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正善
2019-03-20 14:59:01 출처:cri
편집:朱正善

리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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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족(黎族)은 중국 해남도의 최초의 정착 주민이다. 오늘 날 중국의 리족은 해남성의 릉수(陵水)와 보정(保亭), 삼아(三亞),낙동(樂 東), 동방(東方),창강(昌江), 백사(白沙), 경중(琼中), 오지산(五指山) 등 현과 시에 집중 거주하고 있으며 해남성 경내의 만녕(萬寧) , 경해(琼海) 지역과 귀주 등 성들에도 일부 산재해있다. 2010년 제6차 전국인구보편조사에 따르면 리족의 총 인구는 146만여명이다.

리족의 리(黎)는 ‘검을 여(黎)’로 리족에 대한 한족의 호칭이다. 사서에 따르면 서한 전에 ‘낙월’(駱越), 동한 때 마을‘리’(里), 오랑캐 만(蠻), 수나라와 당나라 때 속될 리(俚)로 불린 남방의 일부 소수민족 중에 해남도에 살고 있는 리족의 선조도 포함되었다.

‘리’가 오늘 날 ‘리족’의 족칭으로 기재된 최초의 사서는 당나라 후반 류순(刘恂)의 저서 <령표녹이>(岭表菉异)이다. 리족은 한족을 아름다울 ‘미(美)’로 호칭하는데 리족어에서 이는 객(客), 즉 손님이라는 뜻으로 그들이 자신을 토착민으로 자처하고 한족을 손님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리족은 내부적으로 방언과 세시풍속, 지역 분포의 차이에 따라 합(哈), 기(杞), 윤(润) ,새(賽)로 부르나 대외적으로는 보통 굿할 ‘새’(賽)로 자칭한다. ‘새’는 리족의 고유의 족칭이라고 할 수 있다.

고고학자료를 살펴보면 리족의 선민들은 3000년전의 은(殷)나라와 주(周) 나라 때부터 해남도에 정착해 원시적인 모계씨족공동체 생활을 해왔다. 당시 이들은 원시적인 호미 농사, 수렵, 어로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채집이 리족 선민들의 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그 뒤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 일부 한인들이 해남도 북부 연해지역에 가 상업과 농업, 어업에 종사하면서 리족 인들과 함께 이 섬을  가꾸었으며 한족과 리족 간의 경제문화교류를 발전시켰다. 기원 전 110년 한나라 개국년간 복파(伏波)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남월(南越)을 평정 한 뒤 한나라는 정식으로 해남도에 주애(珠崖)와 담이(儋耳) 양 군(郡)을 설치했다. 해남도에서의 한왕조의 군현제의 실시는 리족인민에 대한 한민의 통치를 강화하고 아울러 해남도와 대륙간의 관계를 보다 긴밀히 했다.

당나라 때 한왕조는 해남도에 경(琼), 애(崖), 만안(萬安), 담(儋), 진(振) 등 5개 주의 22개 현을 설치해 리족지역에 대한 통치를 한층 보강했다. 리족과 한족의 거주 구도도 ‘한족이 북쪽, 리족이 남쪽’에 거주하던데로부터 ‘한족이 외부, 리족이 내부’에 거주하는 구도로 바뀌였으며 이런 구도는 새 중국 창건 전까지 지속되었다. 당나라 때 해남도의 농업은 큰 발전을 가져와 열대 생물자원에 대한 개발과 이용이 대폭 늘었으며 중원지대와의 무역을 통해 부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리족의 선민들이 집거하고 있는 산간지역의 사회발전 속도는 아주 더디고 기존의 낙후한 상황과 사회경제구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원나라 때 조정은 리족 지역에 토관(土官)을 설치해 리족의 상층수령이 하층평민들을 다스리도록 했다. 이는 리족사회의 봉건화가 12세기에 새로운 발전을 가져왔음을 말해준다.

명나라와 청나라 때에는 리족 지역에서 봉건사회의 생산방식이 통치적 지위를 차지했다. 한족지역과 잇닿은 리족 지역의 농업발전수준과 농기구들도 한족과 다를바 없어 일년에 2모작을 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선진적인 관개방법도 사용했다.이외 정기적인 장마당무역도 다소 발전해 리족 지역의 종우나 빈랑, 야자가 대륙지역으로 많이 수송되었다.

봉건화 정도가 부단히 깊어지면서 리족 지역의 착취현상도 갈수록 심해져 리족 인민들의 강한 불만을 야기했으며 리족의 농민 기의가 잇달아 발발했다.

1840년 아편전쟁 후 서방의 열강들이 경주구(琼州口), 지금의 해구(海口)시를 ‘통상항’으로 개방하도록 청정부를 압박함으로써 대량의 아편과 면사,등유 등 서양의 물품이 해남도에 난무했고 서양상인들은 리족 지역의 종우, 빈랑 등 특산품을 약탈해갔다. 이는 해남도의 상업자본을 활성화해 과거 낙후하던 리족의 집거 지역에서도 장마당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리족 지역의 자연경제기반과 농민들의 가정수공업을 다소 파괴하기도 했다.

대혁명시기, 중국공산당은 해남도에서 혁명사업을 전개했으며 토지혁명시기에는 리족 지역에서 농촌 혁명근거지를 세우고 토지혁명을 성세호대히 진행했다. 또 항일전쟁시기에는 해남도에서 각 족 인민들로 구성된 항일유격대가 생기기도 했다. 이들은 한족과 어깨 겯고 외세를 몰아냈다.   

1948년 6월에 중국공산당은 백사, 보정,악동 등 3개 현,  9월에는 해남도의 70여개 도시와 광범한 농촌을 해방했으며 1950년 봄에는 해남도 전역을 철저히 해방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초기, 중국 당과 정부는 민족지역에서 민주개혁을 실시해 불합리한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빈곤한 농민들의 토지문제를 해결했으며 새 중국 창건 이후에는 일련의 수리 시설을 건설해 농업기반시설을 한층 보완했다. 20세기 50년대 철제 농기구의 사용에서 60~70년대 선진적인 농업생산기술의 부단한 보급,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이후의 농업과학보급망의 구축과 보완, 농촌과학기술인재의 양성, 현대농업 신기술 도입 등은 리족 지역 농업기술의 낙후한 국면을 개선했으며 농업생산의 비약적인 발전을 추진했다.

리족의 민족언어는 중국-티베트어족 뚱족 어족의 리족어 갈래에 속하며 어음, 어법, 어휘 등이 부이어,수이어와 비슷하다. 대다수 리족인들은 한어 구사가 가능하다.

리족은  본 민족의 문자가 없으며 한문을 통용한다. 하지만 1957년 당과 정부의 도움으로 라틴문자를 기반으로 한 리족문을 창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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