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금

봄철이면 시골에서는 울타리 밑을 빙 돌아가며 제철에 가까이서 따먹을 강낭콩을 많이 심는다. 우리 고장에서는 밥에 놓는 그 강낭콩을 열콩이라 부르는데 열콩중에 새알열콩은 껍질이 얇고 가루가 나 맛이 좋고 , 늦되는 철모르기 열콩은 풋것으로 오래 먹을수 있다. 나의 친정어머니는 풋것으로 오래 먹을수 있는 철모르기를 많이 심고는 했다.

내가 인생 륙십도 거의 졸업하는 이 나이에 새삼 철모르기 열콩을 떠올리는 까닭은 혹시 나에게 철모르기 콤플렉스가 있기 때문이 아닌지 모를 일이다.

열살에서 스무살로 올라가던 그 중간쯤 될 무렵이였을것 같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동생보다도 철이 들지 못했다고 서운해하신 일이 있었다. 무슨 일로 아버지를 그토록 실망시켰던지는 기억에 없지만 짚이는데는 있다.

친척이나 이웃 사이에 효자로 통했던 동생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들이 밖에 나가면서 시킨 일은 어김없이 꼭꼭 해냈다. 그런데 동생보다 다섯살이나 더 먹은 이 누나는 부모님들이 밭에 가면서 시킨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사고를 저지르기가 일쑤였다. 보던 책에 정신이 팔려 낮에 두번 떠주라고 시킨 돼지죽을 한번도 주지 않아 새끼 밴 굴암퇘지가 우리 밖으로 뛰쳐나오기도 하고, 비가 오면 걷어들이라고 이른 곡식을 그대로 내버려둬 비를 폴싹 맞히기도 하고... 뭐 그러루한 실책과 실수가 비일비재였으니 부모님이 어찌 실망하지 않을수 있었겠는가?

삼십대를 지나 사십, 오십대에 이르러서도 그 나이에 들어야 할 철이 채 들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륙십대에 들어서자 갑자기 철이 드는 기분이였다. 무슨 일을 좀 해볼가 하다가도 여직 못한 일을 이제 해낼수 있을가 싶어 주저하고 망설이고 포기하기를 거듭하는 자신을 발견한것이였다. 그만두자, 나도 이젠 안달을 그만 떨고 남들처럼 놀면서 편안히 살아봐야지.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나이에 걸맞는 철이 들기는 든것 같은데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는 알수 없었다. 자식들이라도 옆에 있으면 손녀 손자들하고 놀련만 품안에서 다 날아갔으니 안되는게고. 늙은 량주 매일 마주앉아 옛말을 하며 놀수도 없고, 화투나 카드놀이, 마작 같은건 일절 다 모르니 그런 놀이판에 끼여들수도 없고, 그래서 욕심낸 곳이 무도장이였다. 누구에게 오라가라 제약도 받지 않을게고, 음악을 감상하며 운동도 하고 여북 좋을가 싶었다. 학비를 내고 어렵사리 춤을 배워서 무도장에 입장은 했는데, 맙소사! 내가 놀기에는 그 곳도 맞지 않았다.

나이 륙십에 늦철이 들어 꼬박 6년을 방황하며 글 한자 아니 쓰고 이에 신물이 나도록 놀다가 할수 무가내로 되돌아오니 그 자리가 내 책방, 내 책상앞이였다. 결국 두해전인 예순 여섯이 되여서야 같잖은 글이나마 다시 쓰기 시작했는데 아, 이렇게 즐겁고 행복한것을!

이제 이 나이에 다시 글을 쓴다는것, 그것은 젊은 시절의 온갖 야망과 허영과 오만을 다 털어버리고 가슴 밑바닥에 고이 간직했던 사랑을 누군가와 다시 나누는것이고 위로이고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 겨울부터는 8년이나 망설이며 엄두를 못내던 컴퓨터도 사다 배우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다시 철이 없어지자 나이보다 젊어보인다고 한다.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것은 아니지만 리발관에 가면 젊어보이도록 머리를 볼록하게 자르라고 부탁하는 나, 통이 좁은 청바지에 티셔츠를 서슴지 않고, 철없이 빨간 구두에 빨간 스카프를 즐기는데다 여름이면 물에 적신 초모자를 푹 눌러 쓰고 자전거를 신나게 타는 나를 가히 몇살쯤 아래로 착각할수도 있겠구나싶어 혼자 키들키들 웃기도 한다.

아무러면 어떠랴. 내가 행복하면 그만이지 . 나이값을 하겠다고 점잖은척 내숭을 떨고싶지는 않다. 늦가을이 되는데도 덩굴이 싱싱한채 파란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드는 철모르기 열콩이 부럽다. 철이 지나도록 희망의 꽃을 피우며 이제 채 염글 앞날도 없는 말간 아기열콩을 자꾸 매다는 그 철모르기 같은 가을 인생을 살다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