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正善
2019-09-20 18:58:53 출처:cri
편집:朱正善

보안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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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족의 민족명칭은 그들이 사는 곳인 청해성(靑海省) 동인현(同仁縣) 륭무하(隆務河)변의 보안성(保安城)에서 따온 것이다. 기재에 따르면 보안족은 대략 명나라 초기부터 보안성과 하장(下庄), 가싸르(尕撒尔) 즉 “보안 삼장(保安三庄)” 일대에 거주하면서 “보안인”이라 자처했다. 주변의 투족과 티베트족들은 이들을 “회회(回回)”라고 칭했다. 청나라 동치(同治) 원년에 보안인들은 감숙성(甘肅省)의 적석산(積石山)지역으로 이주했다.

과거의 통치자들은 보안족을 단일민족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보안회(保安回)”, “번회(番回)”등으로 불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후 보안인들의 념원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 정무원은 1952년 3월 25일에 “보안족”을 단일민족으로 정식 비준했다.

보안족의 민족내원과 형성과 관련해서는 역사자료의 부족으로 하여 아직까지 통일된 정설이 없고 몽골인위주설, 회족위주설, 색목인위주설 등 몇가지가 있다.

몽골인위주설:

보안족의 전설과 언어특징 그리고 몽골족과 비슷한 일부 생활풍속으로 볼 때 보안족은 원나라, 명나라 때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일부 몽골인들이 청해 동인 일대에 주둔하여 개간을 하면서 주위의 회족, 한족, 티베트족, 투족 등 민족들과 장기간 왕래하는 과정에 하나의 새로운 민족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회족위주설:

이 관점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보안족  및 회족과 관련한 전설에서 그 줄기를 되짚어 간 것이다. 그 한가지 관점은 보안족이 사천(四川) 보녕부(保寧府) 혹은 남경(南京) 등지에서 청해 동인 일대에로 이주한 “회민(回民)”인데 이들이 현지의 다른 민족들과 혼인을 하면서 점점 지금의 보안족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다른 한가지 관점은 섬서(陝西), 감숙 등지에서 보안지역으로 파견받아 변경을 지키고 개간을 하던 회족복과 한족 “영오인(營伍人)” 즉 변경부대가 장기간 이곳에서 살면서 보안족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임하(臨夏) 대하가(大河家)지역의 “회회”가 장기간 동인을 비롯한 지역에서 상업경영을 하면서 정착하고 후에 보안족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색목인위주설:

이 관점은 보안족이 원래 거주했던 청해 동인지역이 일찍 한나라, 당나라 때에 선후로 서강, 토욕혼, 토번의 통치지역이었다고 인정한다. 1032년에 이원호(李元昊)가 서하(西夏)정권을 세운 후 그 세력이 동인지역에까지 뻗었다. 요나라, 금나라 때에는 여진족이 황하유역의 넓은 지대를 통제하면서 그 영향력이 동인을 비롯한 맥석주 경내에까지 미쳤다. 13세기 초 징기스칸이 몽골족의 여러 부락을 통일한 후 대규모의 서부정벌을 단행했다. 그 과정에서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에서 포로로 잡힌 청장년들이 “탐마적군(探馬赤軍)”에 편입되어 몽골군을 도와 싸우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중에는 회회,하러루, 캉리 등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은 대부분 이슬람교를 신봉했으며 당시에 이들을 통칭하여 “색목인(色目人)”이라 했다. 1225년에 징키스탄이 군대를 이끌고 중아시아에서 몽골로 돌아올 때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이들 색목인들은 몽골군을 따라 중국 서북지역에 와서 주둔하면서 목축업에도 종사했다. 1227년에 몽골군이 서하를 멸망시키고 황하를 건너 적석주를 진공했으며 동인을 비롯한 하주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1247년에 티베트의 싸반이 몽골태자를 만났고 그후부터 몽골군과 티베트의 내왕이 빈번해졌고 이 때부터 동인 일대는 교통의 요지로,군사의 요충지로 변했으며 내지와 서역의 무역을 이어주는 거점으로 되었다. 지리적인 중요성으로 하여 이곳에는 중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을 포함한 몽골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1259년에 원세조(元世祖) 쿠빌라이가 전국을 통일한 후 전쟁이 줄어 들자 “탐마적군”을 현지에서 둔전을 하면서 살게 했고 이들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룰수 있도록 허용하면서 점차 민간인으로 변했다. 이들이 바로 보안족의 선조들이라는 것이다.

