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11월의 네번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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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인 25일은 양력 한해 가운데서 329일째 되는 날입니다. 올 한해가 마감할 때까지 두 달에 미치지 못한 36일이 남았습니다.
이번 주 역사상의 이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매년 11월 25일은 국제 여성 폭력 추방의 날입니다.
1960년의 11월 25일, 도미니카공화국에서 파트리아, 미네르바, 마리아 테레샤 등 미라 자매가 독재정권에 의해 피살되었습니다. 1981년 7월, 제1회 라틴미주 여성권리 대회는 11월 25일을 폭력추방의 날로 선포했습니다. 1993년의 이날 유엔은 ‘여성 폭력 추방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1999년 11월 3일, 유엔총회는 도미니카공화국이 제안하고 60여개 나라가 지지한 창의를 통과하여 해마다 11월 25일을 ‘국제 여성 추방의 날’로 정했습니다.
11월 25일은 또 국제 소식(素食)의 날입니다.
이 명절은 1986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인도의 명절 ‘육류가 없는 세계의 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후 차츰 세계적인 명절로 발전되었습니다. 이날 세계 여러 지역의 도축장은 도축을 중단하며 많은 식당과 병원 등 장소에서는 전부 소식 식품을 공급합니다. 세계적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운동에 호응하고 있습니다.
11월 25일은 수리남의 독립기념일입니다.
수리남은 원래 미주 인디안인 거주지였습니다. 1593년, 스페인 탐험가에 의해 스페인의 속지로 선포되었습니다. 1602년 네덜란드인이 이곳에서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1630년 영국 이민이 이주했습니다. 1667년, 영국과 네덜란드가 조약을 체결했으며 이에 따라 수리남은 네덜란드 식민지로 되었습니다. 1815년 비엔나 조약은 수리남에 대한 네덜란드의 종주국 지위를 정식 확립했습니다. 1954년, 수리남은 내부 자치를 실행했으며 1975년 11월 25일 독립을 선포하고 공화국을 창립했습니다.
노래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다시 만납시다, 낯선 사람입니다.” 장심연이 불러드립니다.
2. 박씨 마을과 중국 대륙
이 시간에는‘박씨 마을과 중국 대륙’, 대륙의 옛 마을에 조선인의 옛 얼굴이 나타난다‘ 이런 제목으로 중국 대륙의 옛 마을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비구니의 암자에 숨어있었던 박씨네 오누이
박가구(朴家溝)의 어귀에 웅악성(熊岳城)이 흡사 곰의 모양으로 웅크리고 있었다. 웅악성은 실제 그 이름처럼 근처의 곰 바위 모양을 따온 지명이라고 전한다. 웅악성은 요녕성(遼寧省) 영구(營口)의 개주(盖州)에 소속했었으나 얼마 전에는 발어권(鮁漁圈)에 귀속되었다.
사실상 웅악성이 자리를 옮긴 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漢)나라 때는 평곽현(平郭縣)의 치소(治所)였고 요(遼)나라 때 현재의 위치로 성을 이전했다고 한다. 웅악성이라는 이 이름을 지은 것도 이때 비로소 생긴 일이다.
박가구도 시초에는 대추의 이름을 따서 조욕(棗峪)이라고 불렸다. 골짜기는 땅이 적었지만 산이 깊고 수림이 무성하여 대추가 특별히 많았다고 한다.
토박이 박정관(朴井寬,1937년 출생)에 따르면 원체 곡식을 심을 고장은 아닌 듯하다. 예전에 곡식을 심어서는 다들 입에 겨우 풀칠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미구에 산비탈에는 과일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1980년대부터 포도와 배나무 등속이 줄줄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박가구는 또 다시 과수의 낙원으로 되고 있었다. 그럴지라도 더는 옛날의 대추의 골짜기는 아니었다.
박정관은 우리 일행이 마을에서 맨 처음 만난 박씨이다. 박씨네 연장자를 찾자 누군가 대뜸 그를 안내했던 것이다. 뒷이야기이지만, 박정관은 박가구의 박씨 가운데서도 항렬이 제일 높은 사람이었다.
박정관은 구들에 걸터앉아 먼저 박씨의 항렬 돌림자를 헤아렸다. 박가구 박씨의 20자 돌림자는 마치 구구단을 외우듯 박정관의 입에서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박정관의 신분증 이름에는 박씨의 항렬 돌림자가 들어있지 않다고 했다. 신분증을 만들 때 마을의 어느 관리자가 그의 이름자를 동음이의어의 다른 글자로 잘못 신고했다는 것이다
박가구 박씨의 유일한 족보인 《박씨역대조종(祖宗)》에는 서언이 없고 또 족보를 작성한 연대가 없다. 박씨의 족보에 서언과 고증, 대사기 등등이 나타난 것은 2008년이다. 《박씨역대조종》을 전승했던 박경청(朴景淸)은 박영상(朴永祥) 등 박가구의 박씨 유지들과 함께 반복적인 고증을 거쳐 족보를 중수(重修)했다. 이때에야 족보에는 박씨가 신라의 성씨라고 정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종족의 원천지가 바다 건너 반도에 있다는 것을 인제야 문자로 밝힌 것이다.
