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正善
2019-05-15 17:20:33 출처:cri
편집:朱正善

수이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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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상을 만들고 있는 수이족 여성)

수이족은 귀주성(貴州省)에 모여 살고 있으며 주로는 금동남(黔東南) 부이족묘족자치주의 삼도(三都)수이족자치현에 집중 거주하고 있다. 그외에도 삼도현과 이웃한 여파현(荔波縣), 독산현(獨山縣), 도균시(都均市)와 금동남의 용강(榕江), 단채(丹寨), 뇌산(雷山), 검하(劍河) 등 현에도 일부 살고 있다. 그외 소수가 복천(福泉), 평당(平塘), 여평(黎平) 등지에도 분포되어 있다. 수이족 집거지역에는 한족, 묘족, 부이족, 요족 등 민족들도 함께 살고 있다. 2010년 제6차 전국인구보편조사로 보면 수이족의 총 인구는 41만명이었다.

수(雖)라고 자칭하는 수이족의 비록 수(雖)를 중국인들은 물 수(水)자로 바꾸어 수이족(水族)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들의 자칭을 중국어 발음에 따라 음역한 것이다. 이런 호칭은 최초로 명(明)나라 왕수인(王守仁)이 편찬한 『월담사공관기(月潭寺公館記)』에 나타난다. 수(雖)라는 수이족 언어의 뜻을 새겨보면 참빗 혹은 “소통하고 정리하다”는 뜻을 가진다. 수이족의 고대문자를 다룬 『수서(水書)』는 “금목수화토” 오행중의 “수(水)”를 수이라고 읽었지만 그 뜻은 물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다. 중국역사상 수이족을 통칭하여 “백월(百越)”, “료(僚)”, “묘(苗)”, “만(蠻)” 등으로 불렀으며 청나라 중반이후부터 다른 민족과 구별해 “수가묘(水家苗)”, “수가(水家)” 등으로 불렀다. 그후 1956년부터 그 명칭을“수이족”이라 확정하였다.

수이족의 뿌리를 살펴보면 진나라 이전에 영남 일대에 많은 부락들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서와월(西瓯越)”, “남월(南越)”, “낙월(駱越)” 등이 있어 동남 연해의 기타 여러 월족과 통칭해 “백월(百越)”이라 했다. 역사발전의 일부 흔적과 언어 및 문화생활의 특징으로부터 볼 때 수이족은 “낙월”의 한갈래로 추정된다. 수이족 민간가요의 서술로 보면 그들의 조상은 원래 옹강(邕江)유역의 “파수산(岜雖山)”에서 살다가 후에 전쟁의 영향으로 현재의 하지(河池), 남단(南丹) 일대를 거쳐 용강(龍江)을 거슬러 올라가 현재의 사천(四川), 광서(廣西) 접경지대에로 이주했다. 이때부터 수이족 선민들은 낙월에서 분리되어 점차 단일민족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수이족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조상들이 두번에 걸쳐 대이동을 한 사실을 알수 있다. 상(商)나라가 멸망한 후 일부 사람들이 남쪽으로 이주해 백월종족에 융합되었으며 이는 수이족 선민들의 첫번째 대이동이라 할수 있다. 기원전 2세기 진(秦)나라가 중국을 통일한후 영남(嶺南)을 토벌했고 수이족 선민들은 또 다시 대이동을 시작하여 모체인 백월에서 분리되어 더 남쪽으로 갔다. 그후 수이족 선민들은 8,9백년에 달하는 비교적 안정한 발전을 거쳤으며 당나라 때에는 단일민족으로 되었다. 당나라 개원년간에 사천과 광서 접경의 환강(環江)일대에 수이족 선민들을 안무하기 위해 주(州)를 세웠다.

수나라, 당나라 시기 호남(湖南),사천, 광서 접경지대를 통칭하여 “계동(溪洞)”이라 불렀으며 이곳의 소수민족들은 부락, 부족단계에 있었고 일부는 원시적인 농업에 종사했다. 송(宋)나라 때에 와서는 수이족의 농업생산이 이미 일정한 수준에 이르렀고 이들은 벼를 심거나 고기를 잡았다.

