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0-08-10 13:26:51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0년 8월 6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8월 첫 번째 주의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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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월

갑:

  8월은 1년의 여덟 번째 달로, 1년 중 평균기온이 24∼26℃로 가장 높은 달입니다. 또 더위가 막바지에 이르는 달로, 오곡백과가 여물어가는 달입니다.

  오늘 8월 6일은 양력으로 올해 218번째 되는 날입니다.

  1932년의 8월 6일, 베네치아 영화제가 설립되었습니다. 베네치아 영화제는 최초의 국제영화제로 '국제영화제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칸 국제영화제, 베를린 국제영화제와 함께 세계 3대 영화제로 손꼽힙니다.

  8월 6일은 또 볼리비아와 자메이카의 독립일이기도 합니다.

  네, 며칠 전인 8월 3일도 기억해야 할 날이 아닐지 합니다.

  우리 옛말에 "십오야 달은 밝은 달"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중국말에는 "십오야 달은 십육에 둥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월은 언제나 음력 십오나 십육에 생긴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아주 특수한 한해인데요, 중국과학원 자금산천문대의 데이터에 따르면 8월 3일 23시 59분, 달은 만월의 정도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날은 보기 드물게 음력 14일입니다.

  음력 14일에 발생한 지난 만월은 11년 전 즉 2009년 4월 9일입니다. 음력 14일에 발생하게 되는 다음 만월은 17년 후 즉 2037년 6월 27일입니다.

[간주]

2. 지명과 연변

  계속하여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이런 제목으로 지명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화룡 지역의 지명 삼수와 갑산'의 이야기입니다.

  "삼수갑산의 ‘어랑타령’"

  ‘삼수’와 ‘갑산’을 산이나 강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사실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은 옛날 조선반도의 함경남도, 현재는 양강도에 있는 오지의 지역 이름이다. 날씨가 춥고 산세가 험하여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귀양지로 유명한 고장이다.

  뭐니 뭐니 해도 와룡(臥龍)에서 나서 자란 이한민 씨에게는 더는 ‘귀양지’가 아니었다. 이웃한 동네의 이름이었다.

  “우리 마을 서남쪽에 있는 데요, 조선의 갑산군 사람들이 이민을 와서 살던 동네라고 합니다.”

  진짜 ‘갑산’이 두만강 북쪽으로 ‘귀양’을 온 게 아닐지 한다. ‘삼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삼수’는 동네가 아니라 이름처럼 강을 뜻하고 있었다. 고동하(古洞河)가 흘러내려 봉밀하(峰密河)와 합류했고 천수동구(泉水洞溝)에서 물이 흘러나와 봉밀하와 합류했다.

  어찌 보면 삼수(三水)가 아니라 일수(一水)였다. 그런데 삼수가 한데 모인 봉밀하가 걸핏하면 성깔을 부렸다. 큰비가 내리면 봉밀하 하류의 와룡(臥龍) 벌은 기슭 위로 기어 나온 물 때문에 금세 바다가 되었다. 누군가는 마을 이름자에 용이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탓했다. 사실상 와룡은 만족 말로 ‘대마’라는 의미라고 지명지(地名志)가 기록하고 있다. 옛날 와룡은 물이 아니라 대마로 소문난 고장이라는 것이다.

  어쨌거나 중국말 이름처럼 정말 용이 누워있는 것 같았다. 양쪽의 산줄기가 마치 용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어서 물이 빠질 데가 없었다.

  “물난리 때 헬기가 날아와서 쌀 포대를 투하했다고 합니다.”

  지난 세기 80년대 있은 일이었다. 골짜기 밖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 물에 밀려가서 헬기로 구호물자를 날랐던 것이다.

  이때 이한민 씨는 벌써 고향 와룡을 떠나 수도 북경에 있었다. 현지에 있던 친지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사람들은 짐이고 뭐고 챙길 새 없이 허겁지겁 부근의 산비탈에 기어올랐다고 한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이야기였지만 별로 낯설지 않았다. 이한민 씨가 열두세 살 되던 1963년경에도 물난리가 터졌던 것이다. 그때 개구장이들은 소구유를 배처럼 타고 물놀이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른들은 속이 타서 재가 앉을 지경이었다. 애들이 물장난을 즐기게 놓아두고 있을 경황이 아니었다. 와룡 사람들은 급기야 서남쪽의 어랑 마을로 피난을 갔다. 어랑(漁浪) 마을은 와룡과 불과 5리 정도 상거했지만 상류 쪽이라 물 피해가 적었던 것이다. 어랑 마을은 함경북도 동해안에 있던 어랑군(漁郎郡) 사람들이 정착한 곳이다.

