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1-12-27 10:28:03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1년 12월 23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12월의 네번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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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 목요일 23일은 양력으로 올해의 357일째 되는 날입니다. 어느덧 올 한해가 마감할 때까지 8일 남았습니다.

이번 주 역사상의 이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208년의 12 23, 주유가 적벽을 불살랐습니다. 이야기는 명작삼국연의 비중으로 실립니다. 주유는 동한 말년의 군사가이자 정치가이며 오나라의 명장입니다.

2008년의 12월 23일, 대륙이 대만에 증송한 판다곰 ‘탄탄’과 ‘왠왠’이 공동(珙桐)나무 17그루와 함께 성도 쌍류국제공항에서 대만에 운송되었습니다.

팬다곰은 지구에서 적어도 800만년 동안 생존하여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중국의 국보입니다.,

공동나무는 또 손수건 나무라고 불립니다.

제4기 빙하기 시기 대부분의 공동나무는 연이어 멸종하고 중국 남방의 일부 지역에서만 생존했습니다. 이 때문에 식물계의 ‘살아있는 화석’으로 되었으며 중국의 특유한 희귀종 흠상식물로 되었습니다.

2005 12 23 중공중앙, 국무원은문화체제 개혁을 심화할데 대한 일부 의견 발부했습니다. 의견은 과학적이고 유효한 거시문화체제를 형성하고 효율 있는 문화생산과 봉사의 거시운행 메커니즘으로 하며 공유제를 주체로 다종 소유제가 공동 발전하는 문화산업 구조를 형성할 것을 제기했다. 의견은 또한 통일, 개방, 경쟁의 절차 있는 현대문화 시장체계로 문화혁신 체계를 완벽화하며 민족문화를 주체로 외래의 유익한 문화를 영입하여 중화문화가 세계 문화로 나아가는 개방한 구조를 추진할 것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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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길림성 장춘시 조선족군중예술관에서 성대한 연말 공연이 있었는데요, 이 공연을 보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면서 장춘시 김수금 청취자가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편지 사연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청취자의 내신]

장춘 조선족군중예술관이 12월 10일과 11일, 12일 3일간 성대한 연말 '양성반 작품 공연'을 가졌습니다.  군중예술관에서 양성반을 통해 문예애호가들을 훈련, 육성합니다. 저는 양성반의공연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양성반은 이번에 규모가 전례없이 크고 또 지속시간이 길다고 합니다. 9개월 동안 양성반에서 수업을 받은 사람은 연 12만명에 달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숫자입니다. 연 12만명이라는 이 숫자에서 예술관 관원들의 로고를 깊이 느낍니다. 그들은 전통 문화의 전승과 발전을 위해 아낌 없는 노력과 지혜를 바쳤습니다.

양성반은 예술관의 전문 교원만 아니라 자원봉사자자 교원을 모시고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수업내용이 더욱 풍부해졌습니다.

양성반이 이번에 공연한 작품 내용은 너무 풍부했습니다.

북, 장고, 가야금, 관악, 기타, 전자풍금 연주가 이 있었고 합창과 무용이 있었습니다. 또 요가와 시랑송, 서예 전시 등 10여종의 종목이 공연되었습니다.

양성반의 작품 공연의 참여자들도 다양해졌습니다. 이전에 공연자는 조선족 뿐이었는데 올해는 한족, 몽골족, 만족 등 여러 민족 인원이 참석했습니다. 56개 민족이 화목한 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중국, 여러 민족이 한 무대에서 손에 손잡고 노래하며 춤추는 그 모습이 더욱 아름다운 풍경을 이뤘습니다.

양성반의 공연 작품은 무려 37개 종목에 달했습니다. 오전과 오후 옹근 하루를 공연했습니다. 그래도 극장은 앉을 자리를 찾기 힘들게 빼곡했습니다.

양성반의 이번 공연은 광객들의 요구로 3일 연속 이어졌습니다. 지역사회 주민까지 찾아와서 공연을 관람했습니다.

장춘시 조선족군중예술관은 그들의 뿌리를 군중 속에 깊이 박고 전통 문화예술의 전승과 발전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올해 겨울 방학이 되면 또 양성반을 꾸린다고 합니다.

남춘화, 이상화를 비롯한 예술관의 전체 관계자에게 뜨거운 경의를 드립니다.

2021년 21월 19일

장춘애정애독자클럽 제일자동차그룹 분회 김수금 올림

네, 김수금 청취자와 함께 풍부하고 다채로운 문화 내용에 공감을 합니다. 그리고 민족문화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장춘시 조선족군중예술관 관계자에게 감사합니다.

