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正善
2018-10-26 17:20:24 출처:cri
편집:朱正善

장족(壯族)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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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족은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중 인구가 가장 많은 소수민족으로서  인구 총 수가 1500만명이 넘는다.

장족은 주로 중국 남방의 광서(廣西)장족자치구에 집중거주 하고 있다.

중국 남방의 토속민족인 장족은 그 역사가 유구한 바 수만 년 전부터 장족의 선민들이 중국 남방에서 생활해왔다.   선진(先秦) 진한(秦漢)시기 한족의 역사기재에 따르면 령남(嶺南)지역(지금의 광서, 광동)에 거주한 ‘서구(西甌)와 ‘낙월(駱越)’등 부족이 장족의 가장 직접적인 선민들이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秦始皇)이 6국을 통일한 뒤 50만 대군을 파견해 영남지역에 쳐들어갔지만 서구인들의 강한 저항을 받았다. 그 후 기원전 214년 진시황은 재 파병해 마침내 서구인들을 전승하고 영남지역을 통일했으며 이 지역을 정식으로 중앙왕조의 통치에 편입시켰다.  

고고학자료와 사서의 기재에 따르면 이 시기의 서구, 낙월인들은 이미 동기와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문명시대에 발을 들여놓았다. 특히 서구인들은 부족 수령의 영도 하에 수림과 산지를 이용해 작전을 펼치며 수십만 진나라 군대와 수년간 대결했는데 이는 당시 서구인들의 사회조직이 상당히 발전했고 이미 부락연맹과 추장시대에 들어섰음을 말해준다. 영남에 남침한 군사들에게 후근 보장을 제공하고 서구인들의 저항을 격패하기 위해 진시황은 광서 동북부에 ‘영거(靈蕖)를 수축해 상수(湘水)와 리수(漓水)를 연결함으로써 오령(五嶺) 남북의 교통왕래에 편리를 도모하고 영남지역의 경제문화발전을 크게 떠밀었다. 또한 진나라는 영남지역을 통일한 뒤 많은 한족인구를 영남지역에 이주시켜 월인(越人)과 함께 잡거하도록 했다. 그 때로부터 내지 각 민족들과 서구 및 낙월인들의 정치,경제, 문화연계가 더욱 긴밀해졌으며 이런 긴밀성이 영남 서부 월인들의 사회발전을 크게 추진했다.

그 뒤, 당오대(唐五代)시기 장족의 선민들은 ‘리(俚)’,’료(僚)’,’오무(烏武)’로 불렸으며 송나라 때에는 지역성을 띤 ‘당(撞)’, ‘포토(布土)’, ‘토인(土人)’으로 불렸고 명, 청시기에는 광서와 광동 서부에서 장(壯)족으로 널리 알려졌다.

장족은 또 동(僮)으로도 불렸는데 새 중국 창건 후 ‘동’족으로 통일했다가 1965년에 주은래 총리의 제의로 장족인민들의 동의를 거친 뒤 국무원의 공식승인을 받아 ‘장’으로 변경했다. 장족의 ‘장’은 건강하다는 의미도 있고 한자 ‘동’을 ‘장’으로 잘못 발음할 소지도 없다는게 그 주요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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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날 장족은 주로 동쪽의 광동(廣東)성 연산(連山) 장족 요족자치현으로부터 서쪽의 운남(雲南)성 문산(文山)장족묘족자치주, 북쪽의 귀주(貴州)성 동남부 묘족동족자치주 종강(縱江)현, 남쪽의 북부만에까지 널리 분포되어 있으며 한족, 요족, 묘족, 동족,무로족, 모남족, 수족 등 민족과 잡거하고 있다.

장족은 자체의 언어가 있다. 장족의 언어는 시노티베트어족 장-동어군, 장-타이어파에 속하며 남북 두가지 방언으로 나뉜다. 장족은 당송(唐宋)이래 한자를 토대로 ‘토속글자’가 만들어졌지만 사용범위가 넓지 않고 대부분 한자를 사용했다. 그러다 1955년 라틴자모를 토대로 장족문자가 만들어졌다.  1957년 11월 주은래(周恩來) 총리가 정무원 제 63차 전체회의를 소집해 ‘장문 방안’을 비준함으로써  장족은 자신의 합법적인 문자가 없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장족은 주로 벼와 옥수수 재배를 위주로 한 농경에 종사한다. 장족의 주요한 두 갈래인 낙월과 서구는 1천여년전 이미 인공적으로 벼를 재배해 세계에서 가장 먼저 논벼 인공 재배법을 발명함으로써 전 인류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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