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1-09-10 17:25:18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1년 9월 9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9월의 두 번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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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은 양력 올 한해의 252일째 되는 날입니다. 올 한해가 마감할 때까지 이제 113일 남았습니다.

1945년 9월 9일, 중국 전구의 일본 항복식이 남경에서 열렸습니다. 일본 중국파견군 총사령관 오까무라야스지가 대중국 항복서에 사인했으며 중국측에 그의 패검을 바치고 이로써 중국침략 일본군이 정식으로 중국에 무기를 바치고 항복했다는 것을 표시했습니다.

1963년 12월, 조선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는 정령을 발표하고 9월 9일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창건일 다시 말해서 국경일로 정했습니다.

1976년 9월 9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이며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히 명예주석인 모택동이 향년 83세로 이징에서 서거했습니다. 모택동은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해방군,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요한 창시자이고 영도자입니다. 그는 1945년 중국공산당 제1차 전체회의 후 줄곧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을 담임했으며 공화국이 창건된 후 중앙인민정부 주석,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을 담임했었습니다.

[간주]

가을 ‘추’는 무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해진다는 의미입니다. 입추가 되면 오동나무에서 낙엽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떨어지는 잎에서 가을을 읽는다’라는 속담이 생겼습니다. 문자적인 각도에서 볼 때 ‘추’는 벼 화(禾)와 불 화(火)로 묶어졌습니다. 벼가 익는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가을철은 날씨가 더운 데로부터 차가운 데로 변하고 다시 차가운 데로부터 추운 데로 변하는 과도 계절입니다.

올해의 가을철은 8월 7일에 시작되어 11월 6일에 끝납니다.

서늘하고 청명한 가을을 만나 한국의 김연준 청취자가 소식을 보내왔습니다.

[청취자 내신]

“선선한 바람과 함께 청명한 하늘도 볼 수 있어 가을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요즘입니다.

지난주 경상도 일부 지역에 많은 비가 내려 일부 비 피해도 있었지만 전국적으로 가뭄이 해소되고 저수지의 저수율도 회복되는 등 가을 채소농사를 앞두고 있는 농부들의 맘을 흡족하게 했습니다.

한국의 코로나 상황은 일일 1,500명대의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추석연휴를 앞두고 확산을 우려해 현행 거리두기 단계를 유지할 것으로 보입니다.

코로나 백신 1차 접종율은 전인구 대비 56%를 기록하고 있으며 정부는 추석전까지는 70% 이상이 접종을 마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카자흐스탄 대통령이 국빈방문하면서 봉오동 전투를 이끈 민족의 영웅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왔는데 한국정부는 추모기간을 갖고 대전현충원에 장군의 유해를 정중히 안장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청산리 전투를 이끈 김좌진 장군과 더불어 독립을 위해 일제와 맞선 대표적인 민족독립 운동가 입니다.

청취자의 벗 시간에 방송된 장춘의 김수금 청취자님의 사연을 잘 청취했습니다.

조선족 노인협회 회원들의 활동상을 전해 주셨는데 자신보다 이웃과 사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모습들이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지속적으로 회원간 유대를 돈독히 하고 건강관리도 잘 하셔서 풍성한 노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김 연준”

네, 코로나 사태가 억제되면서 중국 여러 지역 학교와 유치원에서 예정 기한대로 개강하고 있습니다. 베이징시 교육위원회 관변측이 웨이보에 밝힌데 의하면 새로운 학기 베이징시 대, 중, 소학교와 유치원이 예정 기한대로 개강했습니다. 이 가운데서 중소학교는 9월 1일 정식으로 개학했습니다.

연변의 노인대학도 예정대로 개강했다고 연길시 박철원 청취자가 소식을 보내왔습니다.

“8월30일 연변노인간부대학이 개학하였다.