   미구에 어랑 마을의 사람들마저 물 피해가 심해서 위쪽의 계남(雞南) 마을로 피난을 갔다고 한다. 계남은 북쪽에 계관라자(雞冠砬子)의 이름이다. 계관라자는 산봉우리의 바위가 마치 닭볏처럼 생겼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유명한 갑산은 바로 계관 마을 서남쪽에 위치한다.

  와룡으로 이른바 ‘귀양’을 온 마을은 이 갑산뿐만 아니었다. 어랑 마을 부근에는 평안북도 이민들이 자리를 잡고 새로 세운 부락이라고 하는 평신(平新) 마을이 있었다. 만리구(萬里溝)를 흐르는 개천 기슭에는 또 함경북도 무산군 이민들이 정착했다고 하는 무산(茂山) 동네가 있었다. 만리구는 골짜기가 깊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만리구를 따라 들어가면 천리봉(千里峰)이 있다.

  “거기에 오르면 천리가 보인다고 하던데요, 별로 높지 않은 산입니다.” 언제인가 산 이름에 홀려 천리봉에 올랐다고 하는 이한민 씨의 말이다.

  만리구도 이름보다 깊지 않은 탓인지 모른다. 현지의 조선족들은 ‘비석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진짜 골짜기 어구에 비석이 있었다.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숨진 항일유격대원의 기념비이다.

  1932년 2월 12일, 일본군은 유격대가 집결하고 있던 어랑촌을 돌연 습격했다. 유격대원들은 일본군과 6시간여의 혈전을 벌렸다. 어랑촌의 항일 군민 1천여 명은 그 틈을 타서 안전하게 철수하지만 13명의 대원이 전사했다. 1957년, 화룡현 정부는 어랑촌 입구에 “13용사 기념비”를 세웠다. 이 기념비는 그 후 북산 언덕에 개축되었다.

  이 비석골은 또 석탄이 매장되어 있다고 해서 ‘탄광골’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계관라자 일대에서는 또 금을 캤으며 이에 따라 금이 매장된 동네라는 의미의 지명 ‘금장동(金藏洞)’이 생기기도 했다. 철광석이 매장되어 있어서 철강공장이 일어서기도 했다. 지난 세기 80년대 불쑥 나타난‘와룡철강공장’은 연변 나아가 중국에 와룡이라는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한민 씨의 조상의 고향은 만천하에 소문난 고장이었다. 바로 ‘천하 제일강산’이라고 하는 금강산의 남쪽 기슭에 있었다. 부친은 기와공장 기술자였다. 1943년, 연변 동불사의 대지주 리유랑이 금강산 구경을 왔다가 근처의 기와공장에 매료, 유능한 기술자들을 동불사에 데려왔다. 부친 일행은 이때 동불사에서 처음으로 기와를 만들었다고 한다. 광복이 나자 리유랑은 공장을 폐쇄하고 한국으로 돌아갔고 이한민 씨의 부친은 친척이 살고 있던 와룡으로 이주했던 것이다.

  그 무렵 이한민 씨는 와룡에서 탯줄을 끊는다. 항미원조 전쟁이 종식된 이듬해 부친은 조선 복구건설 지원자로 되어 가족을 이끌고 함흥으로 나갔다. 조상의 옛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타산이었다.

  “지원자라고 가슴에 꽃을 달았대요. 마을에서 나팔을 불고 꽹과리를 치면서 환송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꿈은 금방 날아갔다. 3.8선 철조망이 남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었다. 부득불 1955년 다시 두만강을 건넜다. 북만주의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8년 후에야 비로소 와룡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씨 가족은 이민사에서 두 번이나 강을 건너 정착하는 특이한 사례를 만들고 있었다. 더구나 항미원조 전쟁 후 두만강을 건넌 월강인(越江人)은 가물에 씨앗 나들 듯했던 것이다.

  이때 중국 각 지역에는 군인들로 구성원을 이룬 특수한 마을이 생겨났다. 항미원조 참전 영예군인(榮譽軍人, 상이군인)과 제대군인들을 안치하던 농장이었다.

  와룡의 동쪽에도 소형 농장이 하나 일어섰다. 나중에 와룡에 편입되어 8대(隊, 촌민소조)로 불리게 된 마을이다. 이 8대 마을은 원래 왕지평(王集坪, 왕집평)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왕씨 성의 중국인이 먼저 자리 잡은 곳으로 훗날 장터가 생겼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필경 총을 내려놓아도 군인은 군인이었다. 장터를 복원한 게 아니라 이번에는 포수대를 묶었던 것. 군인 출신의 이 포수대 덕분에 8대 마을에는 늘 고기 잔치가 벌어졌다.

  “마을 부근의 산에는 해방(8.15 광복) 전까지 호랑이와 늑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한민 씨가 마을 어른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였다.

