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凤海
2019-05-23 19:27:08 출처:cri
편집:林凤海

조선 여행기

송휘,이명란,한창송 선생님:그간 안녕들 하셨습니까? 

오늘은 5박 6일 조선 여행 소감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우리 애청자클럽 황정숙 상무부회장이 대학교 동창들을 모집하여 조선 여행을 간다는 소식을 접하고 저는 제가 1937년에 태어난 평안북도 신의주, 의주군 고향에 가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발벗고 따라 나섰습니다.
 
이번 우리 여행팀은 할아버지 9명,할머니8명, 모두 17명으로 구성됐는데 그 중 최고령자가 85세, 최저령이 75세였습니다. 비용은 일인당 3천 400원이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5월 8일 밤11시 장춘에서 침대기차로 이틀날 아침 8시에 단동에 도착하였습니다.
단동 출국 수속 현장에는 광주,심천 호남,산동 등 전국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로 인산 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소식에 따르면 조선정부는 각종 시설의 제한으로 매일 800명 밖에 접대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압록강을 건너 조선 신의주에서 기차에 올라 평양으로 떠났습니다. 신의주에서 평양까지 9시간 가면서 조선 농촌의 풍경을 자세히 구경할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집들은 모두 기와집이고 농민들은 한창 밭갈이 논 갈이에 바삐 보내는 모습이었습니다. 논갈이는 대부분 황소가 하고 뜨락도르는 보기 드믈었습니다. 산은 대부분 밭을 일구어 벌거숭이 산이 많았습니다. 주요 교통 도구는 자전거였습니다.
 
밤 10시에 평양에 도착하여 청년호텔에 입주하였습니다. 가이드에 소개에 의하면 조선은 특급호텔, 1급 호텔로 나누는데 우리가 입주한 청년 호텔은 1급 호텔로서 중국의 5성급 호텔에 맞먹습니다. 한방에 침대 두개이고 깨끗하고 각종 시설이 완비되어 일본에 갔을 때보다 방이 더 넓어서 환하고 시원했습니다.
 
5월 10일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평양시에서 김일성 광장,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들이 잠들어 있는 우의탑, 평양 대극장, 천리마 동상, 만수대 기념비 등 곳을 지나며 많은 사진을 남겼습니다.
 
평양시는 현대화 고층건물들이 높이 줄지어 있고 깨끗하고 아름다웠으며 시내는 유궤도전차, 무궤도전차, 버스, 지하철 등 교통이 아주 발달하였고 택시는 드문드문 보였으나 너무 비싸 타는 사람이 적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선은 자가용차가 없어서 길은 넓고 차는 적어 큰 길이 매우 훤했습니다. 특히나 예쁜 교통경찰 아가씨들이 독특한 풍경선을 이루었습니다. 평양시는 그야말로 손색없는 현대화 대도시입니다.

평양에서 6시간을 달려 조선에서 제일 큰 항구도시인 원산에 도착해 점심을 먹었습니다.
 
우리 버스에는 3명 가이드가 배동하였는데 1명은 중국에서부터 우리와 동행한 남성 가이드 혁영해, 다른 두 명은 조선의 가이드였습니다. 그 중 조선의 가이드 한명은 전주 김씨의 김정향씨로 김일성 종합대학 러시아어 학부 졸업생이고 다른 한명은 김해 김씨인 김숙영씨로 평양 외국어대학 러시아어 학부 졸업생이었습니다. 두분 모두 외모도 예쁘장했을 뿐만 아니라 은방울 같은 순 평안도 말씨를 사용해 평안북도 태생인 저의 귀에 정답게 안겨왔습니다. 그들은 조선어는 물론이고 중국어도 매우 잘했습니다.
 
이번 우리 여행팀에 합류한 길림대학 천정남 교수는 감개무량 하여 13년 전인 2006년에 처음 조선에 왔을 때는 심지어 기차에 유리도 없어 추워서 혼이 났고 평양 시내도 고층건물이 적었고 사진도 마음대로 찍을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진도 마음대로 찍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유롭게 속얘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두 가이드 처녀가 번갈아가면서 웃기는 말을 하면서 자신들이 먼저 깔깔대고 웃는 모습이 참으로 기특하고 귀여웠습니다.

그들은 쉴새없이 번갈아 가면서 노래도 부르고 조선의 형세도 소개하고 생활상,풍속 습관도 자세히 소개해 주었습니다.그들은 조선에 벌거숭이 산이 많은 원인은 1994년 7월 김일성 원수님이 돌아가신 후 3년은 가뭄이 들고 또 3년은 장마를 겪어 생활이 아주 곤난 한데다가 엎친데다 덥친 격으로 구 소련을 위수로 한 사회주의 국가가 해체되면서 물물교환으로부터 달러 교환으로 바뀌어 달러가 없는 조선이 더 가심한 곤경에 빠져 백성들이 나무 껍질을 먹으면서 조성된 것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들은 그 몇년 동안 굶어 죽은 사람, 얼어 죽은 사람이 아주 많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다 1998년 부터는 형세가 호전 되기 시작 하였고 특히 김정은 위원장 시대부터는 인민들의 생활을 관심하고 식수조림도 중시하여 지금은 많은 나무를 심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가이드에 따르면 조선은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유치원으로부터 대학교 졸업까지 모두 무료이고 병치료도 무상입니다. 그러나 생활 용품은 모두 량식표, 고기표, 천표를 씁니다.식량 배급은 공무원은 매일 700그람, 직업에 따라 800그람 900그람 공급하며 모자라면 자유시장에서 높은 가격으로 살 수 있습니다.
 