코로나 방역수요로 잠시 미루었던 연변로인대학에서는 전면소독, 마스크 착용, 체온측정, 출입구 가르기 등 엄격한 조치를 지키며 전부학과의 새 학기 수업을 시작하였다.

학원들마다 통제되어 가고 있는 코로나19 사태의 추세에 발맞추어 자각적으로 개인 방역을 잘 하면서 즐거운 심정으로 새 학기 학습을 시작하였다.

올해 이 학교는 성악, 서화 등 학과의 학생모집을 더 늘여 늘어나고 있는 노인들의 수요에 대응하며 더 많은 노인들의 대학꿈을 이루어주고 있다.“

[간 주]

계속하여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이런 제목으로 지명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의 마을 이야기입니다.

강남에 있었던 강북마을

최봉해 옹은 일찍 1920년대 두만강 기슭에 탯줄을 묻었다. 그러나 그의 고향은 조부나 부친처럼 강남의 함경도 경원이 아니었다. 그는 강북의 훈춘 서위자西崴子에서 태어난 이민 2세였다.

청나라 말, 조부가 일가족을 인솔하여 바로 두만강 기슭의 서위자西崴子에 이삿짐을 내려놓았다고 한다.

“강을 건너자마자 땅이 기름진 이 고장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서위자는 가경(嘉慶, 1796~1820) 초년에 형성, 훈춘에서 비교적 일찍 생긴 마을이다. 훈춘하와 두만강이 합류하는 강어구의 충적평원에 위치한다고 해서 강굽이라는 의미의 ‘외자崴子’라고 불렸으며 또 훈춘 시가지의 서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방위 서쪽이라는 의미를 덧붙여 ‘서위자’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훈춘부도통아문문서琿春副都統衙門檔案”의 기록에 따르면 서위자에는 “광서光緖 9년(1883), 군대용 땅이 611정보 남짓했으며 그중 협령協領과 좌령佐領이 각기 60정보의 땅을 갖고 있었다.” 관아의 두 수장과 수하 군대가 모두 이곳에 땅을 갖고 있었으니 누구라도 욕심을 낼만큼 꽤나 기름진 옥토였던 게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부근에는 적지 않은 마을이 서위자와 가지런히 나타나고 있었다. 와중에는 ‘협신자夾信子’라는 마을이름이 사뭇 이색적이다. 통상 신자信子는 ‘뱀의 혀’를 이르는 말이니 이름 그대로 해석하면 뱀의 혀가 뭔가에 끼웠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실은 만족 말로 ‘좁다’는 의미로 쿠크나하庫克納河와 훈춘하 사이의 좁은 곳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지은 지명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마을은 그 이름이 만주족 말이든 중국말이든 정말로 강 사이에 집게처럼 끼운 모양새로 되고 있었다.

각설하고, 쿠크나하는 만족 말로 ‘후릿그물’을 이르는 말로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는 강이라는 의미이다. 쿠크나하는 서위자와 이웃한 전타자前坨子 부근에서 훈춘하와 합류한다. 전타자는 본래 통칭 서위자로 불리다가 1981년 지명 전면조사를 할 때 마을위치가 흙더미 위에 있고 또 사타자沙坨子의 남쪽이라고 해서 개명한 이름이다. 사타자는 이름 그대로 ‘모래더미’를 방불케 한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기실 훈춘하는 무려 180㎞나 되지만 쿠크나하는 고작 12㎞에 불과하니 본래 이들을 비교하는 자체가 어리석다. 그런데 기어이 훈춘하를 한쪽에 밀어놓고 쿠크나하를 지상 표시물로 삼은 마을이 있다. 쿠크나하 남쪽에 있다고 해서 ‘하남河南’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강희 53년(1714), 훈춘에 협령아문協領衙門을 설치할 때 만족 사람들이 이곳에 거주했다고 한다. 이 고장에서 제일 먼저 나타난 마을인 것이다. 하남은 시초에 역시 두 강 사이에 끼워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협신자夾信子’라고 불리다가 지명 전면조사를 할 때 중복을 피해 새롭게 지은 이름이다. 아무튼 훈춘하 북쪽 마을이라는 의미의 북촌이라고 하지 않고 쿠크나하 남쪽 마을이라는 의미의 하남이라고 부르는 게 억지감이 들기까지 한다.

