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0-07-15 15:46:41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0년 7월16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7월 세 번 째 주의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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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월 16일 초복

:

오늘 7월 16일은 초복입니다. 초복은 삼복(三伏) 가운데 첫 번째에 드는 복날인데요. 이 복날은 일어나고자 하는 음기가 양기에 눌려 엎드리는 날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초복에서 말복까지의 기간은 일 년 중 가장 더위가 심한 때로, 이 무렵의 더위를 다들 아시다시피 삼복더위라고 하죠.

해마다 삼복은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 사이에 출현하는데요, 이때의 기후는 기온이 높고 기압이 낮으며 습도가 크고 바람이 적은 게 특점입니다.

초복은 하지로부터 세 번째 경일, 중복은 네 번째 경일(庚日), 말복은 입추로부터 첫 번째 경일입니다.

삼복의 최초의 기재는 중국의 역사서인 ‘사기(史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춘추시기의 진(秦)나라 덕공(德公) 2년 즉 기원전 676년의 여름은 몹시 무더웠다고 합니다. 이때 사람들은 개를 잡아 보신하는 방법으로 열독 즉 더위를 물리쳤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독하는 날을 복날(伏日)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일부 지역에는 아직도 '개고기 국물 한 방울이 발등에 떨어져도 몸보신이 된다'라는 말이 있는데요. 중국 옛 문헌의 기재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

한국에서는 보통 초복, 중복, 말복. 복날이 되면 항상 삼계탕 등을 먹으며 몸보신을 한다고 하죠?

(고정 간주 6")

2. 지명과 연변

:

계속하여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이런 제목으로 지명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옛날 조선인들의 중국 이주 중심지였던 길림성 연변 용정의 이야기입니다.

[음악 혼합]

용두레우물에 묻힌 옛 동네의 이야기

“그게 무슨 말이냐” 하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정말이지 봉창을 두드리는 소리 같기 때문이다. 용정(龍井)은 1886년 조선인들이 지은 이름이지만 최초의 주민은 조선인이 아니었다고 한다. 동네의 지명 역시 이 용정이 첫 이름이 아니라고 한다.

용정에 처음으로 조선인 마을이 생긴 것은 1877년 봄이었다. 조선 평안북도의 김언삼(金彦三), 함경북도의 장인석(張仁碩), 박윤언(朴允彦) 등의 식솔 열네 가구가 이곳에 초가를 짓고 화전을 일궜다. 그 후 조선인들이 하나 둘 모여들면서 차츰 큰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이때 마을은 육도하 기슭에 있다고 해서 육도구(六道溝)로 불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에 앞서 육도하 기슭에는 벌써 웬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때 육도하 남쪽에는 만족들이 세운 동네가 먼저 있었다고 합니다.” 현지의 안내를 했던 오정묵도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무척 뜻밖이었다고 말한다.

오정묵은 용정 현지에서 이름 있는 한의사韓醫師인데 오래전부터 용정의 문화재를 발굴, 복구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고향에 대물림의 비방처럼 뭔가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것. 그래서 마치 병명을 기억하듯 용정의 유적과 이야기들을 적지 않게 알고 있었다.

1860년대 흑룡강성의 녕안, 해림 등 지역에 살고 있던 만주족들이 전란 등을 피해 연변일대로 천이(遷移)했다. 이때 육도하(六道河) 남쪽 기슭에 네 가구의 만주족사람이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지금의 용정 옛 우물의 강 건너 바로 남쪽에 위치한 이 마을은 당시 “태성루(泰盛樓)”라고 불렸다고 전한다. 훗날 이 고장에 이삿짐을 풀었던 조선인들은 또 이 마을을 네 가구의 마을이라는 의미의 “4호동(四戶洞)”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4호동의 사람들도 이 고장의 최초의 주민은 아니었다. 1886년 봄, 육도구의 한 촌민이 밭을 갈다가 돌담 밑에 묻혀 있는 옛 우물을 발견한다. 옛날 이 고장에 살았던 선민(先民)들이 그때까지 어딘가에 숨기고 있었던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그 무렵 벌써 발견되었는지는 몰라도 강 건너 서쪽의 동흥촌(東興村)에는 천 년 전의 옛 성곽이 있었다. 우물을 팠던 사람들과 그들이 살던 옛 마을은 언제부터인가 이름마저 뭔지 모르는 흘러간 옛 이야기로 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합심하여 돌담을 허물고 우물을 깨끗하게 가셔냈으며 나중에 나무를 찍어다가 우물에 용두레를 만들었다. 희한하게도 이때 용두레를 만든 사람은 조선인이 아니라 웬 중국인이라고 한다. 산해관 남쪽에서 왔던 중국인들도 이 무렵 육도구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때부터 마을사람들은 용두레로 물을 길었고 길손들도 용두레로 물을 퍼 올려 갈한 목을 적셨다. 육도구는 차츰 한입 건너 두입 “용두레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육도구 아니 용두레촌의 최초의 주민인 장인석은 천자문을 읽은 사람이었다. 그는 박윤언과 상의하고 용두레의 용(龍)자와 우물 정(井)자를 합쳐 마을의 이름을 “용정촌”이라고 지었다. “용정”은 1900년 청나라 관방에서 “육도구”와 “용정촌”을 함께 쓰면서 문헌에 등장하며 그 후 정식으로 “용정촌”이라고 명명하면서 이 고장의 지명으로 고착된다.