또  여성들은 출산 전에 3개월 출산 후에 5개월 휴가가 있습니다. 아이 7명 이상 낳으면 영웅 어머니 칭호를 수여합니다. 그리고 군 복무 기한은 여성은 3년, 남성은 5년입니다. 조선의 남녀 비례는 1:1.1 로 여성이 좀 더 많습니다.
 
조선에서는 또 결혼 할 때 남자는 집을 배분받고 여자측에서는 가구 등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여자 측 부담이 더 많다고 합니다. 가이드에 따르면 조선의 남성들은 1년에 세번 밖에 밥을 하지 않습니다. 즉 3.8 여성의 날, 어머니의 날, 부인의 생일 날에 세 번 밥을 짓습니다. 
가이드 두분은 아직 시집을 안 갔는데 신랑은 세가지 조건을 요구 한다고 소개했습니다. 첫째는 로동당원, 둘째 대학졸업생, 셋째 전역 군인 입니다. 전역 군인을 요구하는 주요 원인은 전역 군인들이 많은 고생을 겪었기 때문에 밥도 할줄 알고 아이도 볼 줄 알며 심지어 빨래까지도 할 줄 알아 앞으로 집안 일을 잘할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조선에서는 또 결혼할 때 국수를 먹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국수는 길고 질겨서 결혼 후 기나긴 세월을 검은 머리 백발이 되도록 오래오래 살아 간다는 의미에서 입니다. 가이드 두분은 자신들이 올해 안으로 꼭 국수를 먹어야 하겠는데 그렇게 마땅한 사람을 찾자니 쉽지 않다면서 우리 들이 국수 먹을 때 여러분을 청할테니 꼭 오시길 바란다고 농담을 했습니다.
 
이처럼 차 안에서는 웃음소리, 노래소리, 박수소리로 들끓었으며 열렬한 분위기 속에서 어느새 금강산에 도착하였습니다. 금강산 호텔도 1급호텔이어서 아주 훌륭했습니다.
 
우리는 이튿날 7시부터 등산을 시작하였습니다. 금강산 1만 2천봉 절승경계가 세계에서 유명한 유람지라는 것은 여러분도 다 잘 아시기 때문에 더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세시간을 올라 4킬로미터 높이의 구룡 폭포에 도착하였습니다. 우리 팀 17명 중 남성 5명, 여성 4명 모두 9명 밖에 정상까지 올라가지 못했는데 영광스럽게도 83세인 제가 제일 먼저 올라 갔습니다. 우리 9명은 너무도 기쁘고 감개 무량하여 두손을 높이 들고 목이 터지도록 만세를 외쳤습니다.
 
저녁에는 청년호텔에 되돌아와 소고기 불고기와 조선에서 제일 유명한 대동강 맥주를 마시면서 술잔을 높이 들고 건배하며 오늘의 승리를 축하하였습니다.
 
5월 12일에는 개성 판문점에 가서 '정전협정 조인장'을 구경하고 김정은 위원장과 문재인 대통령이 악수한 곳에서 기념사진을 남겼습니다. 오후에는 1912년 4월 15일 김일성 수령이 탄생한 만경대를 참관하였습니다.
 
저녁에는 세계에서 제일 깊은 지하철을 탔습니다. 평균 깊이 100미터, 제일 깊은 곳은 120미터였으며 총 길이는36킬로미터이고 17개 역으로 구성되었습니다.

5월 13일 아침 8시에 우리는 손녀, 외손녀와 같이 귀엽고 기특한 가이드들과 섭섭한 마음을 금하지 못하며 작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포옹하면서 "잘 가세요"."또 오세요","잘 있거라","다시 만나자"라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습니다. 비록 나흘 밖에 안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로 정이 들어 두 처녀는 눈물까지 흘렸고 우리 노인들도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평양에서 9시간을 달려 단동 국제여행사호텔에서 하루밤 묵고  5월 14일 8시에 고속열차로 3시간 달려 10시에 장춘역에 도착하면서 이번 조선여행은 원만히 마무리됐습니다.

이번 걸음은 나의 인생에 잊지 못할 가장 뜻깊은 길이었습니다.
        
꿈이 살아 숨쉴 때 가장 행복한 인생이 아닐까 싶습니다.
      
1937년 조선에서 태어나 82년 만에 오매에도 그리던 고향 땅을 찾아가 보았으니 이제 저는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장춘애청자애독자클럽         록원구분회      김석찬  올림      2019.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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