공교롭게 분명 강남에 있는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강북’이라고 부르는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예전에 최봉해 옹은 이 강북마을의 사람들을 이런저런 일로 자주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1950년경 그는 서위자가 아닌 북쪽의 고려성高麗城 마을에서 촌간부로 있었던 것이다.

얘기가 잠깐 다른 곬으로 흐르게 된다. 최봉해 옹은 아홉 살 때 부모를 따라 서위자와 북쪽으로 몇 십리 상거한 이화촌里化村으로 이사했다. 이화촌은 광서(光緖, 1875~1908) 말년 생긴 마을이다. 동네어구에는 오랜 배나무가 있었으며 이 때문에 ‘배꽃마을’이라는 의미의 이화촌梨花村이라고 작명했다고 한다. 괴뢰 만주국 시기 배꽃과 발음이 비슷한 이화里化라고 개명했던 것이다.

1947년, 20대의 최봉해 옹은 이화촌 간부의 신분으로 토지개혁에 참가하였다. 토지개혁은 연변지역에서 1946년 7월부터 1948년 4월까지 약 2년 동안 진행, 농민들에게 땅을 나눠줌으로써 농촌의 봉건착취제도를 뒤엎은 운동이다. 이로써 농민들은 공산당을 굳게 믿게 되었으며 힘들게 얻은 터전을 지키기 위해 발 벗고 전선지원에 나선다.

이때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 제3차 국내혁명전쟁(일명 국공내전, 1945.8~1949.9)을 벌이고 있었다. 해당 문헌기록에 따르면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연변지역에서 52,000여명의 청년이 참군, 이중 조선족이 85%를 차지했다. 또 담가 3720채, 우마차 19,000대가 지원되었으며 전선지원자가 302,3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최봉해 옹도 1948년 1월 담가대의 일원으로 그 무렵 진행되었던 사평전역四平戰役에 참가한다. 사평은 길림성과 요녕성 접경지역의 도시이다. 이곳에서 1946년 3월~1948년 3월, 동북민주연군이 국민당군대의 진공에 맞서 반복적인 쟁탈전을 벌였던 것이다. 교전 쌍방은 선후로 4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였다.

이때 최봉해 옹이 인솔자의 한사람으로 있었던 담가대는 큰 공을 세워 표창기表彰旗를 받았다. 이런 실적에 힘을 입어 최봉해 옹은 고향으로 돌아온 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며 마을의 공안위원公安委員으로 일하게 된다. 그러다가 1950년 4월 고려성 대대(大隊, 촌)에 이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성 대대는 청나라 말 민국 초기 생긴 마을이다. 실은 일찍 천 년 전의 발해시기에 벌써 인간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마을 북쪽에는 발해국의 도읍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가 있었던 팔련성八連城이 있으며 남쪽에는 온특혁부성溫特赫部城과 비우성斐優城 고성 유적지가 있다. 고성은 옛날 발해인들이 살던 성곽이라고 해서 고려성으로 불렸으며 부근 마을도 이 이름을 따서 고려성 마을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최봉해 옹은 선후로 마을의 공산주의청년단(중공 하부조직) 서기, 선전위원, 촌주임(촌장), 정치대장 등 여러 직무를 맡는다. 정치대장이라고 하면 생경한 이름이 아닐지 모르겠다. 예전에 마을의 수장은 노동대장, 정치대장, 부녀대장 등으로 나뉘었다. 노동대장은 농업생산, 정치대장은 정치업무, 부녀대장은 여성들의 일을 관장하는 직무였다.

