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凤海
2019-05-08 14:35:40 출처:cri
편집:林凤海

항일투사 강춘화씨와 그의 조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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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청현 왕청진 대천촌에 살고 있는 항일투사 강춘화씨의 조카(4남매)들은 해마다 청명과 추석이면 잊지 않고 큰어머니의 조각상을 찾아 북받치는 격정을 가까스로 눅잦히며 자신들의 감수를 토로하군 한다. 

그들은 차분한 마음으로 현실을 대하고 과거에 묻혀 살지 않는 명철한 노인으로 거듭나 여생의 매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하루라는 생각으로 품위와 존엄이 있으며 충실하고 완벽하게 보내려 노력하고 있다.    

1992년과 1994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뜨자 엄마, 아빠 노릇을 하고 있는 조카 서련숙씨와 서명산씨는 동생들을 잘 보살펴 주고 있다. 
 
 서련숙씨의 영감이 79세 되던 해에 한번은 심장병과 여러 노년병이 도져 매우 심각했다. 아들과 의사도 모두 이젠 치료 못한다면서 포기했는데 막내딸인 서련자씨는 절대 안 된다면서 억지로 병원에 모셔가 치료를 거쳐 현재 84세 노인 답지 않게 행복한 만년을 보내고 있다. 서련숙씨는 남편에 대한 정성이 자신도 막내 동생을 따라 가지 못한다면서 동생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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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항일투사의 조각상을 찾은 조카들)

