고 《영재대전(英材大典)》이 기록하고 있다.

  사실상 기자들이 권덕원을 찾은 후 하나 같이 물어보는 이야기는 모두 이 《영재대전》의 기록을 비켜가고 있었다.

  "조선족인 제가 어떻게 특별군사법정의 일원으로 참석할 수 있었냐 하는 것이었지요."

  기자들의 이 의문은 허망 생긴 게 아니었다. 일본전범에게 심판을 내리기 위한 특별군사법정은 당시 법학계의 거두와 엘리트들이 집결한 장소였다. 그런데 20대 초반의 야릿야릿한 애송이가 법정에 버젓하게 앉아있었던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항복을 선고했다. 1946년 1월 19일 동맹국 점령군 사령관 아이젠하워는 특별공시를 발표하고 도쿄에 중국과 미국, 영국, 소련 등 11국의 판사와 검사로 구성된 극동 국제군사법정을 설립한다고 선포했다. 이와 함께 《극동국제군사법정헌장》을 공표, 국제군사법정은 평화를 파괴한 죄, 전쟁법규와 관례를 위반한 죄, 인도주의를 위반한 죄를 심리할 권한이 있다고 규정했다. 상기 3종의 죄를 저지른 것은 갑급 전범이었다.

  국제군사법정은 주로 갑급 전범을 심판했고, 을․병급 전범은 각 피해국 법정에서 단독 심리했다. 을․병급 전범의 죄장은 주요하게 제네바 적십자조약 등 국제공약을 위반했거나 전시 법규를 위반하고 살인, 성폭행 등 잔혹한 행위, 전쟁포로의 학대, 인원 구금 등 비인도적 행위에 직접적으로 종사, 지휘한 것을 망라한다.

  중국은 전승국이자 일본침략의 피해국이다. '8.15' 후 각기 대륙 남북의 여러 지역과 대만에 군사법정을 설립하고 중국침략 전쟁에서 엄중한 죄를 저지른 일본 을․병급 전범을 심판했다. 1945년 12월부터 1947년 말까지 중국 각 지역의 군사법정은 전범 안건 2,435건을 수리, 이 가운데서 110건이 사형으로 언도되었다.

  1956년 4월 25일, 모택동 주석은 명령서에 수표하고 중국에 수감되어 있는 제일 마지막 일본전범을 심판, 처리할 데 대한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의 결의를 선고한다. 이 결정을 집행하기 위해 잇따라 공화국은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과 요녕성 심양 두 지역에 일본전범을 심판하기 위한 군사법정을 각기 설립한다.

  일본이 전패하여 항복한 후 일부 일본 군인은 염석산(閻錫山)의 부대 등 국민당 군대에 참가하여 국공내전에 참가했으며 나중에 인민해방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 부분의 일본전범이 도합 140명 되었으며, 태원 전범관리소에 구금되었다. 1950년 7월, 소련은 중국 동북에 출병했을 때 체포했던 일부 전범을 중국에 송환했는데, 이 부분의 전범이 도합 969명으로 요녕성 무순(撫順)의 전범관리소에 구금되고 있었다.

  특별군사법정에는 판사만 아니라 변호사, 기록원, 도우미 등 인원이 필수적이었다. 군사법정 근무인원을 선정할 데 대한 특별과업은 요녕성 공안청(公安廳)에 의해 정법간부학교 심양분교에도 떨어졌다. 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하고 일본어를 숙지했으며 중공 당원이고 '열사군인' 가족인 권덕원은 유력한 후보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나중에 권덕원은 변호단 단장을 맡은 간부학교 왕씨 성의 총장과 변호사를 맡은 형법교학연구실 이씨 성의 교원과 더불어 특별군사법정에 파견되었다. 시초에 권덕원은 법정의 음성 녹음을 담당하고 녹음기록을 자료로 편성했으며 그 후 방청객 입장권의 수취, 현장질서의 유지 등 기타 작업을 함께 수행했다.

  권덕원의 말을 빈다면 특별군사법정에서 그의 직무는 지금의 '법관(法官) 보조원'이었다.

