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1-12-17 15:01:14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1년 12월 16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12월의 세번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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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 목요일 16일은 양력으로 올해의 350일째 되는 날입니다. 어느덧 올 한해가 마감할 때까지 15일 남았습니다.

이번 주 역사상의 이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770년 12월 16일, 저명한 작곡가 베토벤이 탄생했습니다.

1775년 12월 16일, 영국 작가 오스틴이 탄생했습니다.

1890년 12월 16일, 인류는 처음으로 혈청 주사를 이용한 질병 치료에 성공했습니다.

12월 15일은 자멘호프가 탄생한 날입니다. 이날은 자멘호프의 날이라고 합니다.

자멘호프의 탄생일을 명절로 한건 세계어 학자와 사용자들이 이날을 전 세계 세계어인의 명절로 발전시켰기 때문입니다.

자멘호프는 폴란드인으로 국제어인 에스페란토의 창안자입니다.

12 15일은 세계 면역강화의 날입니다.

1988 41 세계보건기구 총회는 세계 면역강화의 날을 확정하고 실행했다. 명절은 척수 회백질염을 없애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일명 소아마비증이라고 하는 척수 회백질염은 지금은 소멸된 일부 질병의 하나입니다. 척수 회백질염 바이러스의 유일한 감염자는 인간인데, 인간 이미 효과적인 백신이 있으며 면역이 일생동안 지속적으로 존재할 있습니다.  

[ ]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이 약 50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본격적인 카운트다운에 들어갔습니다.

“성공적인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되길 기원”하면서 한국의 김연준 청취자가 글을 보내왔습니다.

편지 사연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청취자의 내신]

몇주 포근했던 날씨가 영하 10도 까지 떨어지며 일부 지역은 한파주의보가 발령되기도 했습니다.

본격적으로 매서운 한파가 몰려올텐데 동장군에 지지 않도록 건강관리를 잘 하시기 바랍니다.

최근 코로나로 부터 일상회복을 시작한 후 접종을 받지 않은 청소년들의 감염자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한국정부는 의료진이 학교를 방문해 접종을 실시하기로 결정했으며 2차 접종을 마친 사람은 3차 부스터샷 접종을 독려하고 있어  저도 이번주 3차 부스터샷을 접종 받을 예정입니다.

베이징 동계올림픽 50여일을 앞두고 일부 국가를 규합해 반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정치, 사상, 종교를 초월하는 올림픽 정신을 망각하고 자국의 이익만을 우선하는 잘못된 것입니다.

한국 문재인 대통령은 금일 호주를 국빈방문하면서 회견을 통해 베이징 동계올림픽 보이콧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정부 관련 당국자도 보이콧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여러차례 밝힌 후 나온 문재인 대통령의 확실한 의사표명은 어느 누가 설득한다 해도 보이콧에 동참하지 않는다는 선언과 같은 것입니다.

남은 기간 잘 준비해 세계인의 찬사를 받는 성공적인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되길 기원합니다.

청취자 여러분 모두 12월 잘 마무리 하시고 희망찬 2022년 새해를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김 연준“

2022년 동계올림픽은 2022년 2월 4일~20일 열리며 마침 음력으로 중국 임인년(壬寅年) 설, 즉 ‘호랑이의 해’의 시작과 맞물립니다. ‘호랑이’는 중국 문화에서 강직하고 용맹하며 상서로움을 상징하고 사악한 기운을 몰아낼 수 있다고 전합니다.

“호랑이의 해‘를 맞이하면서 김연준 청취자님과 더불어 청취자 여러분 모두 12월 한달을 잘 마무리 하길 기원합니다.

 

네, 올해 5월, 제7차 전국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중국에서 60세 이상의 인구는 총 인구의 약 18%를 차지한 2억 6천여만명입니다.

현재 전국적으로 여러 유형의 노인대학과 노인학교가 6만여개 되며 재교 학원생이 800여만명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노인대학과 노인학교는 기본상 성과 시, 현, 향 네트웤을 형성했습니다.

