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구이야기 오늘도 관중과 포숙아에 관한 성구의 유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관중과 포숙아는 춘추시대 초엽 제나라의 관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죽마고우로 둘도 없는 친구사이였습니다.
관중이 공자 규의 측근으로, 포숙아가 규의 이복동생인 소백의 측근으로 있을 때 공자의 아버지 양공이 사촌동생 공손무지에게 시해되자 관중과 포숙아는 각각 공자와 함께 이웃 나라인 로나라와 거나라로 망명했습니다.
이듬해 공손무지가 살해되자 두 공자는 군위를 다투어 귀국을 서둘렀고 관중과 포숙아는 본의 아니게 정적이 되었습니다.
관중은 한때 소백을 암살하려 했으나 그가 먼저 귀국하여 환공이라 일컫고 로나라에 공자 규의 처형과 아울러 관중의 압송을 요구했습니다. 제환공이 압송된 관중을 죽이려 하자 포숙아는 이렇게 진언했습니다.
'전하, 제 한나라만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신으로도 충분할 것이옵니다. 하오나 천하의 패자가 되시려면 관중을 기용하시오소서.'
도량이 넓고 식견이 높은 환공은 신뢰하는 포숙아의 진언을 받아들여 관중을 대부로 중용하고 정사를 맡겼습니다.
이윽고 재상이 된 관중은 과연 대정치가다운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창고가 가득차야 예절을 안다' '의식이 풍족해야 영욕을 안다'고 한 관중의 유명한 정치철학이 말해주듯이, 그는 국민경제의 안정에 입각한 덕본주의의 선정을 베풀어 마침내 환공으로 하여금 춘추시기 첫 패자로 군림케 했습니다.
이같은 정치적인 성공은 환공의 관용과 관중의 재능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이긴 하지만 그 출발점은 역시 관중에 대한 포숙아의 변함없는 우정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관중은 훗날 포숙아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젊어서 포숙아와 장사를 할 때 늘 이익금을 내가 더 많이 차지했었으나 그는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를 위해 한 사업이 실패하여 그를 궁지에 빠뜨린 일이 있었지만 나를 용렬하다가 여기지 않았다. 일에는 성패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벼슬길에 나갔다가는 물러나곤 했었지만 나를 무능하다가 말하지 않았다. 내게 운이 따르고 있지 않다는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나는 싸움터에서도 도망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나를 겁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노모가 계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를 낳아준 분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포숙아이다. '
성구 管鲍之交, 관포지교는 바로 관중과 포숙아 사이와 같은 사귐이라는 뜻으로 모든 것을 떠나 친구를 위하는 두터운 우정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성구는 管 대롱 관자, 鲍 절인 고기 포자, 之 갈 지자, 交 사귈 교자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성구와 비슷한 뜻을 가진 성구로는 금란지교란 성구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