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凤海
2020-04-24 17:48:29 출처:cri
편집:林凤海

인민경찰의 사명감 안고 열심히 일해온 18년

왕청현공안국 출입경관리대대 박청화씨의 이야기

박청화씨는 녀민경의 사명감을 안고 평범한 일터에서 드높은 책임감으로 인민군중을 위해 봉사해 사람들로부터 《진정으로 인민군중을 관심하고 사랑하는 녀민경》으로 불리우고있다.

올해 45세에 나는 박청화씨는 왕청현공안국 출입경관리대대의 한 보통민경이다.
1994년에 연변경찰학교를 졸업한 박청화씨는 1998년부터 선후로 왕청현공안국 사무실 비서, 정무대청 호적접수창구의 민경으로 있다가 사업의 수요로 2009년 출입경관리대대에 전근되여 외사접수창구의 민경으로 사업하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장장 18년간 그는 고정된 일터에서 변함없는 미소와 변함없는 사업열정으로 인민군중들을 위해 봉사해왔다. 
그녀는 호적, 출입경 접수창구의 사업을 맡은 18년동안 22만명의 고객을 접대하였는데 오차가 생겨 고객들이 다시 찾아오는 일이 단 한차례도 발생하지 않았다.
군중들의 수요에 근거해 박청화씨가 고안해낸 《장애자록색통로》, 《전화예약봉사》, 《문전송달봉사》등 편민봉사제안은 광범한 군중들의 호평을 받았을뿐만아니라 사업효률을 배로 늘림으로써 왕청현공안국 출입경관리대대의 봉사능력을 크게 제고시켰다.
2012년 8월의 어느 날, 왕청현 신민지역사회 5거 10조에 살고있는 한인옥로인이 한국에 나가있는 아들딸들을 만나러 가겠다며 정무대청 출입경창구를 찾았다. 그러나 다리를 쓰지 못해 휠체어에 앉아온 그 로인은 3층으로 올라갈수 없었다. 이 상황을 알게 된 박청화씨는 로인을 3층까지 업고 올라와 로인을 도와 사진을 찍고 서류를 작성해드렸다. 그런데 로인의 두손이 잔페여서 지문채집이 힘들었다. 박청화씨는 조급해하는 로인을 안정시키는 한편 반복적으로 지문을 채집해 끝내 지문을 채집하는데 성공하였다. 출경수속을 마치고 한국으로 가게 된 한로인은 너무도 기뻐 청화씨의 손을 꼭 잡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2011년 음력 초사흗날, 광주, 심수, 상해에서 사업하고있다는 고객 세명이 명절휴식일을 리용해 려권, 통행증 등 출경수속을 하려고 호구소재지인 왕청현공안국 출입경관리대대 출입경창구를 찾아왔다.하지만 휴식일이여서 수속을 할수 없게 된 고객들은 영하 30도나 되는 추위에 발만 동동 굴렀다. 이 안타까운 사정을 알게 된 박청화씨는 두말없이 달려와 신청을 접수하였다. 수속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이미 오후 네시가 넘었다. 
   
 2011년 9월, 오문통행증을 수속하러 온 장모의 신분증 사진과 그 본인이 부합되지 않은것을 발견하였다. 청화씨는 침착하게 장모에게 성명,출생년월일, 호구소재지, 가정성원 등 상황을 하나하나 자세히 문의했다. 사전에 충분한 준비를 해가지고 온 장모는 물음에 거침없이 대답했다. 직업적 민감성으로 청화씨는 갑자기 장모에게 무슨 《띠》인가고 물었다. 뜻밖에 들이대는 물음에 대답을 못하게 된 장모는 하는수 없이 자기가 오문에서 체류기한을 넘긴 탓으로 출경통제가 되여 자기와 비슷한 사람의 신분증으로 출경수속을 하려 했다는 사실을 승인하였다. 이렇게 모든 절차를 엄격히 집행한데서 청화씨는 3년동안에 이름을 바꾼 리영철 등 10명의 불법인원, 출경통제인원 22명, 두가지 국적을 소유하고있는 인원 3명, 두가지 호구부를 소유하고있는 불법인원 3명을 제때에 제압,페지시켜 사회안정을 수호하는데 돌출한 기여를 했다.
 박청화씨의 드높은 사업열정과 사업성과는 사회 각계와 정부의 인정을 받았다. 그는 선후로 연변주공안계통의 《교육훈련모범》, 《우수공무원》등 수많은 영예칭호를 수여받고 2012년 11월말에는 연변주공안계통의 《창구봉사스타》로 평의되였으며 2012년 12월초 왕청현출입경관리대대도 길림성공안계통《인민만족시범창구》로 평의되였다. 박청화씨는 오늘도 사명감과 책임감을 안고 한 보통 공산당원의 가치를 실현해가고 있다.
                                     

리강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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