전설속의 신비한 동물 용(龍)은 그렇게 옛 우물의 두레박이 퍼서 올린 감미로운 물처럼 마을이름을 적시고 있었다.

용정촌은 조선에서 북간도로 넘어오는 길목에 위치, 뒤미처 주막이 섰고 잡화점과 음식점이 섰으며 1907년에는 100여 가구의 큰 마을로 되었다. 1910년 일본이 영사관을 세우면서 용정은 그들이 간도를 통치하는 중심지로 되었다.

용정촌 부근에는 마을들이 줄레줄레 생겨났다. 이 마을들도 용정촌처럼 겨끔내기로 이름에 “용(龍)”자를 달았다.

용정 서쪽의 비암산(琵岩山) 기슭에 세웠던 사찰도 용의 이름자를 달았다고 한다. 일명 용주사(龍珠寺)로 전하는데 의하면 사찰 자리가 마치 용이 여의주를 얻으려고 해란강에 머리를 쑥 내민 모양과 흡사하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오정묵은 언제인가 그 이야기의 진실을 확인하느라고 비암산 기슭을 헤집고 다녔다고 한다. 알고 보니 이 사찰은 1920년에 세워졌는데 수수 대를 엮고 흙을 바른 토벽의 암자 모양이었으며 스님 셋이 상시적으로 거처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있을 때 벌써 빈 절이 되었고 1948년에 완전히 무너졌다고 합니다.”

그 무렵 용주사는 어느새 현지 사람들의 기억에서 가물가물 사라지고 있었다. 사찰자리 부근 농가의 돼지우리에 덮여있는 몇 장의 옛 기와가 사찰의 목탁소리를 간신히 붙들어 매고 있었다.

현지의 학자들도 지명에 나타나는 용의 이름을 거개 수호신으로 해석하고 있다. 낯선 이역에 새로 정착하면서 아무런 힘도 없었던 우리 겨레의 이주민들에게 정신적인 위안을 주었다는 것. 하긴 용은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신 같은 존재로서 인류가 경외하는 대상이면서 또한 숭배하는 대상이었다. 당시 쪽지게를 메고 두만강을 건넜던 이주민들은 하늘 아래 두 손밖에 의지할 데 없는 처지였다. 이주민들은 가공할 힘을 갖고 있는 신성한 “용”을 거주지에 갖다 붙이고 이 “용”이 그들을 수호한다는 믿음으로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는 것이다.

1980년대 연변 사학자들이 조사, 고증한데 의하면 용정 부근 조선족마을의 사람들은 옛날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용알 뜨기”를 놀이를 했다고 한다. “용알 뜨기”는 우물에 비낀 보름달을 건진다는 것으로, 전날 밤 용이 내려와서 우물에 알을 낳는데 알이 들어있는 그 물을 먼저 떠서 밥을 지으면 가족이 무병하고 장수한다는 속신(俗信) 때문이라고 한다. 연변의 이 민간 풍속은 옛날 한국 경기도 지역에서 유행하던 풍속과 비슷하다.

이밖에 촌민들은 또 수재를 막기 위해 용왕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도 있었으며 가물이 들 때는 기우제를 지내고 용왕을 위로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지에 잔존하고 있었던 이런 오랜 풍속은 오래전부터 벌써 이름 그대로 “용의 전설”로 되고 있었다.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드디어 흔적도 없이 모두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용두레우물은 용정이라는 이름을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예외가 되지 않았다. 1930년대 우물가에 세워졌던 석물 “용정기원지명지정천(龍井起源地名地井泉)”은 “문화대혁명” 때 형체 없이 훼손되었으며 옛 우물은 흙과 돌에 몽땅 묻혀버렸다. 1986년, 용정 옛 우물은 다시 복원되었지만 상징적인 의미로 남았을 뿐이며 우물물은 더는 퍼 올릴 수 없게 되었다.

