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9월의 네 번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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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 목요일인 23일은 올 한해의 266일이 되는 날입니다. 올 한해가 마감할 때까지 인제 99일 남았습니다.
23일 이날은 추분입니다. 추분에서 나눈다는 의미의 분(分)은 평균적으로 분배한다는 뜻으로 절반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추분 이날 햇빛은 거의 지구 적도를 직사하며 지구 각 지역의 주야가 함께 길어집니다. 낮과 밤 길이가 같아지고 가을의 찬 날씨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추분은 24절기에서 16번째 절기이며 가울철의 네 번째 절기입니다.
네, 올 추석을 맞아 자원봉사자들이 사랑이 듬뿍 담긴 월병을 전했다고 중국 연길시의 박철원 청취자가 소식을 전했습니다.
[간주 편지]
추석을 맞으며 연변민들레문화교류협회의 자원봉사자들이 한데 모여 애심월병을 만들어 불우한 어린이들과 독거 노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애심어머니 봉사자들은 사랑의 마음을 월병소에 듬뿍 넣어 정성들여 솜씨를 뽐내는 한편 아이들에게도 월병을 빚는 방법과 기술을 전수하였다.
민들레 애심엄마들이 곱게 만든 월병을 받아 안은 아이들은 보기에도 너무 이쁜 월병을 먹기 아깝다며 기뻐서 퐁퐁 뛰였다
네, 이 글과 함께 박철원 청취자는 올해 추석 연길의 노인뢰봉반은 어김없이 잊지 못할 선열들의 기념비를 찾아 추모의 경의를 드렸다고 소식을 보내왔습니다.
십오야 둥근 달의 추석에 많은 사람들은 또 고향 나들이를 즐겼고 관광을 즐겼습니다.
중국 문화관광부 데이터센터의 계산 수치에 따르면 2021년 추석 휴일 3일 동안 전국적으로 전년 추석 휴가기간의 82.7%를 차지한 연 8815만 9천 3백만 명이 외출했으며 국내 관광소득은 전년 추석 휴가기간의 78.6%를 차지한 3741.49억 원에 달했습니다.
이번에는 ‘민족단결의 꽃 활짝 피었다’면서 길림성 장춘의 김수금 청취자가 글을 보내왔습니다.
[간주]
“9월은 ‘민족단결’의 달입니다. 우리 제일자동차그룹 조선족 노인협회는 제일자동차공장의 지역사회인 ‘곤륜 지역사회’와 함께 ‘민족단결을 노래하는 연환모임’을 가졌습니다. 내용은 ‘대형 서예와 그림작품’ 전시회 그리고 ‘민족단결 연환모임’이었습니다. 그림 작품 전시에는 곤륜 지역사회의 작품 57점, 조선족노인협회의 작품 27점 도합 80여점이 전시되었습니다. 명가들의 서예와 그림 작품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가운데서 곤륜 지역사회 왕회장의 서예작품 ‘위대한 공적은 천추에 빛나라’는 글씨가 아주 크고 붓 솜씨가 대범하고 돌출하여 특별히 눈길을 끌었습니다. 우리 협회의 현정옥 씨의 그림 ‘공작새’ 그리고 ‘어미닭과 병아리들’은 형상이 너무 생동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이동화 씨의 서예작품인 모택동 주석의 시‘장정’은 멋진 글씨로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 노인들은 서예에 더 깊은 흥미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흠상하면서 전례 없던 감동과 더없는 만족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문예작품은 모두 13개 종목이었습니다. 무용 ‘백년의 꿈’은 부채춤이었는데, 나중에 100년의 백 글자를 부채 조형으로 표현하여 절묘한 아름다움으로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이밖에도 무용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 잊을 수 없는 그날’도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습니다. 또 곤륜 지역사회의 몽골춤 ‘나와 초원의 약속’은 춤동작이 아름다웠거니와 기교가 높아 우레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시 랑송도 환영을 받았습니다. 시 랑송 ‘창당 100주년의 감회’, ‘조국이여,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격정적인 낭송으로 당과 조국을 노래하는 진솔한 심정을 그대로 표현하여 사람들의 공명을 받았습니다. 남녀 소합창 ‘동경’, 독창 ‘아름다운 노래를 어머님께 드립니다’도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밖에도 악기 독주와 광장무 등도 정채로웠습니다.
