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正善
2019-03-20 18:46:51 출처:cri
편집:朱正善

와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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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족(佤族)은 중국과 미얀마에서 살고 있는 소수민족의 하나이고 그 민족언어는 와족어로 남아시아어계에 속한다. 와족은 통용문자가 없으며 과거에는 실물과 목각으로 사건을 기록하고 수를 세었으며 정보를 전달하군 했다.

와족은 주로 중국 운남성(雲南省) 서남부의 창원(滄源), 서맹(西盟), 맹련(孟連), 경마(耿馬), 난창(澜沧), 쌍강(雙江), 진강(鎭康), 영덕(永德) 등 현과 미얀마의 일부 주들에 분포되어 있다. 중국 경내에서는 일부 와족인들이 운남성의 보산시(保山市), 시쐉반나(西雙版納) 따이족자치주, 곤명시(昆明市), 덕굉(德宏)따이족징퍼족 자치주  등 지에 산재해 살고 있기도 하다.

이들의 민족명칭을 보면 과거에는 그 거주지역에 따라 달랐다. 진강, 영덕 일대의 와족인들은 “와(佤)”로 자칭했고 경마, 쌍강, 창원, 난창 일대의 와족인들은 “바요(巴饒)”, “부요(布饒)” 등으로, 서맹, 맹련 일대에서는 “아와(阿佤)”, “아와라이(阿萊)”, “러와(勒佤)” 등으로 자칭했다.

과거에는 한족이나 따이족, 라후족 등이 와족인들을 부르는 호칭 역시 서로 달랐다. 따이족들은 진강, 영덕 일대의 와족을 “라(拉)”라 불렀고 한족들은 이들을 “본인(本人)”이라 호칭했다. 한족과 따이족, 라후족은 기타 지역에 살고 있는 와족들을 “아와” 혹은 “카와(佧佤)”로 통칭했다. 여기서 “카”는 따이어로 노예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와족에 대한 멸시와 모욕적인 호칭이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대다수 와족인들의 뜻에 따라 민족명칭을 와족으로 확정했다.

와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사강리(司崗里)”라는 신화전설을 참고로 할수 있다. 창원지역 와족들의 해석에 따르면 여기서 “사강”은 “조롱박”이고 “리”는 나오다는 뜻인데 결국 조롱박에서 나온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서맹에 살고 있는 와족들의 해석은 좀 다르다. 이들은 “사강”을 “바위동굴”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는 “동굴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물론 이들의 해석이 좀씩 다르기는 하지만 아와산을 와족의 발상지로 삼는 점은 동일하다.

진나라 이전 시대의 《산해경(山海經)》이나 《죽서기년(竹書紀年)》, 《국어(國語)》 등 저서에는 모두 “쵸우요우(僬侥)”라는 민족을 기재한 내용이 있으며 《후한서(後漢書)》에도 이 단어를 사용한 내용이 있다. 여기서 “쵸우요우”는 와족의 자칭인 “파요우”와 비슷하다. 이로부터 유추해볼 때 쵸우요우는 이 어계 언어를 사용하는 여러 민족 선민들의 통칭이라는 전문가들의 견해도 있다.

기원전 109년에 한무제(漢武帝)가 익주군(益州郡)을 설치하고 그 관할지역이 지금의 보산시 주변을 포함했다. 이때부터 와족거주지역은 서한(西漢)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기원 69년 동한(東漢)이 영창군(永昌郡)을 세우면서 그 관할범위는 지금의 임창시(臨滄市), 보이시(普洱市), 시쐉반나, 덕굉(德宏) 등 와족의 분포지역을 포함했다.

당나라 때에 와서 운남의 난창강과 누강유역은 여러 민족이 혼거하여 살았고 그 민족들의 호칭도 많았다. 그중에서 “왕”, “왕쥐자”, “왕와유” 이런 명칭들은 현재 와족의 자칭인 “와”와 비슷하다고 볼수 있다.

원나라 때의 “생포(生蒲)”라는 민족명칭 기록이 있는데 이는 주로 “와족”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연구결과도 있다.

명나라 때에는 이곳에 주와 부를 내왔고 이어 경마선무사를 따로 세우기도 있다. 청나라는 명나라 때의 제도를 답습하여 큰 변화가 없었다.

영국은 1885년에 미얀마를 병탄한후 운남에 그 침략의 화살을 돌렸다. 이들은 무장한 군사들과 선교사들을 아와산구에 파견해 지형을 관찰하고 지도를 그렸으며 와족인들에게 정부와의 분열을 사주했다.

아와산구는 자원이 매우 풍부한 지역이어서 영국은 오래전부터 반훙(班洪), 반로(班老) 일대의 은과 알루미늄 광산에 눈독을 들여왔다. 1934년 1월 영국은 공공연히 광산구역을 침략하여 “반훙사건”을 일으켰다. 이 지역의 여러 소수민족들은 침략자들에 맞서 싸웠고 주변의 여러 소수민족들은 1400여명에 달하는 “서남변방민중의용군”을 결성해 침략자들과 싸웠다. 1936년 반훙지역을 중심으로 와족의 17개 부락이 “조국동포들에게 고하는 글”을 발표해 침략자들의 만행과 결코 침략자들에게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이는 국내 여론의 지지를 받았고 영국의 강도행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항일전쟁 때 와족과 여러 민족은 일본의 침략에 항거해 싸웠으며 인력과 재력, 물력을 모아 운남 서남지역의 항일부대들을 지원했고 “경마창원지대”, “아와산구 유격지대”, “아와산특구자위지대” 등 무장력을 형성해 침략자들과 목숨을 건 싸움을 진행했다. 이들은 또 1944년 항일부대와 함께 반훙, 반로 등 지역에서 일본침략자들을 물리치고 잃었던 땅을 수복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전 와족의 거주지역은 경제발전의 불균형으로 사회조직에도 구별이 있었다. 아와산 중신지역의 와족은 그때 까지도 마을을 단위로 하는 분산상태였다. 마을은 지역, 경제, 정치 및 군사단위였으며 부계씨족사회에서 발전한 원시농촌집합체의 성격과 조직형식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은 그 내부에 몇개의 작은 마을로 구성되었으며 여기에는 몇개 가족과 부동한 성씨를 가진 개별적인 가정이 포함되었다.

그외 영덕과 진강 등지의 와족인들은 명나라, 청나라 때부터 줄곧 따이족 토사의 통치를 받았으며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전에는 국민당정부의 보갑제도를 실행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1954년 6월에 이르러 맹련따이족라후족와족자치현을 설립했고 1955년 10월에는 경마따이족와족자치현을 세웠으며 1964년 2월에는 창원와족자치현을 설립, 1965년 3월에는 서맹와족자치현을, 1985년 12월에는 쌍강(雙江)  라후족와족부랑족따이족자치현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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