 

중국 연변의 노간부 대학에서 일부 교원과 학생들이 얼마전에 행사의 일환으로 중국조선족명인전을 참관했습니다.

연길시의 박철원 청취자가 글을 보내왔습니다.

 

“저명한 중국조선족  작곡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그들의  생애를  펼쳐놓은  연변청송문학예술관이  개관하였다.

12월7일과  9일,  연변로간부대학  조선어반인  성악2반과  성악4반  사생들은  연변청송문학예술관을  참관하였다.

중국조선족의  문학예술을  전승 보호하는데  취지를  둔  이  예술관에는  허세록,  박우,  안국민,  박세성  등 16명  중국 조선족의  저명한  작곡가들의  생평,  성과,  음악작품,  저작들이  전시되였다.

전시장에는  방영실도  설치되여  작곡가들의  생평 동영상과  연변의  명곡들을  시청할 수도  있었다.

연변로간부대학  성악반  학원들은  연변의  저명한  작곡가들의  노래를  즐겨  부르면서  그들의  예술(음악) 인생에서  크나 큰  고무를  받았다.

학원들은  전시된  작곡가들의  작품집도  돌아보고  레시바로  명곡도  선택해  들으면서  원로 음악인들의  불후의  업적을  기리였다.”

 

네, 노인들은 노인대학을 학습의 장소로 간주할 뿐만 아니라 사회와 소통하는 장소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중국 국무원에서 발표한 ‘노인교육발전기획 (2016_2020년)“에 따르면 여러 가지 형식으로 교육활동에 늘 참여하는 노인은 노인인구 총 숫자의 20%에 달한다고 합니다.

 

박철원 청취자의 좋은 소식 반가웠습니다.

 

[간 주]

 

2. 중국 대륙의 조선인 옛 마을

이 시간에는 ‘대륙의 옛 마을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국경에 벽을 세운 고려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국경에 벽을 세운 고려마을

 

맨 처음 흑룡강성(黑龍江省) 동북쪽의 밀산(密山)에 발을 들여놓은 조선인들은 남쪽의 조선에서 국경을 건너왔다. 웬 일인지 그들은 땅 좋고 물이 좋은 흥개호(興凱湖)를 그냥 지나쳐서 동쪽의 러시아 연해주로 가버렸다고 한다. 뒤미처 조선인 3가구가 흥개호 기슭에 나타나 이삿짐을 내려놓았다.

흥개호에 정착한 이 조선인들은 마침 연해주에서 온 이민들이라고 한다. 그게 광서(光緖) 15년(1889)의 일이다.

흥개호는 중국과 러시아 국경 위의 호수이다. 당(唐)나라 때는 미타호(湄沱湖)로 불렀으며 미타의 붕어로 소문이 났다. 흥개는 만족말로 이 호수에 살고 있는 ‘물쥐’를 뜻한다. 적어도 만족 사람들에게는 붕어보다 물쥐가 더 인기가 있은 것 같다.

아무튼 흥개호에 정착한 조선인들은 어렵이나 수렵에 흥미를 가진 게 아니었다. 그들은 계곡의 물을 이용하여 벼농사를 지었고 나중에 흥개호 기슭의 여기저기에 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밀산은 일찍 청(淸)나라 함풍(咸豊) 11년(1861)에 봉금(封禁)이 해제되었다고 한다.

그 무렵 밀산에는 야생벌이 무성한 삼림에 무리를 이뤘으며 꿀이 돌 틈서리로 물처럼 흘렸다고 한다. 그래서 꿀이 많다는 의미의 봉밀산(蜂蜜山)으로 불렸는데, 훗날 밀산부의 이름을 지어 올릴 때 인감에 꿀 밀(蜜)을 빽빽할 밀(密)자로 고쳤다고 전한다.

꿀벌의 동네에 찾아온 간민들도 급기야 굴뚝을 빽빽한 수림으로 이루고 있었다. 광서 25년(1899), 흥개호 일대에는 1천여 가구의 간민이 살았다.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간민이 300여 가구였으며 와중에 조선인은 50여 가구나 되었다.