끝으로 민족단결 무용 ‘각 민족 인민은 영원히 당을 따라 앞으로’는 민족단결의 아름다운 꽃을 활짝 피워 연환모임의 고조를 이뤘습니다. ‘민족단결 연환모임’은 이름과 뜻 그대로 한족과 조선민족이 손에 손을 잡고 노래하며 춤을 추고 사랑과 단결의 힘을 과시했습니다.
저는 연환모임을 시작하면서 방룡익 회장 등이 언급한 습근평 주석의 말씀에 더없이 흥분하였고 행복감을 느낍니다. 습근평 주석은 ‘중화민족이 석류처럼 굳게 끌어안고 단결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더욱 아름다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두 민족은 이날 ’석류‘처럼 하나로 단합된 힘을 보여줬습니다.”
네, 단합과 사랑의 힘을 보여준 연환모임의 내용이었습니다. 추석의 풍요로움과 사랑을 전한 김수금 청취자의 추석 소식 반가웠습니다.
2. 지명과 연변
이 시간에는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이런 제목으로 지명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의 마을 지명 이야기입니다.
마당길을 빌어서 다녔던 어촌마을
옛날 버들방천에 있었던 그 부락은 ‘헤무기’라고 불렸다고 한다. 헤무기는 중국글로 흑목적黑木積 혹은 목계木鷄라고 쓴다. 이 때문에 헤무기를 ‘나무 닭’이 아닐지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마을의 수장인 황무길 촌장도 ‘헤무기’가 뭔지 모르고 있었다. 그저 예전에 헤무기라는 이름을 노인들에게 얼핏 들었을 뿐이라고 한다.
어쩌면 헤무기의 정체는 버들방천처럼 강가에 피어오르는 안개에 잠겨있는 것 같았다.
지방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헤무기’는 만족 말이며 메귀리라는 의미라고 한다. 메귀리는 볏과에 속하는 한해살이풀 또는 두해살이풀로 구황식물救荒植物이다.
하필이면 구황식물로 이 고장의 이름을 만들었는지는 그냥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아무튼 1886년 버들방천의 동쪽에 중국-러시아 국경비석인 ‘토자패土字牌’를 세울 때 ‘헤무기’라는 이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토자패’는 우수리강 어구부터 두만강 어구까지 설립한 ‘야耶’, ‘역亦’, ‘객喀’, ‘랍拉’, ‘나那’, ‘왜倭’, ‘파帕’, ‘토土’ 등 여덟 글자 국경비석의 하나이다.
그때 이곳에는 벌써 자그마한 부락이 있었다. 이 부락은 일찍 동치(同治, 1861~1875) 연간 생겼다고 한다. 청나라의 봉금령이 아직 해제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조선인 간민墾民들은 먼저 러시아 원동지역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중국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간민들은 국경선을 두 개나 가로타고 다닌 셈이다.
어쨌거나 ‘헤무기’는 마을의 명물로 되기에는 손색이 있었다. 버들방천 즉 버드나무가 늘어서 있는 강둑이 그림 같은 풍경으로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푸른 숲이 궁극적으로 ‘방천防川’이라는 지명으로 남게 되었다. “동삼성정략․훈춘편東三省政略․琿春篇”은 방천항防川項이라고 지명을 기록하고 있는데 목 항項은 ‘좁은 곳’을 이르던 우리말이다. 강기슭의 좁은 지대에 몰려있는 이 마을은 흡사 목덜미를 방불케 했던 것이다.
