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凤海
2020-01-08 11:30:16 출처:cri
편집:林凤海

박길송과 부인의 초기 항일 활동

1934년, 일본군의 잔혹한 토벌은 갈수록 우심해졌다. 인피를 쓴 야수들은 매일과 같이 달려들어 근거지 인민들을 참살하고 가옥을 불사르고 곡식더미를 재무지로 만들었다. 전투가 끝나면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은 산에서 내려와 불탄 집터에 다시 집을 지었다. 태워버리면 또 지었다.

 
그때마다 옥순이와 금녀는 아동단원들과 함께 집 짓는 일을 도와나섰다. 저녁이면 20여명으로 구성된 아동유희대가 우등불가에서 공연을 시작하였다. 물찬 제비처럼 아름다운 옥순이의 춤과 금녀의 구성진 노래는 친인들의 침울한 얼굴에 생기가 돋게 하였다. 환호소리, 박수소리가 온 누리에 메아리쳤다.
 
어느 날 공연이 끝나자 한 노인이 사람들을 헤집고 나섰다.
 
“여러분, 저 아이들을 봐서라도 집을 짓고 새해 농사를 다그칩시다. 아무렴, 일본 강도놈들을 기어코 쫓아내야 하지유!”
 
“옳소, 옳소!”
 
근거지 인민들은 한결같이 호응해나섰다. 그들은 며칠내에 집을 세우고 농사일을 시작할 준비를 했다.
 
허나 적들의 집요한 대‘토벌’은 90여일간이나 지속되였다. 소청근거지의 1500여명 인민들 가운데서 400여명이 남았다. 그들은 눈물을 뿌리며 피로써 건설한 근거지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옥순, 금녀가 소속된 아동유희대는 유격대를 따라 행동하였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노래 부르고 춤추면서 유격대 아저씨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봄이 왔다. 아동유희대는 요영구항일근거지로 이동하였다. 이 유희대는 항일의 시련 속에서 동만특위 아동유희대로 발전하였다.
 
요영구근거지는 재빨리 연변 항일투쟁을 지도하는 중심지로 되었다. 중공동만특위와 왕청현위에서는 이 근거지에서 항일민족통일전선 사업을 강화할 데 관한 1933년 중공중앙 ‘1.26’지시 서한 정신을 받들고 한 패 또 한 패의 동지들을 구국군과 산림대 속에 들여보냈다.
 
1934년 여름, 특위 아동유희대는 북만 녕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수녕반일동만군 책임자 주보중의 초청을 받고 원정의 길에 올랐다.
 
북만으로 가자면 천고의 숲을 이룬 로야령을 넘어야 했다. 동만과 북만의 경계를 이루는 로야령은 가파롭고 깊은 골짜기가 가로놓여 있었는데 분비, 가분비, 봇나무 등이 꽉 들어 차 있었다. 그 속을 헤치고 나가기란 여간 쉽지 않았다. 허나 이제 겨우 11살밖에 안되는 금녀는 남에게 뒤질세라 타박타박 발을 옮겨놓았다. 금녀보다 조금 연상인 김옥순은 금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들은 끝내 수백리 산길을 벗어났다.
 
북만에 이른 김옥순, 김금녀 소속 아동유희대는 주보중의 의견에 따라 그해 봄에 수녕반일동맹군에 참가한 시세영 사령의 구국군을 먼저 찾았다. 아동유희대가 붉은기를 휘날리며 씩씩하게 부대 주둔지에 들어서자 시사령(전 항일구국군 제14여 여단장, 후에 동북항일련군 제5군의 군단장, 열사)이 친히 나와서 맞아들였다. 이날 밤 그들은 부대에 초불을 켜놓고 부대장교 100여명 앞에서 공연의 첫 막을 올리었다.
 
리경호씨와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 구내 중공동만특위소재지 안내비. 
 
공연은 합창 '반일전가'로부터 시작되었다. 

 
일제놈의 발굽소리 더욱 요란타
 
만주벌판 넓은 천지 횡행하면서
 
살인방화 강간약탈 학살을 일삼고 
 
수천만의 근로대중 유린했노라
 

 
나의 부모 너의 동생 그대의 처자
 
놈들의 총창 끝에 피흘리었다.
 
