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회] 신해혁명100주년: 광주-혁명의 근거지에서 개혁개방의 전연지대로
청취자 여러분, 올해는 중국의 신해혁명(辛亥革命) 발생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00년전 신해혁명의 총소리가 어두운 밤을 가르며 중국의 봉건군주제도를 뒤엎고 민주공화를 추구하는 서막을 열었는데 남방의 광주(廣州)는 이번 혁명의 발원지였습니다.
중국의 광주는 사계절 습하고 더운 도시입니다. 과거의 혁명근거지로부터 지금의 국제화 상업 대도시로 변모하면서 지난 100년간 언제나 "남보다 용감히 앞장에 서는" 전설의 이야기를 엮고 있습니다.
1911년, 역사에서 이름 높은 무창(武昌)봉기가 성공하기 이전에 광동(廣東)은 당시 혁명자와 봉건왕조가 싸우는 "주요전장"이 였습니다.
중국의 혁명 선구자 손중산(孫中山)은 광동을 주요 무대로 무장봉기를 여러차례 일의켰지만 번마다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후인들은, 손중산이 영도한 여러차례의 봉기들에서 혁명의 지사들이 앞사람이 쓰러지면 뒷사람이 이어나가는 혁명정신으로 자신의 생명과 선혈을 통해 무장으로 청(淸)왕조를 뒤엎는 국민혁명을 유발했다고 주장합니다.
광동성 황포(黃埔)군관학교 동학회 등신류(鄧新柳) 회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음향1
" 청왕조의 통치를 뒤엎기 위해 손중산 선생은 청나라 광서(光緖) 20년, 즉 1894년에 흥중회(興中會)를 창립해서부터 1911년 무창봉기 이전까지 여러차례의 무장봉기를 조직했습니다. 이중에 주요한 봉기가 10차례 있었는데 8차례는 우리 광동성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이 가운데서 영향력이 제일 크고 제일 비장했던 봉기는 바로 1911년 음력 3월 29일에 발생했던 광주봉기입니다. 이 봉기는 신해혁명의 첫 총성을 울렸으며 중국 신해혁명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
신해혁명이후 손중산 선생은 중국공산당과 소련의 도움밑에 광주 시구역에서 동남쪽으로 20여킬로미터 떨어진 황포 장주도(長洲島)에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했습니다.
황포군관학교의 창립과 함께 이 유명 군관학교의 교관들과 학생들은 자신들의 경력으로 중국의 근대역사를 썼습니다.
세계적으로 보아도 한 학교의 사생들이 한 국가와 민족의 운명에 대해 이처럼 심원한 영향을 미친 사례는 찾아볼수 없습니다.
"황포로 가자!" 라는 구호는 당시 뜻있는 청년들을 부르는 나팔소리로 되었습니다.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 부부장 우란전(尤蘭田) 여사는 황포정신을 높이 평가합니다. 음향2
"87년전에 손중산 선생이 친히 황포군관학교를 창건했습니다. 이는 그가 신해혁명 그리고 그 이후 혁명의 경험과 교훈을 총화한 산물입니다. 이 학교는 또한 국공(國共)합작의 중요한 성과이며 우리 나라에서 혁명군사정치인재를 양성하는 첫 학교였습니다. 황포의 수많은 장병들이 동정(東征)과 북벌(北伐), 항일전쟁에 참여해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이들은 중화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불후의 역사적 공훈을 세웠으며 선혈과 생명으로 애국, 혁명의 황포정신을 만들었습니다."
당시의 황포군관학교는 국공 양당 제1차 합작시기의 결정체로서 짙은 혁명의 열정으로 차넘쳤습니다. 그후 군관학교가 여러곳으로 위치를 옮겼지만 이런 열정과 시공간을 초월하는 열정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