원(元)나라 때에 이르러 조정은 서남 소수민족에 대해 유화책을 썼으며 로(路)와 총관부(總管府), 군민부(軍民府)에 이르는 통치기관을 설치했다. 1283년에 사천행정 참정이 무력으로 귀주 남부의 소수민족들을 탄압한 후 소수민족의 두령을 세습적인 관리로 임명하고 이들을 통해 소수민족을 통치하였다. 얼마후 부근의 소수민족 두령들도 원나라의 책봉을 받았다. 이들은 조정에 공납을 바쳤는데 그중에는 주사와 웅황, 말, 칼 등이 있었다.

명(明)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수이족지역의 사회와 경제가 큰 발전을 가져왔다. 농업에서는 생산도구의 개선으로 평탄한 지역에 많은 논을 개간했다. 관개기술 등의 발전으로 알곡생산도 늘었다. 생산력의 발전으로 더 많은 잉여생산물이 생겼으며 신흥 지주계급이 출현했고 이때부터 영주(領主)경제는 점차 지주경제로 바뀌지 시작했다. 특히는 농업에 기초한 가정수공업 발전이 빨랐으며 그 중에서 수공업 방직품은 자급하는 외에 일부는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장마당이 서고 역참이 많이 늘어나 상업이 발전하기 시작했고 외지경제와의 연관성도 점점 많아졌다. 강남 한족이민들이 대량으로 이주해 옴에 따라 이들은 선진적인 생산기술을 가져왔고 현지 수이족들은 한족과 친하게 지내면서 이런 지식과 기술들을 배움으로써 현지 경제문화발전을 크게 추동했다.

명나라 조정은 현지인들을 관리로 임명하던 원나라의 토관제도를 계속 실시하여 수이족지역에 토사(土司)를 설치했다. 수이족 백성들은 조정에 공납품을 바쳐야 했을 뿐만 아니라 현지의 토사 등 관리들을 위해 무상으로 노역과 여러가지 부역에 종사해야 했다. 토사는 관리,군대, 법정을 가지고 있었고 감옥도 설치하여 농민들의 생사여탈권을 장악하였다.그후 조정은 현지관리제도에서 점차 조정에서 직접 관리를 임명,파견하는 유관(流官)제도를 실시했다.

청나라 초반부터 아편전쟁까지의 2백여년간 수이족지역의 사회 및 경제가 한층 발전했다. 농업수준이 크게 높아져 평파지역의 벼는 무당 생산량이 150킬로그램 이상에 달했고 일부 사람들은 농업에서 탈리해 독립적인 수공업자로 되었으며 소규모의 생산장들이 나타났다. 특히 방직기술이 큰 발전을 보여 란토(爛土)지역에서 생산하는 천은 인근의 여러 현들에까지 판매될 정도였다. 지주경제도 한층 발전해 수이족 지역에는 천여무에 달하는 땅을 소유한 대지주가 나타났으며 이들은 소작료와 고리대를 통해 수많은 재부를 끌어 모았다.

19세기 80년대 이후 제국주의 세력이 수이족 지역에  침투했으며 농민들에게 대면적으로 아편을 심게 했고 이에 따라 농촌생산력이 크게 저하되었다. 전통적인 방직업도 서양의 천과 실이 들어옴에 따라 큰 타격을 받았고 전통방직업은 서양의 천과 실을 생산하는 가공업으로 전락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정부는 수이족 지역에서 민주개혁과 사회주의 개조를 실시했다. 1957년에는 삼도수이족자치현을 설립함으로써 수이족은 자신의 운명을 장악한 진정한 주인으로 되었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경작지 관개면적이 해마다 늘고 알곡생산량도 늘었으며 공업이 점차 발전해 석탄, 전력, 전자기기, 농부산물가공 등 현지자원을 이용한 산업이 나타났다.

문화와 교육,보건분야에서도 천지개벽의 변화를 가져왔다. 공화국 창건 전에 수이족 생활지역에는 학교가 몇 개 없었으나 현재는 초급, 중급, 고급 중학교들이 현, 구역마다 있다. 해방전 수이족지역의 말라리아 발병률이 총인구의 80% 이상에 달했으나 지금에 와서는 거의 통제되었다. 현재 수이족의 생활수준이 크게 향상되어 과거 낙후하던 상황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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