  웬 일인지 호랑이와 늑대는 항미원조 전쟁 무렵부터 종적을 감췄다고 한다. 그러나 멧돼지와 곰, 노루, 너구리, 오소리 따위가 그냥 무시로 골짜기를 넘나들었다. 고동하와 봉밀하에는 산천어며 이면수(臨淵水魚)가 헤엄을 치고 다녔다.

  그때는 나무가 수림을 이뤄 골짜기를 뒤덮었다. 말 그대로 들짐승의 고향이었다.

  고동하의 하류에는 송림동(松林洞)이라는 이름이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송림동은 이름 그대로 소나무 수림의 동네라는 의미로 송림동 골짜기 어구에 위치한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소나무처럼 특정된 나무로 이름을 지은 마을은 또 하나 있다. 들미동이다. 들미는 들메나무의 방언으로 물푸레나무과에 속하는 낙엽교목이다. 고동하 기슭의 음습한 비탈에는 들메나무가 많이 자랐던 모양이다.

  들미동을 지나 와룡의 북쪽 끝머리에도 마을이 있었다. 원래는 차역이 이곳에 있다고 해서 차 마당이라는 의미의 처창즈(車場子)라고 불렸다가 괴뢰 만주국 시기 목란툰(木蘭屯)이라고 개명했다. 8.15 광복 후 화룡현과 안도현 인접지대에 있다고 해서 두 현의 이름을 각기 한자씩 갖다가 화안촌(和安村)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결국 그토록 유명한 ‘갑산’마을도 이름을 고치게 된다. ‘귀양지’라는 이미지가 나쁘다는 것. ‘갑산’은 글자풀이를 하면‘제일의 산’이라는 뜻이며 이에 따라 ‘종령민수鐘靈敏秀’ 즉 “좋은 환경에서 우수한 인물이 나온다.”는 의미를 넣어서 ‘영산(靈山)’이라고 개명했다. 삼수(三水)를 일수(一水)로 한데 모은 봉밀하도 언제부터인가 벌꿀의 향기를 풍기는 봉밀하(蜂蜜河)로 불리고 있다.

  이런저런 이름은 마치 덩굴처럼 어우러져‘삼수갑산’의 다른 풍속도를 그리고 있었다. 부지중 “어랑타령”의 한 토막이 그림처럼 눈앞에 떠오른다.

  “산수 갑산 머루 다래

  언클러 선클러졌는데

  나는 언제 임을 만나

  언클러 선클러 지느냐.

  어랑어랑 어허여…”

  ‘임’을 그리는 조선시대 여인들의 외로운 마음이 노랫가락에 실려 있었다. 똑 마치 와룡 지명의 뭔가를 암시하고 있는 것 같아 공연히 나그네의 마음을 서글프게 했다.*

  네, 연변의 지명과 이 지명에 깃든 이야기 "삼수갑산의 ‘어랑타령’"이었습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처창즈는 옛날 항일유격대의 근거지였다고 합니다.

  연변의 청취자가 보내온 사연에 이 이야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럼 다음 코너에서 처창즈와 처창즈에 있었던 항일열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정 코너)

[청취자의 벗 편지 사연]

갑: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소개해드리는 ‘편지가 왔어요’ 시간입니다.

  오늘은 먼저 박철원 청취자가 보내온 편지 사연을 만나 보겠습니다.

[청취자의 편지]

 지난 7월 28일 소년항일투사 윤영희 열사를 기리는 행사가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에서 있었다고 길림성 연길 박철원 청취자가 보도 원고를 보내왔습니다.

  보도 원고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새일대관심사업위원회의 주최로 <홍색유전자 이어가리>라는 제하의 행사가 문화가두 문성사회구역 4층에서 열렸다. 리직간부와 퇴직간부, 퇴역군인 로전사, 가두사업일군, 중소학교 학생과 주민대표, 연길로인뢰봉반 대표16명 등 100여명이 행사에 참가하였다.

  행사에서는 먼저 학생들이 생존자 김길련 등 “로전사”들에게 붉은 꽃을 달아드렸다.

  이어 <윤영희렬사 추모 사진전> <혁명렬사 증명 기증의식>이 있었다.

  이날의 추모사진전람회에서 화룡시 새일대관심사업위원회 책임자가 연설하고 전국 새일대관심사업 선진개인이며 길림성당위로부터 <우수선전원>으로 표창받은 퇴직교원 리성진이 경과보고를 하였다.

  윤영희렬사는 1931년 11살 나이에 지금의 안도현 명월진 차조촌에서 항일대오에 가입하여 아동단 단장으로 활약하다가 15살 되던 1935년 9월 처창즈(车厂子) 항일유격대근거지에서 일제의 습격에 반격하다가 희생된 어린 렬사이다.