천년의 용두레우물은 세상에 얼굴을 잠깐 내밀었다가 불과 100여년 만에 또다시 “용의 전설”로 돌아간 것이다.

정말이지 옛날 육도하에 가락처럼 울리던 용두레 소리가 그립다. 고요한 달빛아래 우물가에 앉으면 금세 어디선가 용두레 소리가 귓가에 울릴 것 같다. 아, 언제면 두레박을 잣아 옛 동네의 이야기를 다시 물처럼 퍼 올릴 수 있을까…*

[음악 혼합]

네,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이런 제목으로 길림성 연변의 지명 용정과 이 지명에 깃든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코너 [청취자의 벗]

[청취자의 벗 편지 사연]

: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소개해드리는 시간 ‘편지가 왔어요“입니다.

오늘은 먼저 "한 맹인의 뜻 깊은 회갑연" 이런 제목으로 길림성 장춘시 윤영학 청취자가 보낸 편지 사연을 만나 보겠습니다.

[청취자의 편지]

3. 청취자의 편지 사연

"한 맹인의 뜻 깊은 회갑연"

"맹인 림춘옥(60세)은 산 좋고 물 맑은 화룡시 서성진 이도촌에서 살고 있습니다. 림춘옥은 우리말 방송 애청자이고 뢰봉활동적극분자입니다.

림춘옥은 원래 맹인이 아니었습니다. 1960년 한 영예군인 가정의 귀여운 딸로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 노래를 잘 불러’ 이도촌의 꾀꼴새‘ 라고 불렸습니다. 그는 늘 '뢰봉의 노래'를 즐겨 불렀고 뢰봉처럼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자기 자신을 단속했습니다. 어느덧 처녀로 성장하여 결혼하고 어머니가 되여 천륜지락을 누리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액운이 찾아들었습니다. 1996년 한쪽 눈이 실명되었고 뒤미처 다른 한쪽 눈마저 실명되면서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엎친데 닾친 격'으로 몇년 후에는 또 남편마저 중풍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였습니다. 건강하던 남편이었습니다. 졸지에 앞이 캄캄하였습니다. 수년을 하루같이 정성껏 남편을 간호하였으나 남편은 저 세상으로 가버렸습니다.

생활이 그를 버린다고 해도 생활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림춘옥은 연길노인뢰봉반 김봉숙맹인 반장을 본보기로 삼고 새로운 생활을 열었습니다. 2000년초부터 연변과 중앙 방송의 우리말방송을 교과서로 삼고 학습과 자아수련에 힘썼으며 사회활동에 적극 참가하였습니다.

2천년초 반에는 우리말방송을 통해 일찍 태항산에서 조선혁명가들이 일본침략자들과 용감히 싸운 불후의 업적을학습하여 시야를 넓혔습니다. 2016년 음력설에 장춘시 구태구 신립촌 노인회 뢰봉반과 손잡고 전화요청 무대를 꾸려 그의 노래를 산재지역 조선족노인들에게 선물하기도 하였습니다.

림춘옥의 전후 사연을 잘 알고있는 연변애청자협회 박철원 회장은 그의 회갑잔치만은 노인뢰봉반과 애청자들과 함게 우리말방송 부문과 손잡고 의미있는 행사로 조직하려고 구상했습니다. 그런데 박철원 회장은 공교롭게 심장동맥 긴급구급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일생에 단 한번밖에 없는 이 회갑연은 가족연회로 하고, 단체 축하연은 내년으로 미루기로 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구수옥(83세) 할머니는 ‘내 아들도 이처럼 앞을 못 보는맹인인데… ‘ 라고 하면서 혈육의 정을 담아 봄나물을 캐여 한푼 두푼 모은 돈 300원을 림춘옥의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간주]

네, 길림성 장춘시의 윤영학 청취자가 7월 12일자로 보낸 편지 사연이었습니다.