  벨이 처음으로 울리자 입장권을 소지한 방청객들이 법정에 들어섰다. 각 계층의 유지인사와 중앙의 간부 등 전국 각 지역에서 선정된 인물들이었다. 두 번 째 벨이 울리자 공소인과 변호사, 피고, 증인, 번역인원이 입석했다. 공소인과 변호사는 1:1 비례였다. 이어 피고가 들어섰다. 병석에 있는 1명을 제외한 27명이었다. 세 번째 벨이 울리자 판사 2명이 심판장을 앞세우고 들어섰다…

  와중에 변호인은 짙은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검은 구두를 신었으며 옆구리에 검은 가방을 끼고 있었다. 당시 국내에는 거의 양복을 입은 사람이 없었으며 이로 하여 그들의 복색은 법정 내외에서 더구나 유표하게 눈에 띄고 있었다.

  증인석에 나선 대청국(大淸國)의 마지막 황제는 잊을 수 없는 모습으로 권덕원의 기억에 남고 있었다.

 1956년 7월 2일, 부의는 심양 특별군사법정에 처음으로 전범과 증인 2중 신분으로 등장했다

  바람에 날려갈 듯 가냘프고 껑충한 키, 잡아당긴 듯한 긴 목, 검은 테의 안경… 귀로만 들었던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는 그렇게 만주 땅에 살던 옛 '신민(臣民)' 권덕원의 눈에 뛰어들고 있었다.

  "'황제'는 말을 잘 했고 또 알고 있는 것도 많았습니다…" 권덕원은 이렇게 '황제' 부의가 남긴 인상을 더듬고 있었다.

  심양과 태원의 특별군사법정은 6월부터 7월까지 종국적으로 45명의 일본전범을 심판했다. 당시 공화국 정부의 재판 원칙은 "죄는 일본 군국주의에만 있고, 일본의 인민에게는 없다"는 것이었다. 45명의 일본전범은 모두 20년 이하의 유기도형에 언도되었으며 형기는 1945년 전패 후 구금된 시일부터 시작했다. 일본전범 재판에서 한명도 사형하지 않은 용서와 관용을 베푼 것은 중국공산당뿐이다.

  1956년, 공화국 정부는 또 죄질이 경하고 죄를 뉘우치는 표현이 좋은 1017명 전범의 기소를 면하고 전부 석방하여 귀국시켰다. 심양과 태원에서 판결을 받은 일본전범도 1964년 3월 전부 석방했다. (공화국 정부가 수감한 일본전범은 도합 1,109명이지만, 수감 기간 47명이 사망했으며 이들은 석방자 명단에서 제외된다.)

  심양 특별군사법정의 심판이 끝난 후 권덕원은 부분적 일본전범의 귀국을 위한 무순-심양-천진(天津)행에서 안전보위, 생활 봉원, 통역 등을 겸한 요원으로 있었다.

  그때 일본전범을 수감하고 있던 무순 전범관리소는 세계적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전범 수감소로 되고 있다.

   역사는 필경 기록이다. 권덕원은 60여 년 전 발생되었던 그 사건의 기록원이다. 어느 시점부터 그는 더는 단순한 기록원만 아닌 역사의 산 '화석'으로 되어 사람들에게 판독되고 있었다.

 

간주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먼저 지난번 퀴즈 답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도문에는 ‘까울령’라는 산 이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명 ‘까울령’은 도대체 무슨 의미로 지은 이름일까요?

네,  까울령은 옛날 고이산高爾山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고이산은 만족 말로 홰나무 산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고이산을 조선말로 음역하여 읽으면 ‘까울령’이 됩니다. 까울령이라는 지명은 이렇게 생겼다고 합니다.

계속하여 지명과 관련한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제일 동쪽에 훈춘이라는 지명이 있는데요, ‘훈춘’이라는 이 지명은 무슨 의미일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명 ‘훈춘’은 무슨 의미로 지은 이름일까요.

네,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박은옥(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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