나의 집과 너의 집은 놈들의 손에
 
황무지와 재더미로 변하였다
 
…   …   …
 

 
일어나라 단결하라 근로대중아
 
굳은 결심 변치 말고 살길 찾으라
 
백색공포 뒤엎고 붉은기 아래
 
승리의 웃음소리 박수 쳐보자
 

 
동만특위 아동유희대 아동단원들이 부르는, 6절로 된 격앙된 노래소리는 전 구국군 장교들의 마음을 세차게 울리였다. 열광적인 박수소리가 끊임없이 터져올랐다. 합창이 끝나자 그들은 무대에 뛰여올라가 아동유희대원들을 얼싸안았다. 금녀는 친인들이 왜놈들에게 피살된 참상을 노래에 담아 춤추었다. 옥순이도 손 맞추어 춤추며 돌아갔다. 그들이 부른 노래와 춤이 어찌도 생동하고 비장했던지 온 회장이 흐느꼈다. 그 시기 주보중은 특히 금녀의 생동한 공연을 두고 이렇게 평가했다.
 
“그 애의 공연이 어찌도 격조 높이 사람들의 가슴을 치는지 관중들은 진심으로 감동되였으며 지어 눈물까지 흘렸다.”
 
김옥순, 김금녀 소속 동만특위 아동유희대의 공연은 이르는 곳마다 성황을 이루었다. 구국군과 산림대의 병사들은 과자 등을 안겨주며 그들을 환영하였다. 그네들이 받은 교양은 너무 커서 글로  표달하기 어렵다. 유희대는 공연기간을 20일로 정했으나 돌아설 수 없었다. 연변 쪽에서 사람을 띄워 인차 보내달라고 했더니 한주일만 더 기다려달라는 답변이 왔다. 그들은 한주일이 아닌 석주일이 지나서야 보내주었다. 동만특위 아동유희대가 귀로에 오를 때 그들은 권총 2자루에 보총 6자루, 옷, 밀가루, 돼지고기 등 많은 선물을 안겨주었다.
 
그번 북만 원정공연에 박길송이 동행하였는지를 기록한 사료는 없다. 박길송은 북만 원정공연의 대성공을 두고 기쁨을 금치 못하였다. 지난 2019년 1월 27일 훈춘에서 박길송 열사의 막내 녀동생 박순금 할머니를 취재할 때 할머니는 김옥순의 신상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들은 결혼까지 치른 정식 부부였다고 말하였다.
 
그럼 박길송과 김옥순이 언제 결혼하였을가, 이는  뒤부분에서 밝혀진다. 본문에서 특위 아동유희대의 활동을 자상히 소개하는 것은 특위 아동유희대 소속 김옥순이 처음에는 박길송의 미혼처요, 후에는 결혼한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1935년 가을, 라자구항일유격근거지에서 활동하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3연대(왕청현유격대를 기초로 개편됨)와 제4연대(훈춘현유격대를 기초로 개편됨) 주력부대는 북만으로 전이하게 되였다. 공산당과 공청단 조직과 혁명단체들도 여러 지방에로 헤쳐졌으며 라자구항일유격근거지는 크게 축소되었다. 그 시절 박길송이 왕청현 제4구 공청단구위원회 서기로 활동하였다는 자료가 있다. 항일의 후비대인 특위아동유희대는 해산하지 않고 소속 공산당과 공청단 조직의 지도하에 라자구 주변 산속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지속적인 산속생활에서 아동유희대 대원들이 지닌 식량이 동강났다. 산속 머루며 개암이며 닥치는 대로 거두어들이며 기아를 이겨나갔지만 장구지책은 아니었다. 다가오는 겨울을 나자면 수요되는 식량을 준비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이해 1935년 가을 왕청현 아동국장 리순희는 박길송, 김금녀 등 공청단원들과 아동유희대와 함께 식량준비에 나섰다가 라자구일대에서 불행히 일제 헌병대놈들에게 체포되었다. 박길송도 불행히 체포되고 김금녀도 체포되였다.
 
헌병대에 체포된 후 리순희와 김금녀는 적들과 불요불굴하게 싸우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치였다. 1935년 이해 리순희는 만 18살이고 김금녀 소녀는 겨우 12살이였다. 김금녀는 연길현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에서부터 왕청현 요영구, 소왕청, 라자구 항일유격근거지에 이르기까지 언니 김옥순과 동거동락하면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던 항일아동단원이었다.
 