참고로 족보를 작성한 박경청은 진(鎭) 문화소의 직원이었고, 박영상은 진 학교의 국문교원이었다. 하필이면 신분을 일일이 밝히는 것은 족보가 그들처럼 글을 읽은 선비들이 있기 때문이다. 박정관은 나이나 항렬 모두 박씨네 연장자였지만 그들의 가계를 잘 알지 못했다. 돌림자 20자도 입으로 외우고 있었지만 글자로 일일이 옮길 수 없었다. 세조 박의부의 이름자도 종이위에 제대로 적지 못했다. 족보가 세대를 이어가면서 일부 와전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지 한다. 박씨의 항렬 돌림자와 세조의 진실한 이름은 박정관을 따라 족보의 주요 저자인 박영상을 만난 후 비로소 제대로 밝힌 것이다.
박영상의 이름은 항렬 돌림자의 이야기를 할 때 우연히 박정관의 화두에 올랐다. 선인(先人)이 물려준 항렬 돌림자 20자를 제외하고 후손들은 또 새 돌림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돌림자를 아래 마을의 박영상이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박정관은 나중에 우리 일행을 박영상에게 안내했다.
박영상은 75세로 박정관과 6년의 나이 차이었지만 항렬을 따지면 제14대로 박정관의 손자 벌이었다. 박영상은 새 돌림자 얘기가 나오자 안방에 들어가더니 족보를 내왔다. 이 족보는 이런저런 일로 초판에 한정되었으며 그나마 20부로 한정되고 있어서 박정관 등 박가구의 많은 박씨는 아직도 족보가 새로 발행된 줄 모르고 있었다.
박영상은 족보의 가계도를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우리에게 낱낱이 설명을 했다. “박가구의 박씨는 지금까지 돌림자 솜 면(綿)의 제17대에 이르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본계(本溪) 박보(朴堡)의 박씨와 서로 돌림자만 뒤바꾼 것 같았다. 본계 박씨는 현재 제16대에 이르고 있는데, 세조 때 맏이의 후손으로 세계(世系)를 이었을 경우 17, 18대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와중에 세조의 다섯 형제에서 둘째가 실종되었다고 하니, 혹여 둘째가 남쪽의 이 개주에 와서 박씨의 세계를 잇지 않았을지 하는 물음이 나올 정도이다.
어찌되었거나 박가구와 박보의 박씨는 분명 최초의 중국 조선족의 한 갈래였다. 그들이 대륙에 천입(遷入)하면서 조선족 이민사의 역사를 열었다는 것이다. 박씨 성씨가 조선인 후예의 진실한 족명을 확인할 수 있고, 박씨 세계(世系)의 족보가 그들의 천입이 시작된 연보(年譜)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이다.
박정관이나 박영상처럼 박가구의 박씨는 도합 57가구, 224명인 것으로 박씨 족보가 2008년의 통계에 밝히고 있다. 그들은 모두 호적(戶籍) 명부에 조선족으로 명백히 등록되어 있었다.
노래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바람이 불어 밀파도가 일어나네”, 왕건이 불러드립니다.
네, 계속하여 “비구니의 암자에 숨어있었던 박씨네 오누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족보에 따르면 박가구에서 박씨의 족명 회복을 처음으로 제기한 것은 1964년 제2차 전국 인구전면조사를 할 무렵이었다. 그때 마을의 1인자로 있던 당지부 서기 박금구(朴金久)에 의해 박씨의 족명을 확정하는 문제가 민족 학계의 새로운 관심사로 부상했다.
정작 족명 회복이 시작된 것은 제3차 전국 인구전면조사를 하던 1982년경이었다. 그해 중국 국무원과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 “민족 성분을 회복 혹은 개정할 데 대한 처리원칙 통지”(제601호)를 반포했다. 이 통지가 발표된 후 영구시는 정부 차원에서 박씨들에게 족명을 조선족으로 바꾸도록 홍보, 인도했다고 전한다.