1932년 10월, 80여명의 혁명가들이 일제의 토벌을 피해 삼도구 골짜기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강춘화씨는 두살 나는 딸애를 안고 그들 속에 함께 하고 있었는데 감기로 입구창이 생긴 딸애가 강울움을 터뜨리기 시작하였다. 열을 지은 놈들은 기세등등하여 점점 가까이 오고 아이는 아이대로 점점 기를 쓰고 울어댔다. 어머니는 다급히 아이에게 젖을 물렸으나 허사였다. 천천히 주위의 혁명가들을 둘러보던 어머니는 큰 마음 먹고 어린것의 목을 틀어 그대로 품에 꽉 그러안았다.
산천초목도 숨을 죽인 무서운 정적이 두시간 넘게 흐른 뒤 토벌대가 물러갔다는 정보가 전해져 왔다. 그제야 손을 풀어보니 어린 것은 얼굴색이 새까맣게 되였고 숨을 거둔지 오래 되였다. 어머니는 억장이 무너져 내렸지만 어린 것을 그대로 강물에 떠나 보내는 수 밖에 없었다.          
일제의 잔인한 만행에 가슴에서 복수의 불길이 타번져 오른 강춘화씨는 일제를 하루 빨리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자신의 한몸도 다 바쳐 싸우리라 이를 옥물었다. 그는 1934년 4월 당기 아래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밤도와 유격대에 물자를 날라가기 위해 강춘화씨는 또 셋째 딸을 한마을에 사는 친정집 올케한테 맡겼다. 일제 토벌대놈들이 또 마을로 들이닥치는 바람에 올케는 어린 조카를 안고 뒤 울안의 큰 지독을 들쓰고 몸을 숨겼다. 아이는 숨이 막혀 그만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놈들은 대바람에 총박죽으로 지독을 깨고 총창으로 올케며 아이를 모두 찔러 죽였다.
아이들을 하나 둘 다 잃은 강춘화씨는 눈물을 휘뿌리면서 유격대 근거지로 물자를 이어 날랐다. 거기에는 명사수로 일제놈들과 용맹하게 싸우고 있는 남편이 있었다. 남편과 잠깐 숲 속에서 만나고 난 뒤면 어김없이 아이가 생겼다. 넷째를 낳아 키우던 어느 깊은 밤,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거둔 소금 40근을 등에 지고 문을 나서던 강춘화씨는 할머니 품에 안겨 잠든 딸애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고서야 길을 떠났다. 마을을 벗어나 산발을 타고 고개를 넘어가는데 어느새 낌새를 챈 적들이 뒤쫓아오며 총격을 가했다. 총알이 빗발치듯 날아 왔지만 죽기내기로 앞만 바라보고 내처 뛰기만 하는데 순간 턱밑이 띠끔해났다.
여느 나무초리에 긁혔지만 만져볼 새도 없이 줄달음쳤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근거지어구에 들어서는데 마중 나온 유격대원들이 새된 소리를 질렀다. 《강춘화동무! 터 터 턱이 떨어졌어요!》 그제야 소금짐을 넘겨주고 아래턱을 만져보았다. 총알이 스쳐지나며 턱이 떨어져 내려 앉았고 온몸에 피가 낭자하였다. 유격대 병원에서 턱을 제자리에 붙여 놓고 70일 간 빨대로 죽물을 마시며 치료를 받고는 급급히 집으로 돌아 왔다. 죽었다던 며느리가 살아 돌아와 기쁘기 그지 없었지만 시어머니는 웬지 며느리를 마주보지도 못하고 옷고름으로 눈물만 찍으며 서 계셨다.  《어머님, 아이는요?》 《피난길에…》 시어머니는 끝내 오열을 터뜨리며 뒷말을 잇지 못했다.
70년대 초 촉수 낮은 전등불 밑에서 큰어머니는 조카들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군 하였다. 그맘 때 한창 사춘기에 접어들었던 막내딸 서금복씨는 어머니의 속사정을 헤아릴 수 없는지라 쩍하면 바투 들이대기 일쑤였다. 《엄마는 집에서 자기 자식이나 잘 돌볼 것이지 뭔 소용있다고 입당은 해가지고 그 고생을 찾아했어요? '가'자 뒤다리도 모르는 큰어머니가 어찌하여 그렇게 철저하게 혁명을 했는지 통 알수가 없단 말이예요.》
《큰어머니 세대는 나라마저 빼앗기고 노예로 살았지만 너희들 자식 세대는 노예로 살게 하고 싶지 않아서 혁명에 나섰단다. 자기 자식을 붙잡고 있는다고 살아남는 세월이 아니였단말이다. 일본놈들을 하루 빨리 이 땅에서 물리치고 마음껏 공부도 할 수 있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너도나도 목숨 바쳐 싸운 것이란다!》
하지만 큰어머니는 자신을 이해 못하는 어린 조카들을 한번도 못마땅하게 생각지도 않았고 사회에 대한 불만 한마디도 없었다. 오로지 살아 남은 자식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눈 앞의 생활난을 헤쳐나가기 위해 생산대 볏짚가리를 번져가며 낟알을 주었고 쓰레기통을 뒤지며 쓸만한 것들을 주어 냈으며 비료를 주어 생산대에 바치면서 여전히 사회에 손을 내밀지 않고 얼마만한 기여라도 하기에 애썼을 뿐이다.
그러다가도 큰어머니는 간혹 눈물을 훔칠 때가 있었다. 항일전장에서 함께 싸우던 희생된 전사들 이야기를 할 때면 큰어머니는 흐느껴 우셨고 또 울음 섞인 노래를 부르시군 하였다. 《여기는 내 고향 몇천리던가 고향을 떠난지 동북벌판에/ 황혼이 쌓여진 지든 저녁에 사랑하는 내 동지를 다시 그리네/ 적탄 앞에 쓰러진 동지 옆에서 이름을 부르며 끌어 안으니/ 이 몸은 염려 말고 나가 싸우오 마지막 이별은 슬플 뿐이요》
세월이 점점 좋아져 이토록 자유롭고 부유하고 행복한 세상을 맞이하고 보니 큰어머니가 왜 그토록 큰 희생을 치르며 혁명을 했는지 이해되었다는 조카들, 세월이 좋아질수록 큰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워났고 눈물겹도록 감사했으며 큰어머니의 조카인 것이 그토록 영광스러웠다고 감개에 젖어 토로한다.

김금순/이강춘(李康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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