윤영학 청취자 부부는 또 구수옥 할머니의 소행에 깊은 감명을 받고 구수옥 할머니에게 노래 한수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내년으로 기약하는 림춘옥 할머니의 회갑연이 내년에 보다 아름답길 기원하면서 이번에는 길림성 연길시의 리성복 청취자가 보낸 소식 한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연길 북산가두에서 혁명전통 교육을 진행했습니다. "

"7월 1일은 중국공산당 탄생일입니다. 길림성 연길시 북산가두는 당 역사와 당 규약 학습과 결부하여 100명 노전사들을 사진으로 모시고 혁명전통 교육을 진행하였습니다.

연길시 북산가두는 당의 탄생일을 기념하면서 당규약을 중심으로 19차 당대표대회 새로운 지시들을 지침으로 한 당 학습 수으업로서 당원 간부들의 이론 수준을 높이고 당 조직의 대오 건설을 한 단계 끌어 올렸습니다. 이 당 학습 수업은 당원마다 자신을 검증하는 총화와 학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소영향 도봉촌을 찾아서 항일 전쟁의 력사도 회억하고 로혁명군인을 모시고 혁명 전통교육을 진행했습니다. 당원들은 모두 초심을 잃지 않고 영원히 퇴색하지 않는 모범 당원으로 될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연길시 북산가두에는 121개의 기층 당지부가 있습니다. 북산가두는 당 지식 학습과 실천에서 모범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단영지역사회 왕수정 당서기는 수차 전국영예 증서를 수여 받았습니다. 또 단산지역사회는 전국선진의 영예를 받았습니다."

네, 이번에는 길림성 장춘시 리종광 청취자가 7월 9일자로 보낸 편지 사연입니다. 리종광 청취자는 중국국제방송국의 방송을 빌어 우리 후대들의 사적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길 바란다고 편지에 적고 있는 데요 편지 내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2020년은 습근평 주석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공산당의 영도 하에 전 당과 전국 56개 민족 인민들이 단합하여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꿈을 실현하고 있는 주요한 한해이며, 또 빈곤퇴치를 결속 짓고 결정적 승리를 이룩하는 관건적인 한해입니다.

이렇듯 중요한 관건적인 해에 우리 앞을 막아선 장애가 나타났으니, 바로 바이러스 전염병인 코로나19입니다.

이 가운데서 우리 길림성과 장춘시의 방역 상황은 좋으며 이미 50여일이나 무확진자 상태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길림성과 장춘시 인민은 방역을 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한과 호북성 현지를 도와 선후로 5차나 의료 지원팀을 파견하여 코로나19 치료와 방역에 참가하였습니다.

...

제가 알기로는 이때 길림성의 여러 대학을 비롯하여 몇십명의 조선족 의사가 무한과 호북성에 지원을 다녀왔습니다. 이 가운데는 저의 딸 동창생 3명도 들어 있습니다...

중국국제방송국의 방송을 빌어 우리 후대들의 사적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길 바랍니다...."

네, 코로나19 사태 때 여러 지역의 많은 의료인원들이 무한과 호북성에 파견, 지원을 했는데요, 리종광 청취자는 이것이야말로 중국특색의 제도 우월성이라고 감명 깊게 말씀했습니다.

청취자님들이 <청취자의 벗> 7월의 퀴즈답안을 보내오고 있는데요, 먼저 길림성 연길시의 박철원 청취자가 7월 11일자로 보내온 퀴즈답안입니다.

"천당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몰라도 땅우에는 환경이 수려하고 살기 좋은 고장이 많지요. 중국에도 인간락원으로 불리는 명성높은 유람지들이 많고많지요.

이 답안은

김봉숙 리해숙 조태산 허애자 김봉선 김연옥 김희숙 박순자 김옥자 김순옥 리영자 리련옥 리종길 최화원 박경만 박종근 황순금 김정자 박금숙 태봉선 박상국 박철원 등이 보냅니다."라고 적어보냈습니다.

네, 한국 대구에서 구원모 청취자도 7월 8일자로 <청취자의 벗> 7월의 퀴즈답안을 보내왔습니다.

구원모 청취자는 또 메일로

2020. 07. 13 일자의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의 코로나19 현황과

2020. 07. 13 일자의 대구광역시 지역의 코로나19 현황을 보내왔습니다.

네 감사드립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이달에는 지명과 관련한 퀴즈를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무엇’과 ‘무엇’이 있다.”

여기서 ‘무엇과 무엇’은 어느 도시를 가리키는 말일까요?

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여기서 ‘무엇’과 ‘무엇’은 어느 도시를 가리키는 말일까요?”

네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프로편성에 진행에 박은옥,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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