박영상은 이날 마을의 박씨네 풍속을 이야기에 담았다. 박씨 가문에는 본래 일명 노인회(老人會)라고 하는 모임이 있었다고 한다. 이 노인회 역시 인민공사가 시작되던 그즈음 산실(散失)되었는데, 예전에는 해마다 음력 10월 초하룻날이면 행해지던 풍속 모임이라고 한다. 박씨 노인들은 마을 동쪽 6리 밖의 안자산(鞍子山)에 가서 제를 지낸 후 좌장의 집에 가서 점심을 함께 들었다. 안자산에는 박씨의 선조가 거주했다고 하는 고자동(姑子洞)이 있었다.
고자동은 이름 그대로 해석한다면 ‘비구니가 살던 암자’이다. 옛날 옛적에 박씨네 오누이가 살던 동굴이라고 현지에 전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당(唐)나라의 명장 설례(薛禮, 613~683)가 동쪽 정벌을 할 때 고려 오누이가 전란을 피해서 인가가 드문 안자산에 숨어들었다. 주거지는 찾았지만 당장 뭘 먹고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그런데 아침에 닭이 홰를 칠 때 어제 심은 곡식은 기적처럼 벌써 여물고 있었다. 이변(異變)은 또 한 번 일어났다. 오누이가 각기 두 산꼭대기에 올라 동시에 세 번이나 굴린 바위는 모두 산 아래에서 함께 부딪치고 있었다. 그걸 천상의 인연을 알리는 하늘의 계시로 보고 오누이는 드디어 부부로 되며 이로써 박씨의 후손들을 이었다. 미구에 평화가 깃들자 박씨들은 산을 내려 동네를 이뤘다. 박씨네가 최초로 살던 곳이라고 해서 마을은 그들의 성씨로 이름을 달아 ‘박가구’라고 불렀다.
고자(姑子)는 또 남편의 여동생이라는 뜻이니, 고자동은 박씨네 오누이의 옛 전설과 아귀처럼 서로 들어맞는 부분이 있기도 한다. 그러나 동성은 통혼하지 않는다는 박씨의 불문율의 금기를 깨뜨리는 전설은 결국 믿을 수 없는 허황한 이야기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설례의 동쪽 정벌’은 사서에 기록된 사건이다. 전설에 나오는 이 시기의 전란은 사실(史實)과 들어맞는다는 얘기이다. 역사적으로 개현 지역에는 확실히 고려인이 살고 있었다. 부근의 철령현(鐵領縣)과 대안현(臺安縣) 등 지역에는 아직도 고려의 후손이라고 자청하는 고씨(高氏) 성의 사람들이 적지 않게 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문헌적으로 고려에는 아직도 박씨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동굴에서 시작되는 박가구 박씨의 시원은 여전히 풀기 힘든 수수께끼로 되고 있는 것이다.
와중에 박가구에서 확실하게 판명되는 박씨 가족사의 상한선이 있다. 이 상한선은 자칫 당나라의 명장 설례를 가깝게 만날 수 있는 1천 년 전까지 내처 치달아 오르고 있다. 1960년대 고자동의 잿더미에서 출토된 옛 그릇 등 문물은 요나라(907~1125) 시기의 것으로 판독되고 있었다. “현(盖縣을 뜻함)의 인구 57만 9천 9백 6명에서 고려인은 백의 하나”라고 《개현지(盖縣志)》가 기록한다. 고려는 요나라와 비슷한 시기 반도에 존속했던 옛 나라이다. ‘비구니의 암자’에 은거한 ‘박씨네 오누이’는 명·청 시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조선족 이주사의 상한선을 통째로 흔들고 있는 것이다.
박가구 박씨의 세조 박의부는 청나라 때 비로소 산을 나와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골짜기에 숨어살던 박씨들은 그즈음부터 만족으로 정식 족명을 바꿨다고 족보가 밝힌다. 그 후 박씨들은 주로 개주와 요양(遼陽) 일대에 이주했고 미구에는 또 전국의 방방곡곡에 널리 분산되었다.
네, 요녕성 영주 개주의 박씨는 처음에는 만족으로 있다가 1980년대에 다시 조선족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이 박씨는 약 천년 전의 고려와 요나라 때 벌써 중국에 이주했다고 합니다.
중국 대륙의 옛 마을 이야기 “비구니의 암자에 숨어있었던 박씨네 오누이”를 말씀드렸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지명과 관련한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한반도의 상징적인 성씨인 박씨는 오래전부터 중국 대륙에 등장하는데요, 역사서인 《원사(元史)》에 따르면 원나라 환관 박모모는 원(元)나라의 도읍인 대도(大都, 북경)에 나타납니다.
원나라 역사에 기재된 이 환관 박모모의 이름은 무얼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원나라 역사에 기재된 이 환관 박모모의 이름은 무얼까요?
네,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박은옥(MC),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