장고봉張鼓峰 사건이 일어나기 전 방천마을에는 66가구의 300여명 인구가 살고 있었다. 그중 62가구가 조선인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왕 씨 성의 중국인 지주의 소작농으로 있었다고 한다. 또 중국인 한 사람은 나룻배를 몰았고 다른 한 사람은 야채를 팔았다. 그리고 팽彭 씨 성의 중국인은 모친을 따라 조선족으로 족적族籍을 바꿨다. 중국인이 네 가구라고 하지만 기실 세 가구 반이었다.
장고봉張鼓峰은 방천의 뒤쪽에 위치, 해발 115미터의 나지막한 야산이다. 그러다가 1938년 7월에 발발한 전쟁으로 해서 이름나게 되었다. 워낙 악기 장고와 흡사하다고 해서 장고봉長鼓峰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길 장長과 성씨 장張은 같은 음이며, 습관적으로 성씨를 붙여 장고봉張鼓峰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또 북 고鼓는 높을 고高의 와전이라고 하는 설이 있다.
1938년 7월 일본군 군인 3명이 변복하고 장고봉 일대에서 소련측 군사시설을 정찰했다. 그러다가 소련군에 발견되어 1명이 사살되었다. 이것이 ‘장고봉사건’의 도화선으로 되었다. ‘장고봉사건’은 일본과 소련 양측이 모두 사단병력을 동원한 대규모의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소련군은 일본군에 우세한 무기장비와 전역지휘, 여러 병종의 협동작전 능력으로 일본군의 ‘북진’ 시도를 좌절시켰다.
고래싸움에 죽어나는 건 새우들뿐이다. 전투가 일어나자 마을의 남성들은 징집되어 부상자와 시체를 운송했으며 여성들은 밥을 지었다. 포화 때문에 가옥이 훼손되고 사람이 다치는 일이 빈발했다. 와중에 포탄이 집 근처에 떨어지자 누군가 애기 대신 베개를 안고 허겁지겁 뛰었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마을에서 일화로 전하고 있다.
훈춘현지琿春縣志의 기록에 따르면 ‘장고봉사건’ 후 방천마을의 주민들은 전부 다른 지역으로 이주되며 이 일대는 금지구역으로 되었다. 수백 정보의 밭은 다시 예전의 황무지로 되었다. 항일전쟁이 끝난 후에도 방천은 한동안 무인지역으로 있었다. 1947년 옛 주민들이 일부 찾아왔으며 이때부터 목 항項을 떼어버리고 정식으로 방천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이주민들 역시 불과 몇 해 후 다시 타향으로 떠나게 된다. 그때 정부에서는 방천에 큰 목축장을 꾸리려고 했다고 한다.
어찌됐거나 방천의 원주민은 더는 현지에 나타나지 않는다. 방천의 옛 기억은 그렇게 원주민을 따라 타향으로 조각조각 흩어지고 말았다.
목축장은 그로부터 수년 후인 1961년 방천에 나타났다. 이에 따라 다시 10여 가구의 인가가 생겼다. 1965년 또 서북쪽의 소반령小盤嶺 마을에서 17가구 천입하여 밭을 가꿨다. 소반령은 산고개의 길이 오불꼬불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워낙은 골짜기에 여러 부락이 널려있었는데 1937년 한곳에 집중되어 ‘집단부락’을 형성했다고 한다.
황무길 씨의 가족이 이삿짐을 풀었던 1977년 방천도 강기슭에 하나의 ‘집단부락’을 이루고 있었다. 이때의 방천은 경신공사敬信公社 방천대대防川大隊라는 행정마을로 등장하고 있었다.
마을에는 30가구 정도 살고 있었는데 학교까지 하나 설립되어 있었다. 또 의료소가 있었고 동네슈퍼가 있었다. 몇 걸음 걷지 않고도 웬만한 병을 볼 수 있었고 일용품을 살 수 있었다. 그야말로 “참새는 작아도 오장육부를 갖춘 셈”이다.
더구나 이웃나라에 자유지재로 드나들 수 있는 신기한 길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두만강 북안의 강둑은 방천으로 드나 들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이 통로가 1957년에 있은 큰물에 가랑잎처럼 떠내려갔다고 한다.