보안족의 발전:

명나라 조정은 변강방위를 위해 각지에 성곽을 쌓고 군대를 파견해 지키도록 했다. 홍무(洪武)연간에 지금의 청해 동인지역에 보안참(站)과 보안보(堡)를 설치했고 만력(萬曆)연간에는 이곳에 “보안영(保安營)”을 설치함과 동시에 보안성을 확건하여 하주위(河州衛)에 소속시키고 도지휘(都指揮)라는 관직을 두어 동인 12족(보안 12족이라고도 함)을 통치하도록 했다. 이때까지도 동인을 포함한 하주 일대에 정착해 살고 있던 몽골족, 색목인이 여전히 인구의 다수를 차지했다. 후에 명나라 정부가 여러 곳들에서 회족과 한족의 군사들을 대량으로 보내 이곳에서 둔전을 실시해 변강방위를 책임지게 했다. “보안영”이 확대발전하면서 보안지방의 민족구성에도 변화가 생겼다. 색목인후예를 기반으로 회족과 몽골족, 티베트족, 한족, 투족 등 민족들이 장기간 살아 오면서 공동언어를 형성했고 공동의 심리소질을 가지게 되었다. 대략 명나라 중엽이 되어서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융합되어 새로운 민족공동체인 보안족을 구성하게 되었다.

청나라 함풍(咸豊), 동치 연간에 라마교 융무사의 봉건농노주의 가혹한 통치를 견딜수 없게 된 보안족이 민족대이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순화(循化)에서 몇년간 거주하다가 감숙에 들어갔으며 맥석산 부근의 임하대하가, 유집(劉集) 일대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보안족은 여전히 동인지역에서 살 때의 습관에 따라 가싸르의 보안인들이 대돈촌(大墩村)에 거주하고 하장의 보안인들은 감하탄촌(甘河灘村)에, 보안성의 보안인들은 매파촌(梅坡村)에 각각 거주하면서 오늘의 “보안 삼장”을 형성했다. 청나라 말부터 민국시기까지 보안족 거주지역은 지방군벌들인 마안량(馬安良)과 마보방(馬步芳)의 통치하에 있었다. 1930년 국민당정부가 보갑(保甲)제도를 실시하면서 이 곳을 “량보(兩保)”지역으로 획정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보안족들은 부동한 방식으로 임하지역의 회족과 한족 등 여러 민족의 반봉건투쟁에 참가했다. 청나라 동치 초년에 보안족은 청해 동인에서 임하에로 이주하는 과정에 현지 회족들의 청나라 반대봉기에 참가했다. 1900년에 8국연합군이 베이징을 침략하던 때 도성을 지키던 “감군(甘軍)”중에는 보안족 병사 십여명이 외세의 침략에 맞서 용감히 싸운 기록이 있다. 국민당통치시기에도 보안족들은 봉건통치계급과 국민당정권에 맞서 목숨을 건 투쟁을 진행해왔다.

1980년 6월에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은 맥석산 보안족둥샹족쌀라족자치현을 세우도록 비준했고 다음해 9월 30일에 자치현이 정식 설립되었다. 민족자치지방의 설립과 함께 보안족 간부들이 크게 늘기 시작했다. 1981년 자치현이 설립될 때 전 현의 소수민족 간부는 434명, 그중 보안족이 70여명에 달해 16.2%를 차지했다. 2001년에 이르러 전현의 소수민족간부는 1631명에 달했고 그중에서 보안족이 311명을 차지, 자치현 설립때보다 4.4배 늘었고 19.1%를 차지하게 되었다. 현재 각급 인민대표대회중에는 보안족의 대표들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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