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뉴욕 황포군관학교 동학회 진경국(陳慶國) 회장은 황포군관학교 제33기 학생입니다. 당년의 교가를 부르면서 그는 여전히 격동을 금치 못합니다. 음향3
"반항의 기세가 세차고 당기(黨旗)가 바람에 휘날리네. 여기는 혁명의 황포라네.주의는 반드시 실행에 옮겨야 하며 기율은 해이해서는 안되네. 분투의 선봉자로 나설 준비를 갖추네. 혈로를 뚫고 업악받은 민중을 이끌고 손에 손잡고 앞으로 전전하세. 승리할 날 멀지 않았으니 겁을 먹지 말고 성실하게 협력하면서 영원히 진리를 고수하네. 우리 학교 정신을 선양하세! "
세월이 덧없이 흐르고 흘러 어느덧 1979년이 되었습니다. 이해부터 중국은 개혁개방정책을 실행했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놀라우리만큼 비슷합니다. 이번에도 광동사람들이 맨 앞장에 섰습니다.
광주는 중국의 제1진 대외개방의 도시로 되어 경제발전과 인민생활수준이 대폭 제고되었습니다. 광주는 과거 혁명의 도시로부터 재빨리 금융의 도시로 탈바꿈했습니다.
광주의 관광가이드 심리리(沈莉莉) 씨는 개혁개방 초기 중국 내지의 첫 5성급호텔인 백천아(白天鵝)호텔이 광주에서 개업하던 성황을 이렇게 회억합니다. 음향4
" 호텔 개업 당시 호텔근처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 호텔의 종업원들은 위생청결을 하는 외에 또 홀에 분실된 관객들의 신을 주어 담아야 했습니다. 날마다 몇 광주리씩 신을 주어 담았습니다. 이런 인기는 석달간 지속되었습니다. "
당시 중국에서 "돈을 벌려면 광동으로 가라"는 말이 유행처럼 퍼졌습니다. 경제의 신속한 발전과 소득분배제도의 유연성, 정보의 편리화로 하여 광주는 날을 따라 강한 생활력을 보이며 전국각지에서 수많은 인재들을 영입했습니다.
광주의 한 호텔에서 일하고 있는 황(黃) 선생은 광주는 야경이 아주 아름답고 노임도 괜찮다며 이곳에서 미래에 대한 많은 구상을 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음향5
" 광주에 온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부지런히 일해서 돈을 모으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일하는 방법도 배우고 창업을 준비할것입니다. 앞으로 회사의 사장이 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