“나무가 한 그루가 나중에 숲을 이룬다.” 밀산에 처음 나타난 조선인들은 드디어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종국적으로 조선인들은 어디로 가든지 벼농사에 귀의(歸依)하고 있는 듯하다. 1917년, 권씨 성의 사람이 도랑을 파고 흥개호에 흘러드는 강을 에워 논에 끌어들였다. 이때부터 가가호호 벼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입소문이 돌자 극동지역과 연변에서 살던 많은 조선인들이 끼리끼리 이 고장에 모여들었다.

그때 권씨가 많이 살고 세력도 커서 그들이 사는 동네를 ‘권씨네 마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밀산 첫 조선족 마을에는 씨족의 동네가 출현하고 있었다. 흥개호 기슭에는 권씨 마을을 망라, 조선인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 세 개 되었다. 당벽진(當壁鎭)의 토박이였던 김씨 등 성씨의 노인은 예전에 상촌은 권씨 마을, 중촌은 당벽진, 하촌은 변경마을이라고 불렸다고 회억했다.

당벽진(當壁鎭)은 중국말 그대로 국경의 벽이 된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1860년 《북경조약》이 체결된 후 중국과 러시아는 현재의 당벽진 부근의 백릉하(白稜河) 기슭에 동쪽변계를 구별하기 위한 담판장소를 설치한다. 초기 러시아에 대한 중국 민간무역의 통로는 바로 이 당벽진이었다. 당벽진은 중국과 러시아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길목이었으니 말 그대로 국경을 가름하는 벽의 마을이라고 하겠다.

국경의 벽의 뒤에는 간민의 마을뿐만 아닌 무장투쟁의 기지가 출현하고 있었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해외 반일독립무장투쟁의 첫 기지로 된다고 한다.

이른 봄이면 임호촌의 밭에는 색깔이 남다른 땅이 나타난다. 밭갈이를 할 때면 또 질그릇이나 구들돌 등 유물이 발견된다고 한다. 옛 마을 ‘한흥동(韓興洞)’은 땅속에서 흙을 밀고나와 기어이 그 존재를 하늘 아래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1909년, 한국 반일독립지사 이승희(李承熙, 1847~1916)가 이상설(李相卨,1870~1917 ) 등 반일독립지도자들의 위탁을 받고 봉밀산 부근에 와서 고찰한 후 땅 45방(方, 약 2,250무)을 구입했다. 그해 중국과 러시아의 연해주에 분산된 조선인 100여 가구를 집단이주, 새 마을 ‘한흥동’을 세웠다. 한흥동은 한국을 부흥하는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반일독립지사들이 봉밀산 기슭에 그들의 기지를 선택한 이유가 있었다. 조선인 이민촌락이 이미 규모를 갖췄고 또 개간이 가능한 옥토가 널려 있었다. 더구나 조선반도의 일본군 위협과 멀리 떨어져 있었고 유사시에는 국경을 넘어 러시아에 이동, 후퇴할 수 있었다.

한흥동은 당벽진의 백포자(白泡子) 일대에서 제일 먼저 생긴 동네였으며 또 ‘고려영’이라고 불렸다.

실제 《청나라 말기, 백포자에는 사람들이 거주, 일부 한족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조선인들이었다.》고 백포자의 향지(鄕志)가 기록하고 있다. 향지는 이 조선인의 마을은 현재의 임호 3조(組, 촌민소조)이며 옛 이름은 고려영으로 조선인들이 사용하던 기관들이 이를 증명할 수 있다고 부언한다.

한흥동이 세워진 후 조선 평안도와 함경도, 러시아의 연해주에서 대량의 조선인이 이주하여 흥개호 연안과 십리와(十里洼), 밀산부(密山府) 일대에 들어와서 조선인 마을을 형성하였다. 1922년 3월,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밀산 경내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은 298가구, 1,192명에 이르고 있었다. 불과 10여년 후인 강덕(康德, 괴뢰 만주국 연호) 3년(1936), 조선인은 2,650가구의 11,730명에 달했다. 와중에 봉밀산 아래의 흥개호 기슭은 조선인의 집거지로 되고 있었으며 나아가 밀산 지역은 한국 반일독립운동의 제1기지로 떠오르고 있었다.

