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凤海
2019-08-08 15:09:22 출처:cri
편집:林凤海

엄마의 몸뻬

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임직원 선생님들과 아나운서 선생님들 안녕하십니까.
그리고 아나운서 송휘 선생님도 건강하시겠지요?

오라지 않으면 공화국 건국 70주년을 경축하는 큰 잔치가 있게 되는 때라 매우 바쁘시겠습니다. 더구나 금년 여름은 지독하게 더워 가만히 앉아있어도 잔등에서 물이 흐르는 것처럼 땀이 흐르는데 북경은 더욱 더웠겠지요. 우리 딸애도 아주 덥다고 투정을 부리더군요. 남은 복더위를 물리치고 여러분야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하여 공동으로 화이팅 합시다. 

오늘 날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저지만 옛날 헌옷을 입고 고생하시고 우리 애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애를 쓰시던 엄마가 잊혀지지 않아 항상 우리 엄마 몸뻬라는 글을 쓰려 마음 먹어왔습니다. 그러다 얼마전에 잡지인지 신문인지에서  몸뻬라는 글자를 보고 계발받고 필을 들게 됐습니다. 몸뻬는 허리에 고무줄을 넣고 발목에도 고무줄을 넣습니다.몸뻬는 평상복 바지보다 폭이 넓어서 가마목에 앉아 일을 보는 부녀들에게 딱 맞는 바지입니다. 

우리 엄마가 입던 몸뻬는 색깔이 원래 몸뻬와 맞지 않은 천으로 다닥다닥 기워서 본래 천이 무슨 색인지 분간하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저는 어릴때 우리 엄마는 왜 저런 바지를 입는가 하는 것도 생각못했습니다. 물론 몸뻬 하나 더 있지만 그것도 많이 기운것으로 잘 건사했다가 반드시 입어야 할 일에 입고 나갔습니다. 옷은 허름해도 우리 엄마보다 더운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몸뻬를 입고 주어온 구멍난 고무신도 헌천을 대고 기운 것인데 그것도 아까워 사람들이 볼때면 신고 사람들이 적거나 없는 곳에는 신을 벗어 보자기에 싸서 허리에 차고 돌밭을 걸어 발바닥이 갈라져 피가 흐른 흔적을 볼때면 저의 발바닥이 아파나면서 울고 싶었습니다. 빈손에 집집이 돌면서 먹을 것을 빌고 동분서주하다 마음씨 고운 집을 만나면 먹을 것을 좀 얻을수 있으나 그렇지 않고 욕사발을 퍼부면 눈물을 머금고 돌아서야 하지요. 마음이 서러워 눈물을 흘리다가 집에서 눈이 거멓게 기다리는 우리를 굶기지 않기 위해 용기를 북돋아 매 집을 돌다가 어느 집에 일이 있으면 일도 해주고 조금이라도 얻은 음식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한번은 몇푼 안되는 번돈으로 애들이 좋아하는 옥수수 튀운것에 엿을 무쳐 둥글고 납짝하게 만든 음식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갑자기 큰 바람이 불어 땅에 넘어져 뒹구는 바람에 손에 든 음식이 적지 않게 부서져 땅바닥에 앉아 통곡을 했답니다. 그 음식을 우리의 생명처럼 귀하게 생각하였으니 어찌 통곡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지금 생각해보아도 힘겨워 못살겠다, 죽었으면 좋겠다 혹은 막 욕이 나가겠지만 우리 엄마는 과분한 욕을 입에 달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희생하면서 푸대죽을 먹여서라도  우리 4남매를 보고 살면서 꼭 출세시키겠다는 하나의 목표로 살았습니다. 그 기운 몸뻬는 해방후 몇년 되도록 계속 입었습니다. 

해방초기에는 지금처럼 국가가 가난구제 사업으로 일일이 다 살필 조건이 안되었기때문에 우리 엄마는 자신에게 의거할 수 밖에 없엇습니다.  우리 집엔 아버지가 없어 엄마가 태산만큼 큰 산에 눌리워 사셨고 또 아버지가 할 일까지도 도맡아 하시며 다닥다닥 기운 몸뻬 하나 입고 애써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 엄마가 너무나 가엽습니다. 우리는 겨울에도 신이 없어 어머니가 쓰레기 더미에서 헌천 쪼각을 주어다 버선 모양으로 꼬매여 신겨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금년 겨울에 우리 막내딸의 발이 따뜻하겠구나라고 하셨습니다. 학교갔다 오면 발이 젖어 꽝꽝 얼었지만 "발이 따뜻하지?"라고 묻는 엄마의 말에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럴때마다 엄마의 마음은 메여지는듯 했을 것입니다. 후에 70년대부터 조카들도 성장해 할머니를 매우 아까워하면서 먹을 것이 있으면 가만히 할머니 손에 쥐여주고 또 다른 방으로 모셔다 잡숫군 했습니다. 

손녀들도 출가해 따로 살면서 고기를 사다 할머니 드실 부분을 칼로 베어놓고 갔습니다. 할머니께 새로 나온 좋은 천으로 새 몸뻬를 해드리고 마음에 드는 새 신을 사서 새 양말까지 받쳐드렸습니다. 할머니가 애들앞에서 멋있게 걸으면 애들도 손벽을 치며 웃곤 했습니다. 

엄마는 83세에 세상을 떴는데 젊어 고생해서인지 병도 없이 자기절로 입쌀밥을 해 잡수시고 공장에서 밤 근무 서는 손자를 억지로 불러와 자신이 손수 지은 밥을 먹이고 다 먹은 다음 쉬다가 그 이튿날 조용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생끝에 낙이 온다고 우리 엄마도 노년에는 낙을 보았습니다. 우리 엄마는 일자무식이지만 자기 체험으로 모주석을 존경하며 위인이라고 하시면서 그때 당시 우리를 해방시키지 않았다면 너희들이 다 굶어죽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공산당 덕분에 기와집 가족숙사에서 행복하게 살아왔다면서 매우 만족해하셨습니다.

순서없이 너무 많이 썼습니다. 내가 쓰려는 글을 쓰고 나니 마음이 후련합니다. 

끝으로 여러분들이 건강하시고 사업에서 큰 성취를 거두시길 기원하면서 다음 기회에 더 쓰겠습니다. 

안녕히
2019년 7월 29일
장춘시 남관구 노인협회
애청애독자 클럽 제5조 송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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