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짓기 그리고 집 짓기
최순희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친것이 1988년이고 박사학위공부를 위해 한국행을 강행한것이 1997년이였으니까 언어학공부를 다시 시작한것은 옹근 9년만의 일이였다. 청춘과 랑만을 서적에 고스란히 다 바친것도 억울한데 이제 두번째 청춘까지 다시 학위공부에 이바지해야 했다. 이 세상에 재미있는 학문이 어디 있으랴만 밤낮 언어학 책을 뒤적이는 일이란 결코 코노래하고 휘파람 불 일이 아니였다. 아예 전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날이 많아졌고 또 어떤 날은 내친김에 모든것을 포기하고 글을 쓰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시작한것이 수필이였으니 나에게 있어서 수필은 정말 붓 가는대로 쓴 글이 되고말았다. 어느덧 써놓은 글이 열편을 넘었다. 옷은 만들었으면 입고싶고 글은 썼으면 보이고 인정받고 싶은게 인지상정이 아닌가. 그때 벌써 한국의 수필계에서 일가를 이루고있는(?) 남편에게 하나 둘 선을 보였다. 혹평을 감당할 마음의 준비가 아직 덜 됐으니 우선은 충분히 긍정해주길 바란다고 희망사항까지 전제했다. 그런데 남편의 평가는 내 기대를 릉가했다. 아직 발표하기에 급급해하지 말라는것이였다. 그중에는 《남자가 수염이 나는 리유》, 《애연가 남편》, 《사랑의 유효기간은…》, 《피아노의 하얀 건반이 까만 건반을 만날 때》 등등 지금 봐도 쟁쟁한(?) 글들이 포함되였는데 말이다. 이만하면 발표하기에 충분하니까 한국의 수필지에 추천이라도 해줄가 하는 외교적인 발언을 해준다 하더라도 내쪽에서 숙고할 일인데, 이건 분명 치명타였다.
남편의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이 있어도 될가 말가 한 마당에 발표불허판결을 받았으니 수필학을 좋아하고 가까이 하기는 틀린 일이고 언어학을 사랑하는 길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되였다. 《외도》나 다름없는 나의 수필쓰기에 대해 남편이 미연에 방지한것은 잘한 일인지 모르나 외도란 원래 말릴수록 더 끌리는 생리를 가지고있는것이 아니던가.
여름방학이였다. 남편의 친구중에 꽤 유명한 소설가가 있었다. 어느날 그 소설가네 집에 초대되여가면서 나는 컴퓨터속에서 잠을 자는 수필들을 슬그머니 가방속에 넣고 갔다. 소설가는 역시 백락이였다. 단번에 이 천리마(?)를 알아주면서 발표하면 좋겠는데 왜 이렇게 잠자게 하고있는가 하는것이였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서 남편은 이런 수필들을 국내에서 발표하기에는 아직 이른것 같다고 충고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의 발표는 무난하다는 말인가? 나는 나름대로 해석하고싶었다.
개학이 되여 학교 일때문에 한국행을 미룬 남편을 두고 나는 홀로 서울의 전세집에 짐을 풀게 되였다. 그리고 어느날, 한국의 수필권위지인 에세이문학사를 찾아갔다. 그때 평생을 수필에 바치시고 한국수필문학의 발전과 진흥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기신 고 박연구선생님을 처음으로 뵙게 되였다. 남편이 박연구선생님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있어서 은근히 추천해주기를 바랐는데 도무지 허락할 눈치가 아니여서 독단을 내린것이다. 초면에 수필 지도를 받고싶다는 말씀을 드리고 가지고 간 수필 대여섯편을 드리고 나왔다. 박연구선생님은 책장에서 수필집들을 뽑아 한상자나 선물로 주셨다.
그런데 이틀후, 박연구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등단작으로 추천하고싶다면서 내 의향을 물어오셨다. 의향이라니,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선생님께서는 이미 동성동명의 등단작가가 있으니 필명을 하나 생각해가지고 래일 에세이문학사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주셨다. 이렇게 1999년 에세이문학 가을호 초회추천작에 《남자가 수염이 나는 리유》, 이어서 겨울호에 완료추천작 《애연가 남편》으로 등단을 하게 되였다. 초회추천에서 추천완료까지 대체로 몇해가 걸린다는 한국 계간지에서 련속추천으로 등단한 작가는 많지 않은줄로 알고있다. 나는 등단과 함께 20세기와 작별하고 대망의 21세기에 들어섰다. 수필의 새내기에게 이는 과분한 행운이였다. 등단소감 《고백》에는 그때의 심경이 그대로 드러나있다.
1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