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凤海
2019-10-23 14:40:31 출처:cri
편집:林凤海

웅변 대회

송휘, 이명란 선생님:그간 안녕하십니까?

어느덧 한로도 지나가고  날씨가 매우 쌀쌀해지고 있습니다. 신체건강에 유의 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웅변대회 소식을 알려 드리려 합니다.
 
지난 10월6일, 장춘시 록원구조선족로인협회는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70주년을 맞이하여 "공산당을 노래하고 조국을 노래하자"란 웅변대회를 열었습니다.저는 우리소조를 대표하여 웅변대회에 참가하였는데 저의 웅변 제목은  "공산당과 모주석이 없으면 우리 영감 노친의 행복도 없다 " 입니다.지금으로부터 저의 웅변 내용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1.노친 정금자 편;
우리 노친 정금자는 1942년 화룡 복동 산골에서 태어났습니다.그는 3살때 어머니를 여의고 8살때 아버지도 병으로 세상떴습니다.그때 한마을에 사는 자식없는 노부부가 젊은 총각 한 사람을 대려다 키우던 중 정금자도 대려다 키우면서 앞으로 민며느리로 삼으려 하였습니다.
그 집에서 어린 나이에 고생하고 있는 소녀를 지켜보던 향정부의 한 간부 아주머니가 몰래 정금자를 데리고 큰 산 두개를 넘고 하루밤 자면서 그를 큰 아버지 집에 대려다 주었습니다.(정금자는 그때 나이가 어려서 그 여간부 아주머니의 이름도 물어보지 못하고 헤여져서 그 후에 다시 한번 찾아 감사의 인사말 한마디도 못한 일을 오늘까지도 내내 후회하며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못난 바보라고 자책하고 있습니다.)
정금자 오빠가 항미원조전쟁에서 희생되어 그는 열사유가족입니다. 향정부에서 그를 룡정고아학교에 보내주어 초중까지 졸업했으며 1956녀에 베쮼 의과대학 유치원에 배치받아 쭉 근무하다 교원 출신으로 정년 퇴직하였습니다.지금은 아들 딸이 다 잘살고 있고 매달 약 4000원의 퇴직금도 있으니 영감 노친 둘이서 행복한 만년을 보낼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생을 회억 할때마다 만약 당과 모주석이 깊은 수렁에 빠져 헤매고있는 자신을 제때에 구해주지 않았더라면,만약 또 고아학교에까지 보내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한평생 복동 산골에서 밎 며느리로 살아야 할 것이라며 그걸 생각 할때마다 항상 마음속으로 당과 모주서께 감사드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또 오늘날 까지도 천번 만번 엎드려 큰절을 올려도 당과 모주석의 은덕을 잊을수 없으며 그 은혜를 값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영감 김석찬편;
1937년 조선  평안북도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저는 일본제국주의의 압박과 착취를 피해 한살때 할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과 함께 만주땅에 왔습니다.     
저도 11살때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계모손에서 자랐습니다.  3형제 중 맏이인  저의 고생도 한 입으로 다 말할수 없습니다.
제가 12살 나던 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돼 국가의 주인이 되였으나 갓 창건된 중국은 아직도 여러 방면에서 낙후하여 생활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가 수십년간,수백년간 발전해온 성과를 중국은 70년 간,특히 개혁 개방40년 만에 이루어 세계 제2경제 대국으로 부상했습니다.
중국의 개혁개방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를 제가 친히 보고 느낀 경력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2000년 9월 대한민국 노년협회가 동북3성 노년협회 회장을 초청하였습니다.저는 장춘시를 대표하여 방문단 22명 단원 중의 일원으로 5일간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저에게 제일 깊은 인상을 남긴 두 가지 일은 지금까지도 잊을수 없습니다.
첫째, 핸드폰이였습니다.
저는 한국에 가 소학생들도 모두 핸드폰을 목에 걸고 다니는것을 보고 참으로 신기하고 부럽기 그지없었습니다.그때 저는 마음속으로 내 평생에 저런 핸드폰을 써볼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웃지 마세요! 기억나는지요? 19년전 중국에서 핸드폰을 쓰기는 커녕 구경도 못했습니다 .그때는 돈있는 부자들이나 개인기업가들이래야 겨우 무겁고도 우둔한 따거따(벽돌장)를 들고 다니면서 우쭐 할때였습니다.
그런데 원일이겠습니까?그후 몇년이 안 지나 중국의 핸드폰 생산량이 세계1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핸드폰을 사용하는 인구도 세계 제1위로 늘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지금 중국에서는 핸드폰만 가지고 나서면 물건을 사는것은 물론,기차도 타고 비행기도 타고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지금 세상 사람들은 모두 중국을 부러워합니다.
저도 벌써 오매에도 부러워 하던 핸드폰을 여러개 바꾸었으며 위챗 ,스마트폰도 잘 다를수 있어 이제는 한시라도 핸드폰을 떠날수 없게 됐습니다.
19년 전에 일을 생각하니 꿈만 같습니다.
 
둘째; 자가용차 입니다
제가 5  일 방문을 마치고 인천에 계시는 6촌 삼춘집에 놀러 갈때 큰 며느리가 자가용차로 모시러 왔습니다.집에 가보니 3형제가 모두 차 2대씩 있어 모두 차 6대가 있더군요, 그걸 보고 또 깜짝 놀랐습니다.저녁이면 골목마다 자가용차들이 집 문앞을 막을 지경이었습니다.
여러분 기억 나시는지요? 19년전 중국에는 아직도 자가용이 없었을 뿐만아니라 엄두도 내지 못할때 였으니 제가 어찌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제가 집에 돌아와 자가용 이야기를 하니 우리 아들은 제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낚시질 하고 돌아와서 침대에 기어 오르기도 힘들어하는 걸 아는지라  자신있게 머지 않아 자가용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낚시 하러 다니겠다고 했습니다.그때 저는 겉으로는 고맙다고 인사하면서도 속으로는 코웃음을 쳤습니다.제 나이가 60이 넘었는데 아들이 자가용차가 있을 때는 벌써 하늘 나라로 갔을 것이라 생각 하면서 자가용은 그림속의 떡일 뿐 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여러분 중국의 개혁개방 속도는 번개보다도 빠릅니다.지금은 중국도 집집마다 거의 자가용차 한 두대가 있습니다.우리 아들도 벌써 자가용차를 두번이나 바꾸었습니다.저는 이렇게 빨리 아들 자가용차에 않아 낚시를 다니면서  호강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못했습니다
19년전 일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참으로 빠르기도 합니다!

지금 전국인민은 초심을 잃지 않고 사명을 명기하여 습근평 새시대 중국특색사회주의건설과 중화민족의 부흥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분투하고 있습니다.일사천리로 번영,부강해 나가고 있는 중국에 살고 있는 우리 영감 노친은 너무나 행복합니다.  
19년 동안 마음속에 간직했던 얘기들을 하다보니  편지가 두서없이 길어졌습니다.죄송합니다.

장춘애청자애독자클럽          록원구분회        김석찬  올림       2019.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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