1983년 돌로 강을 메워 강둑을 만들었고 수년 후 또 그 위에 포장도로를 닦았다.
강둑의 왼쪽은 러시아이고 오른쪽 강 건너는 조선이다. 정말이지 강둑 위에 서서 팔을 벌리면 손끝에 두 나라가 닿을 정도이다.
그야말로 세상에 둘도 없는 ‘천하 제1의 강둑’이었다.
진짜 관문과 같다고 해서 그랬을지 모른다. 강둑의 북쪽 끝머리는 워낙 ‘양관평陽關坪’이라고 불렸다. 마을이름이었다. 청나라 동치 연간 간민들이 월강하여 땅을 개간, 차츰 부락을 이뤘다. 지세가 평탄하고 땅이 넓다고 해서 양지쪽 넓은 벌이라는 의미의 ‘양광평陽廣坪’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19세기 말, 러시아가 이 고장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때 조선인들은 마을을 양코배기의 관저를 연상케 하는 ‘양관평洋館坪’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이름이 원래의 이름을 말끔히 밀어버리고 지금까지 전하고 있는 것이다.
길을 빌었던 역사는 양관평의 석물에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대미문의 이 기억은 재현될 것 같지 않았다. 양쪽 러시아와 조선의 국경선에 모두 키를 넘는 철조망이 촘촘히 들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개구쟁이들이 두만강에 뛰어들어 물장구를 치던 일은 벌써 옛말로 되고 있었다.
그런데 방천은 바로 고기잡이가 생업인 어촌마을이라고 한다. 촌민들은 해마다 3월초부터 두만강에서 황어와 숭어, 송어를 잡고 9월부터는 강이 얼기 전까지 뱀장어, 연어 등속을 잡고 있었다. 알고 보니 방천은 3국이 인접한 지대이고 또 관광객이 드나드는 곳이라서 정부의 많은 특혜를 받고 있단다.
그럴지라도 공동화의 현상은 여느 시골마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현재 46가구의 140명이 호적을 붙이고 있지만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은 고작 40명 정도라고 한다.
이러니저러니 두만강 하류 사람들의 어로작업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들은 옛날 배를 타고 두만강뿐만 아니라 동해바다에 나가서 고기잡이를 했던 것이다. 그 시절의 가요 “동해어가東海漁歌”는 현지에 오랫동안 유전되었다고 한다.
“해삼위海蔘威의 해변에서
쇠스랑이로 해삼을 잡아요.
해삼은 검고 크지만
아빠는 무서워하지 않아요.
…”
해삼위는 원동에 있는 항구로 해삼이 많이 난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다. 러시아말로 울라지보스토크라고 한다.
‘장고봉사건’ 후 괴뢰 만주국 정부는 방천 부근의 두만강에 말뚝을 박고 두만강의 항로를 봉쇄하였다. 그때부터 동해바다의 뱃길은 이런저런 원인으로 말미암아 그냥 열리지 못하고 있다.
기실 방천부터 바다까지는 불과 10여 킬로미터, 조망대인 망해각望海角에 올라서면 지평선 저쪽의 바닷물이 금세 출렁출렁 밀려와 손끝을 파랗게 적실 듯하다. 그러나 어촌마을의 옛 기억처럼 그 이상 더 다가설 수 없는 것이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지명과 관련한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제일 동쪽에 훈춘이라는 지명이 있는데요, ‘훈춘’이라는 이 지명은 무슨 의미일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명 ‘훈춘'은 무슨 의미로 지은 이름일까요.
길림성 장춘시의 라명희, 주송숙, 박숙녀, 정군식, 오애하, 윤순화, 박룡익, 김금녀, 정기순, 한란희, 윤영순, 김금숙 등 청취자는 ‘훈춘’은 훈춘하의 하류에 위치해 있고 바다에 가까운 곳이라서 늘 안개가 끼고 흐리며 그래서 ‘훈춘’이라고 이름 했다고 답안을 보내왔습니다.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박은옥(MC),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