김옥순은 그번에 식량구입에 나서지 않았고 체포되지도 않았다. 적들은 김옥순의 미혼부 박길송에게 혹형을 들이대다가도 감언리설로 얼리고 닥치고 하였으나 박길송은 죽을지언정 굴하지 않았고 자기의 신분을 폭로하지 않았다. 적들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3연대와 4연대로 개편된 왕청연대와 훈춘연대의 행적을 시탐하고저 박길송을 가석방하는 가면극을 놀아대면서 감시특무도 배치하였다.
 
그러나 적들은 철저히 실패하고 말았다. 박길송은 라자구반일회와 라자구 지방유격대 그리고 미혼처 김옥순 등과의 긴밀한 배합하에 지혜롭게 적들의 시선을 따돌리며 마수에서 벗어났다. 그 과정에 우리 동지들이 희생되고 집들이 불에 타는 막대한 희생이 따랐다.
 
박길송과 김옥순 등은 어떠했을가. 그들은 라자구와 그 일대의 산속에서 헤매며 석달이나 갖은 고생을 겪었다. 그 와중에 북만과 동만(연변)의 변계를 이룬 로야령을 넘어 녕안땅 동경성 쪽에서 끝끝내 훈춘4연대의 4중대를 만나 그 뒤 항일련군으로 개편된 부대에 소속되었다. 이들의 정식 결혼은 그때의 일이고 부인 김옥순은 부대 재봉대에 편입되었다. 박길송과 부인 김옥순의 항일련군 생애, 근 10년에 달하는 피어린 항일무장투쟁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둘째 오빠 박길송과 형님 김옥순이 집을 떠나 멀리 북만으로 간 후 박씨 가족은 왕청현 라자구 물박골에서 땅굴생활을 하며 근근히 살아갔다. 막내이고 1934년 정월생인 박순금은 한해 두해 커가면서 조금씩 뭔가 알게 되였다. 물박골은 라자구 신툰자에서 십리평 금창으로 가는 곳에 위치한 산골 산재마을이다. 일본놈들이 항일련군과 인민대중과의 혈연적 관계를 막으려고 집단부락 정책을 실시한 데서 박길송 부모님들과 살아남은 형제남매들은 산에서 내려와 신툰자 집단부락에서 살게 되었다.
집단부락을 하니 이들 박씨 가족은 부락을 둘러싼 높은 토성 밖으로 마음대로 나갈 수 없었다. 항일가족이라고 특별히 단독감시를 들이댄 데서 그들은 별의별 고생을 다 겪어야 했다. 하루는 적들이 항일분자를 잡는다며 박씨댁에 뛰여들어 야단법석 부리다가 어린애인 박순금을 발로 차서 불무지에 차넣었다. 순금이는 불에 데여 말이 아니였다.
 
어디 가서 치료할 수도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민간요법으로 감자를 깎아붙이며 불에 덴 자리를 겨우 아물게 했다. 왼쪽 허벅지는 80여세에 나는 현재까지도 한 곳에 허물이 남아있어 치떨리는 과거사를 떠올리게 한다.
 
고생은 한해 또 한해 그칠 줄 몰랐다. 한평생 고생에 시달리던 박길송의 어머니 전씨는 해방을 한해 앞둔 1944년 음력 7월 12일 50여세의 나이로 한많은 세상을 하직하였다.
 
1945년 8월, 박길송 열사의 어머니 전씨가 사망된 지 한해 만에 박씨 가족은 라자구 신툰자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박길송 열사의 막내 여동생 박순금 할머니는 손위 언니 셋은 한족에게 시집가고 셋은 조선족에게 시집갔으며  넷째 언니 박순옥은 석현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해방이 되자 박순금은 라자구 신툰자에서 소학교를 다니다가 몇해 되지 않아 월반해 중학교는 라자구에서 다니었다. 초중은 1953년도 졸업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흑룡강성 쌍압산의 다섯째 언니 박순녀 집에 가서 2년간 휴식하다가 1958년에 결혼했다. 남편은 라자구 오갑(下河, 조선족은 오갑이라고 부름)사람 오기영(吴基英)씨이다.
 
결혼 이듬해인 1959년 박순금은 오갑에서 신생아 접산원으로 지내다가 1961년에 라자구 태평구에 와 촌병원의 간호원 겸 접산원으로 일했다. 노임제가 아닌 공수제였다. 집은 태평구에 잡았다가 1969년경에 다시 신툰자로 이사했다. 박순금 할머니는 슬하에 세 남매를 두었으니 그들로는 맏이 1958년생 아들 오중합, 1961년생 딸 오청해 그리고 막내 오중호는 1963년생으로 라자구 태평구에서 고고성을 터치었다.

리강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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