[간 주]

2. 중국 대륙의 조선인 옛 마을

이 시간에는 ‘대륙의 옛 마을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귀신고개 실종된 옛날의 추억 말씀드리겠습니다.

귀신고개 실종된 옛날의 추억

아직 인적이 드물던 그때 그곳에는 귀신이 출몰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늘을 가린 원시림이 그곳을 둘러싸고 있었다. 수렵이나 채집을 위해 원시림에 들어간 사람들은 다시 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적었다.

귀신이 나와서 늘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하며 그래서 ‘귀신고개(鬼嶺)’라고 한단다.

흑룡강성(黑龍江省) 오지의 목릉(穆稜)에 널리 전하고 있는 옛 이야기이다. 이 귀신의 고개에는 청(淸)나라 대신 오대징(吳大徵, 1835~1902)이 개발한 후 동서남북이 통하는 사통발달의 곳으로 되었다. 나중에 오대징은 저도 몰래 무릎을 탁 쳤다고 한다. “이곳이야말로 팔면통(八面通)이구나.” 목릉의 팔면통은 그렇게 청나라 대신의 입에서 작명되었다.

그러든 말든 팔면통이 조태삼(1928년 출생)에게 처음 심은 건 지지리도 싫은 옛 추억뿐이었다. 그땐 이불도 없어서 반도에서 여기로 포대기 하나만 달랑 들고 왔다고 한다. 나무장사를 해서 입에 겨우 풀질을 했다고 한다.

1936년경, 조태삼이 8살 나던 그 무렵이었다. 그때 그 시절,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임당동에서 살던 조태삼의 가족 4명은 제1진 개척단(開拓團)에 합류하여 팔면통의 신흥툰으로 건너왔다.

중국에서 전선의 확장과 더불어 일본은 반도에서 대량의 조선인들을 집단적으로 만주와 몽골 지역에 강제 이주시켰다. 집단부락의 설치는 교통이 발달한 지역을 우선으로 진행되었다. 1938년 1년 동안 조선인은 목릉현 한곳에만 해도 266가구의 1,249명이 정착했다.

팔면통 지역에 이주한 농부들은 주로 경상북도 출신이었다. 조태삼의 아내 홍길영(1936년 출생)도 고향이 경상북도라고 한다. 홍길영은 네 살 때 가족을 따라 이주, 처음에는 팔면통 북쪽의 조양촌(朝陽村)에 살다가 서쪽의 광의툰(光義屯)에 이주했다.

그즈음 스물여섯 살의 서재봉(1914~2005)도 개척민으로 광의툰에 들어섰다. 그는 조부모와 부모, 남동생 셋, 큰형의 아들 등 아홉 식솔의 가장이었다. 아직 철부지였던 조태삼이나 홍길영과 달리 이주 과정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경상북도의 영천 역에서 열차에 오른 후 환승 한번 하지 않고 줄곧 팔면통까지 달려왔다. 그들 개척민의 열차는 일본 군수열차의 시간표 틈새에 끼여 장장 1주일의 시간을 소요했다고 한다.

서재봉은 나중에 8남매 자식의 기억에 고향의 이름을 뿌리처럼 심고 있었다. 그들이 본래 살았던 그곳은 경상북도 영천군 북안면 임포동이라고 한다

실제로 꿈을 안고 달려왔던 만주는 너무나 아픈 이야기를 서재봉 옹의 가슴에 묻고 있었다. 광복(8.15)에 즈음하여 광의툰에는 갑자기 이상한 전염병이 돌았다고 한다. 일본의 육군 세균전 연구개발 기구가 하얼빈(哈爾賓)에 주둔시켰던 731부대가 패망에 앞서 일부러 퍼뜨린 병균 때문이라고 풍설에 전하고 있었다. 이때 서재봉의 조부모는 서로 뒤쫓기라도 하듯 사흘 만에 둘 다 사망했다. 그날따라 비가 하염없이 출출 내렸다고 서재봉은 훗날 자식들에게 추억을 더듬었다. 그때 마을은 흡사 무덤처럼 괴괴했다고 한다. 장례를 연속 치르게 된 서재봉의 가족만 남았던 것. 사람들은 전염병을 피해 모두 산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나중에 서재봉이 가족을 이끌고 팔면통 시내에 내려온 것은 전염병보다 더 무서운 토비 우환 때문이었다.

1930년대 팔면통에는 아직도 조선인 마을이 추형을 이루지 못한 것 같다. 1945년 8.15 광복 후 서재봉의 가족이 이사할 때도 팔면통에는 평안도 장씨네 가족 등 조선인이 10여 가구 살고 있을 뿐이었다. 이 ‘조선마을’은 홍길영이 팔면통에 오던 1954년에 즈음하여 100여 가구의 큰 동네로 늘어나고 있었다.