한흥동은 후속적인 지원의 결핍 등으로 불과 4년을 유지했다고 한다. 홍범도 등 장령이 부대를 인솔하여 전략적 전이를 하면서 기지는 사명을 마치고 결속되었다. 고려영의 조선인들은 차츰 이사를 갔으며 1930년 후에는 한족 마을로 되었다. 벼를 심던 논은 언제인가부터 다시 밭으로 되어버렸다.

한흥동은 한국의 근대 민족독립운동사에서 첫 시도였다. 한흥동은 또 그 후의 우리 동북의 항일투쟁에 혁명의 씨앗을 심어주었다.

1931년 9월 18일, 중국에서 항일전쟁이 발발한 후 밀산 지역에서 조선인들은 신속히 행동을 개시했다. 밀산의 첫 번째 항일총회 회장 그리고 제1진 항일총회의 회원 도합 380명의 90%는 모두 조선인이었다. 첫 항일부녀구국회(抗日婦女救國會) 주임과 회원은 도합 200명이었는데, 이 전체가 모두 조선인이었다. 1934년에 창설된 밀산 항일유격대의 대원은 34명이었는데, 이 가운데서 33명은 조선인이었다. 밀산의 조선인 마을은 모두 항일투쟁에서 후방의 근거지로 되고 있었다.

1933년 일본군이 동북 변강을 점령하면서 점차 변계를 봉쇄했다. 1941년 6월, 일본군은 ‘변계 정화(淨化)’를 실시, 당벽진의 주택 전부를 소각했다. 국경 주민의 내왕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마을이 흩어지고 변경무역은 중지되었다. 1940년을 전후하여 상촌에는 7,9가구, 중촌에는 10가구, 하촌에는 15~20가구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인 마을은 고려영을 포함하여 당벽진에 1940년대 초까지 존속했다. 현재로선 당벽진에 조선족이 한 가구도 없다고 하니, 누구라도 옛 마을과 조선족(인)을 연결시킬 수 없는 게 당연지사일지 모른다.

당벽진의 옛 기억은 대부분 민국 시기의 서류와 괴뢰 만주국의 《밀산사정(事情)》, 밀산 현지(縣志), 향지(鄕志)의 기재와 구술 자료에 의거하고 있다. 그럴지라도 일부 옛 흔적은 여전히 현지에 다다소소 남아있는 듯하다. 1980년대 초반, 최씨 성의 조선족 노인이 옛 마을을 찾아 선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었을 때 당벽진 부근 벌판의 수풀에서 옛날 농사를 짓던 논두렁을 발견했다고 한다.

종국적으로 옛 마을은 옛 지명으로 집단기억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한때 밀산 경내에 거주하던 조선인(족) 촌락은 무려 45개나 되었지만 공화국의 창립 직후 32개로 줄어들었고 그 후 소실, 합병되면서 2천년에는 17개의 행정촌으로 줄어들었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마을을 떠나 도시로 진출하고 있었다. 그들 젊은 세대는 물론 기성세대도 대개 농사를 포기하고 땅을 폐답으로 방치하거나 남에게 임대하고 있다. 언제인가부터 마을의 논은 밭으로, 논주인은 밭주인으로 변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마을과 그 사람들의 옛 이야기는 어디에 있게 될까…*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성씨와 관련한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반도의 고유한 성씨라고 하는 박씨는 중국에도 있으며 또 여러 족명 즉 여러 민족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데요, 그러면 박씨는 중국에서 어떤 족명으로 되어 있겠습니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반도의 고유한 성씨라고 하는 박씨는 중국에서 어떤 족명 즉 어떤 민족의 이름으로 되어 있겠습니까.

 

네,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박은옥(MC),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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