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왔어요]
남: 편지왔어요, 오늘은 연변의 이철수 청취자가 보내주신 사연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여: 이철수 청취자가 "작곡가 정율성 탄생 94주년을 기념하면서" 적어주신 편지입니다. 함께 만나보겠습니다.
8월 13일은 중화민족과 조선민족의 위대한 작곡가 정율성 탄생 94주년이 되는 날이며 올해는 또한 정율성 서거 36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저는 슬픔과 격동된 심정으로 이 위인을 추모하며 이 글을 씁니다.
정율성은 1918년 조선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애명은 부은입니다.
1933년 15살때 일제의 탄압밑에서 반일투쟁의 사상이 싹트면서 정율성은 형님과 함께 중국 남경을 찾아 조선혁명학교에서 공부하고 졸업한 후 혁명활동에 참가했습니다.
이 기간 정율성은 남경과 상해 등지에서 외국인으로부터 피아노와 성악을 배웠으며 1937년 8월 프랑스에서 작곡학습을 마치고 돌아온 선성해의 작곡"구국군가"를 불러 인기를 얻었으며 "5월의 노래", "싸우는 여성의 노래", "유격전을 발동한다" 등 노래를 작곡했습니다. 1937년 10월 연안에 도착한 후 정율성은 섬북 공학과 노신예술학원 제1기 졸업생으로 노신예술학원에서 성악교원으로 있으면서 "연안송"을 작곡하고 1939년에는 연안항일군정대학 선전과에서 성악지도원으로 있으면서 팔로군 행진곡을 망라한 "팔로군대합창"을 창작했으며 1942년 5월에는 "연안문예좌담회"에 참가해 모주석의 연설을 직접 들었습니다.
1945부터 1950년 10월까지 조선에서 조선보안대문화부장으로 있는 기간 조선인민군 협조단을 창건했고 조선국립음악대학작곡학부 학부장을 맡으면서 "조선인민군 행진곡" 등 많은 가요를 창작했습니다.
1950년 중국에 다시 돌아와 중국국적을 올리고 세상뜨기 전까지 중앙악단 전문작곡을 책임지고 중앙문화부 당조직 서기 등 직무를 겸임하면서 각종 장르의 음악작품 360여부를 창작했습니다.
그중 "팔로군 대합창" 중의 "팔로군 행진곡"은 1988년 7월 중앙군사위원회의 결정에 의해 "중국인민해방군가"로 결정됐습니다.
정율성은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인민군대 행진곡을 창작한 위대한 대 작곡가로 손색이 없는 분입니다.
저는 저의 일생에서 영원히 잊혀 지지 않는 기쁨이라면 1962년 전국 노동모범인 최죽송 벼 풍작 경험을 총화하는 연구사업을 위해 연길신풍대대에 내려가 머물러 있을 때 정율성 선생을 만나본 일입니다.
당시 정율성은 중앙문화부 당조직 소기이며 중앙악단전문 작곡을 책임지고 백양 등 저명한 영화 배우들을 데리고 생활 체험으로 연길에 오셨는데 신풍대대 구락부에서 대대악대가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을 연주하는 장면을 보신 후 농촌 생산대구락부에서 악대까지 내아 자신의 창작곡을 연주한다니 정말 대단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저는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60주년 때 장엄한 수도 열병식에서 울려퍼진 "중국인민해방군가"가 우리민족의 대 작곡가인 정율성이 작품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저는 모름지기 정율성의 빛나는 업적이 저 위대한 인민해방군가와 함께 영원히 전진하며 빛날 것이라는 자호감을 느끼게 됐습니다.
자기 민족을 열애하는 아름다운 민족애는 모든 성과를 올리는 원동력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조국애와 민족애를 가진 정율성의 숭고한 혁명정신을 다시한번 따라 배워 우리 세대와 차세대들이 모든 사업에서 큰 성취를 거두기를 바랍니다.
2010.8월 2일
연변조선어방송애청자연희회 회원, 연길 단산노년대학 학생, 원 연변 농업과학원 부연구원 이철수 올림.
남: 이철수 청취자의 편지를 통해 정율성 작곡가의 삶에 대해 한층 더 깊이 알게 됐습니다. 편지 감사합니다.
여: 녜, 이처럼 누군가와의 인연을 인상깊게, 가슴 깊숙히 간직하고 있는 분들, 그 이야기를 보다 많은 분들과 공유하고 싶은 분들은 이철수 청취자처럼 사연을 적어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언제든지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