그 무렵 조태삼은 ‘조선마을’의 호조조(互助組, 상호 지원조직) 조장으로 있었다. 호조조는 초급사(初級社), 고급사(高級社)와 더불어 중국에서 사회주의경제제도의 구축 과정에서 1951년부터 1958년까지 농민들이 거쳤던 3개 역사 단계의 하나이다. 최신버전의 사전에는 고급사 등 일부 어휘를 더는 찾아 볼 수 없으며 실종된 역사의 기억으로 되고 있다.

한 인간의 경력은 더구나 역사의 실종된 기억으로 될지 모른다. 조태삼은 옛날의 경력이 승인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못내 서운하다고 말한다. 아직까지 옛날의 경력 때문에 별다른 혜택을 받은 적 없다는 것이다.

예전에 화평촌 제2소조는 조태삼에게 대장 직무를 일임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일은 하지 않아도 되니, 대장으로만 계속 있어달라는 사원(社員)들의 특별주문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때 이 동네는 벼농사를 하도 잘해서 팔면통의 볍씨는 그들이 전문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 즈음 흑룡강성 560만무의 논에서 조선족 마을의 논은 160만무, 전부의 499개 조선족 마을은 이처럼 모두 ‘벼의 고향’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1982년부터 중국에서는 일명 ‘도거리’라고 하는 가정연대책임제(家庭聯産承包制)가 실시되었다. 이 제도는 농촌에서 70%의 인력을 해방하였으며 농민의 생산 적극성을 동원했다. 사람마다 배가 불렀고 옷이 따뜻해졌으며 마을에 벽돌집이 나타났다. 이에 따라 현성인 팔면통도 급성장하고 있었다. 시내에서 큰 건물이라고 하면 영화극장과 백화청사밖에 없었지만 급기야 빌딩과 아파트가 수풀처럼 일떠섰다.

아이러니하게도 화평촌에 인적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촌장 황정태 씨는 촌에서 조직한 운동회는 1987년 그해가 마지막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거의 1년에 한 번씩 운동회를 열었는데요, 운동장 주위에는 사람들로 바자를 쳤습니다.”

팔면통에서 운동회를 조직할 때면 운동장 부근에는 더구나 인파가 북적이었다. 축구경기는 언제나 운동회의 인기 종목으로 부상했다. 현성의 마을인 화평촌과 부근의 큰 조선족 마을인 보흥촌(普興村)은 늘 결승전의 두 주인공으로 출마했다고 한다.

뒤미처 조선족 마을에는 도시 진출이 시작되었고 외국 진출이 일어났다. 마을에서 한둘씩 사람들이 도시로 외국으로 떠나갔다.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현재 마을을 떠난 젊은이들은 거의 다 귀향의 가능성이 없다고 황정태가 거듭 말하고 있었다. 마을에는 조태삼이나 홍길영 노인처럼 나이가 많은 기성세대만 남아있다는 것.

그들마저 말이 농부이지 다들 땅을 떠난 지 오랬다. 일명 ‘땅집’이라고 하는 단층집 생활도 끝나게 되어 촌민들은 전부 아파트에 입주하게 되었다.

별다른 대책을 강구하지 않는다면 마을이 장차 없어질 것 같다고 하면서 황정태 씨는 마을의 성공모델을 찾으려고 민속마을 등 여러 마을을 다녔다고 말다. 아름다운 풍경의 멋진 집을 만나고 동네방네 소문난 마을의 축제를 구경할 수 있었지만 그 마을에 돌아오는 젊은이는 여전히 찾아보기 힘들었다.

기실 팔면통 현성에서 화평촌의 옛 모습도 더는 읽기 어려운 그림이다. 시가지에 나타나는 것은 화려한 시멘트의 수림과 귀를 찢는 차의 소음뿐이었다. 초가의 굴뚝과 어린애가 뛰놀던 마당, 개구리가 울던 논은 더는 없었다. 팔면통의 옛날의 그 옛 마을은 인젠 옛날의 추억에만 살고 있는 듯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성씨와 관련한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반도의 고유한 성씨라고 하는 박씨는 중국에도 있으며 또 여러 족명 즉 여러 민족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데요, 그러면 박씨는 중국에서 어떤 족명으로 되어 있겠습니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반도의 고유한 성씨라고 하는 박씨는 중국에서 어떤 족명 즉 어떤 민족의 이름으로 되어 있겠습니까.

네,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박은옥(MC),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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