최봉해 옹은 촌간부로 있으면서 향 소재지인 삼가자三家子로 제집 나들듯 출입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강북마을 사람들과 무릎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자주 가졌던 것이다. 강북마을 역시 삼가자향 소속의 대대大隊였다.

“지금도 강북마을이라고 하면 우리 고장에서 모르는 노인들이 없지요.”

일설에 옛날 두만강은 마을 남쪽으로 흘렀으며 강북마을이라는 이름은 그래서 생겼다고 한다. 어쨌거나 마을은 남쪽기슭과 잇닿아 명색만 강북이지 기실은 저쪽 조선의 땅이나 다름없었다.

강북마을 사람들은 배를 타고 나들이를 했다. 섬사람들이나 다름없었다.

최봉해 옹은 종국적으로 철새처럼 또 자리를 뜨고 영풍촌永豊村에서 살았다. 영풍촌은 1960년 고려성마을에서 분가한 조선족마을이다. 이처럼 조선족들이 한꺼번에 비운 자리가 너무 컸던지 모른다. 고려성마을은 뒤미처 고려라는 성씨를 버리고 그저 옛 성곽이라는 의미의 ‘고성촌古城村’이라고 불리게 된다.

참말로 이 고장의 ‘특산물’이 아닐지 한다. 새 마을 영풍도 이름을 여러 번 바꾸는 곡절을 겪었다. 처음에는 새로 나타났다는 의미의 ‘신생新生’이라고 작명했다고 한다.

“다들 이름이 나쁘다고 했지요. 죄를 짓고 교화를 받는 장소 같지 않습니까.”

이 때문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의미의 ‘신성新成’이라고 개명했다고 한다. 이 신성은 새 성곽이라는 의미의 ‘신성新城’과 동음이었으며 마침 남쪽에 고성이 있었기 때문에 더구나 새 성곽이라는 오해를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영원히 풍작을 거둔다는 의미의 ‘영풍永豊’이라고 개명했던 것이다.

곡절을 겪은 이 이름이 하도 좋은 덕분인지 몰랐다. 마을은 늘 풍작을 거뒀다. 그런데 수십 년 후 난데없는 ‘흉작’이 들이닥칠 줄은 천만 뜻밖이었다. 전성기에 무려 200여 가구의 800여명 인구를 자랑하던 영풍마을은 20년 전부터 인구가 눈자리 나게 줄어들고 있단다.

 

네, 영풍촌처럼 농촌 인구의 이런 극감은 도시화에 따라 대륙의 많은 곳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옛 촌락의 소실 속도는 상당히 사람을 놀래게 합니다. 국가통계국이 해당 수치에 따르면 2000년 중국에는 자연촌이 360만개 있었는데 2010년에는 270만개로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10년 동안 90만개의 촌이 소실되었는데 하루만에 약 300개의 자연촌이 소실된 셈입니다.

지명 이야기 ‘강남에 있었던 강북 마을’을 말씀드렸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지명과 관련한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제일 동쪽에 훈춘이라는 지명이 있는데요, ‘훈춘’이라는 이 지명은 무슨 의미일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명 ‘훈춘’은 무슨 의미로 지은 이름일까요.

길림성 연길시의 박철원 청취자가 아래와 같이 답안을 보내왔습니다.

“훈춘이란 그 지리적 위치가 만족어의 “꼬리”란 의미에서 기인되였다고 합니다.

훈준하라고 불리던 강 이름의 벌레 ‘춘蠢’서 벌레라는 글자는 달아나고 봄 ‘춘春’ 글자만 남아서 불러내려온 이름이라고 방송에서 들었습니다.

이전에는 그곳에 강이 많아 안개가 끼며 흐린 날이 많다고 흐릴 훈자가 따라 훈춘이라고 부른다고만 알고 있었습니다.

네, 박철원 청취자의 자세한 답안에 감사하구요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박은옥(MC),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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