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正善
2019-06-27 17:07:06 출처:cri
편집:朱正善

부이족의 역사

중국의 부이족은 주로 귀주성(貴州省) 남부, 귀주성 서남부에 있는 금남, 금서남부 이족묘족자치주와 안순시(安順市), 귀양시(貴陽市)에 많이 살고 있으며 그 외에 귀주성 동남부, 준의시(遵義市) 등 지역과 운남(雲南)의 라평(羅平), 사천(四川)의 영남(寧南), 회리(會理) 등지에도 일부 분포되어 있다. 2000년 제5차 전국인구보편조사의 집계로 보면 그 인구가 297만명 정도이다.

부이족의 선민들은 “백월(百越)”의 한 갈래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이족은 “부이(布夷)”, “부야이(布雅伊)”, “부중(布仲)”, “부요(布饒)”, “부만(布蠻)” 등으로 자칭하는데 이는 고대의 료(僚), 만(蠻), 중가(仲家), 만료(蠻僚), 리료(俚僚), 이만(夷蠻) 등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부이족과 중국의 다른 한 소수민족인 장족(壯族)은 모두 “리료”, “만료” 혹은 “이료”로 불렀으며 5대(五代)이후에 와서 부이족은 “중가”로 불렀고 송나라(宋) 때 장족은 “동(僮)”이라 불렀다. 후에 장기적으로 갈라져 살면서 두 민족은 경제와 문화, 생활 및 풍속습관에서 차이가 생기고 부이족과 장족이라는 두 민족을 형성했다. 일부 학자들은 부이족은 “백복(百濮)”의 한갈래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일부 사람들은 전국후기에서 서한에 이르는 “야랑(夜郞)”국과 오늘의 부이족이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야랑국이 통치한 중심지역이 현재의 반강(盤江) 즉 고대의 돈수(豚水)유역이며 반강지역은 또 역대로 부이족의 집거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부이족은 벼농사역사가 긴 농업민족이다. 부이족지역에서 출토된 동한, 서한시기의 문물중에는 벼농사에 쓰이는 농기구와 벼밭모형이 있는데 이는 사마천의 “사기”에 있는 기록과 부합된다. 한나라는 야랑국에 봉건군현제도를 확립했으며 이는 위나라(魏), 진나라(晉), 남북조(南北朝)를 거치면서 계급분화가 심해지고 봉건영주경제가 점차 형성된다. 당나라(唐) 때 중원왕조는 부이족지역에 주(州)와 현(縣)을 세웠고 현지의 소수민족 두령들을 자사(刺史)로 두고 그 직위를 세습하도록 했다. 그러다가 5대 때에는 토사(土司)를 증설했으며 송나라 때에 와서는 현지 두령들에게 자사, 사계(司階), 사과(司戈), 장군(將軍) 등 직을 내려 사천로(四川路), 호남로(湖南路), 광남서로(廣南西路)를 관할하게 한다. 명나라와 청나라 초반 토사제도가 점점 고착되며 토사와 지방관리들이 영지내의 전부 전답을 점유했으며 거기에 예속된 백성들은 대대로 영지를 벗어날수 없었다. 명나라 조정은 부이족지역에서 “위소둔전제도(衛所屯田制度)”를 실행해 군대를 주둔하고 둔전을 했는데 둔전에는 군둔(軍屯)과 민둔(民屯) 두가지가 있었다. 후에 이런 지역들은 선후로 봉건지주경제로 변한다. 명나라 말부터 청나라 초반까지 부이족의 사회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토사경내의 부속민들도 점차 양극분화가 생기고 인구가 대량으로 늘어났으며 소작과 전답매매현상이 나타났다. 청나라 옹정년간에 취한 대규모의 토지정책은 부이족지역의 봉건지주경제를 확립, 발전시켰고 이는 영주경제의 붕괴를 초래했고 토사제도 역시 소멸되었다.

진나라, 한나라 때 부이족 지역의 사회생산력이 크게 발전하고 농업생산은 이미 상당한 발전을 가져왔으나 중원지역에 비해서는 그 수준이 낮았다. 진나라, 한나라의 봉건세력의 점차적인 침투는 부이족의 사회생산력의 발전을 추진하는 역할을 했는바 이는 또 봉건적인 생산관계를 점차 확립했다. 그 후의 조대를 거치면서 지주경제가 발전하게 되고 농민들에 대한 지주계층의 착취가 날로 가심해졌다.

1840년 아편전쟁후 제국주의 세력이 이들 거주지역에 침입하면서 부이족지역의 봉건자연경제가 점차 해체 일로를 걷다가 반식민지반봉건사회로 전락한다. 신해혁명시기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기 전까지 제국주의와 봉건주의, 관료자본주의 압박으로 부이족인민들은 더욱 비참한 처지에 놓였으며 정치적으로 그 지위가 전혀 없었고 경제와 문화도 장시기동안 정체되고 낙후한 상태에 있었다. 1944년에 일본 제국주의가 귀주 남부의 부이족지역을 침략하였고 이 지역 여러 민족 거주민들은 유린과 학살을 당했다. 1945년이후 국민당정부가 부이족 지역에서 보갑(保甲)제도를 실행하고 강제적인 민족동화정책을 시행하면서 부이족을 하나의 민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후 당과 정부는 이 지역 주민들과 함께 일련의 사회개혁을 단행하여 봉건토지소유제를 폐지하고 민족압박과 봉건착취를 유발하는 요인들을 제거하였다. 이어 상공업과 개인수공업의 사회주의 개조를 완성했고 당의 민족정책에 따라 민족지역자치를 실현하게 되며 1956년 8월에 금남(黔南)남부이족묘족자치주를, 1982년 5월 1일에는 금(黔西南)이족자치주를 설립한다. 자치현 설립을 보면1963년 9월에는 진녕(鎭寧)부이족묘족자치현을, 1966년 2월에는 자운(紫雲)묘족부이족자치현을, 1982년 2월에는 관령(關嶺)부이족묘족자치현을 세움으로써 소수민족이 주인이 된 권리를 충분히 구현했다.

현재 부이족지역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전에 부이족지역에는 공업기업이 거의 전무한 상태였지만 지금은 철강, 석탄, 전력, 방직, 양조, 식품가공, 담배, 제지 등 다양한 기업들이 있으며 공업총생산액도 상승일로를 걷고 있다. 소수민족 산업에 종사하는 인원도 수만명에 달한다. 그중에서 민족적인 특색이 강한 부이족 날염은 장족의 발전을 가져와 지금은 일본과 동남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지에까지 수출된다. 알곡생산을 포함해 농업과 임업, 목축업, 부업, 어업 등이 현재에는 큰 발전을 가져왔다. 현과 구, 향은 도로망이 발달하고 귀양시에는 사통발달한 항공노선을 갖춘 공항이 있어 교통이 폐쇄적이던 부이족지역의 면모를 일신했다. 또 문화와 교육, 보건위생 등에서도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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