  렬사의 동생인 원 장춘시 애청자 애독자클럽 회장 윤영학은 피타는 노력으로 2016년 드디어 왕청현 혁명렬사릉원에서 윤영희렬사의 서류를 찾아내어 혁명렬사증명을 보충 발급 받아 부모님들이 생전 그토록 찾던 둘째형 윤영희의 신원을 밝혔다.

  현재 중병으로 시한부판결을 받고 양로원에서 휴양하는 윤영학은  2016년 9월 자식들을 데리고 처창즈 전적지를 답사하며 추모제를 지냈고, 2017년 5월13일 화룡시정부에서 처창즈 항일유격대전적지에 윤영희 등 6명의 렬사비를 세울 때에도 현장에 가서 자신의 사후 골회를 처창즈에 뿌려 형님과 함께 있게 해달라는 부탁과 형님의 렬사증을 정부에 바칠 의향을 밝혔다.

  행사에서 연길로인뢰봉반 반장 박철원이 윤영학과 마경옥 부부의  <화룡시 력사박물관에 드리는 글>을 대독하였다. 글에는 항일투사의 유혼을 영원히 소장해주는 화룡시정부에 감사드리며 렬사의 후손답게 혁명전통을 잘 이어가며 후세들에게 애국 교양을 잘 하겠다고 다졌다.

 리성진이 윤영학을 대신하여 윤영희렬사의 혁명렬사 증명서를 화룡시력사박물관에 정중히 기증하였다.

  이어 시3중 학생대표가 렬사들의 유지를 이어받아 훌륭한 인재로 자라겠다고 힘찬 발언을 하였고, “로전사”대표도 선렬들이 피흘린 력사를 명기하고 번영,강대한 나라건설에 여생을 이바지할 것을 결심하였다.

  연길로인뢰봉반대표는 그들은 줄곧 윤영학과 손잡고 사회봉사와 렬사추모활동을 해왔다며 력사를 명기하고 전통교양을 직책으로 삼고 나라에 꾸준히 기여하면서 석양을 빛낼 것이라고 표했다.

  문성지역사회 최금옥 당서기는 “선렬들의 희생으로 바꾸어온 오늘의 행복한 생활을 소중히 여기며 대중을 이끌고 조화로운 사회건설에 힘다하겠다”고 행사소감을 전했다.

  추모행사에 이어 문성지역사회 3층에 전시된 조선족력사문물전람관을 참관한 후 문성지역사회에서 창작 연출한 <나는 공산당원>, <진달래 화룡>등 정채로운 프로를 관람하였다.

  네, 8.1 중국인민해방군 건군절에 즈음하여 정말로 뜻 깊은 소식이었습니다.

  이밖에 다른 청취자들도 현지의 여러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길림성 연변의 이강춘 청취자가 7월 31일, 제7회 길림성시민문화축제, 농민문화축제의 일환인 왕청현사회구역문화월간 시리즈활동이 왕청현종합문화광장에서 가동됐다고 소식을 보내왔습니다.

  길림성 연변의 이성복 청취자가 길림성 연길시 북산가두 뢰봉반과 신흥소학교 뢰봉반 지원자들이 7월 31일 더위를 무릅쓰고 연길시 문명도시 건설에 기여했다고 소식을 보내왔습니다.

  한국 구원모 청취자가 8월 3일자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 지역의 코로나19 현황을 이메일로 전해왔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갑: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7월에는 지명과 관련한 퀴즈를 내어드렸습니다.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무엇’과 ‘무엇’이 있다.”

  여기서 ‘무엇과 무엇’은 '소주'와 '항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소주와 항주는 아름다운 강남을 대표하는 도시인데요, 옛 시에 천당처럼 아름다운 곳으로 묘사되었습니다.

  7월의 퀴즈와 관련하여

길림성 장춘시 애청애독자클럽 남관구 분회 정수이를 비롯하여

리월란, 림귀인, 박만술, 황광주, 리만호, 김숙자, 라성자, 최동중, 리혜숙, 오인숙, 김봉인, 김옥선, 이재영, 강옥화, 장혜숙 조명기 등 17명

 

길림성 장춘시 남관구 조선족노인협회 김춘실 청취자를 비롯하여

박봉선, 전명숙, 박금녀, 안인숙, 심옥선, 권영희, 리금숙, 김명숙, 최봉금, 최정숙, 김금자, 김일룡, 배영애 등 14명.

 

길림성 장춘시 애청애독자클럽 제1자동차그룹 분회 김수금 청취자를 비롯하여

라명희, 주송죽, 주혜숙, 박숙녀, 량두봉, 오애하, 허희숙, 한란희, 리명희, 정기순, 윤연성, 박룡익, 박영희, 방태식, 정성갑, 박옥순 등 17명

 

연변 박철원 청취자를 비롯하여

김봉숙, 리해숙, 조태산, 허애자, 김봉선, 김연옥, 김희숙, 박순자, 김옥자, 김순옥, 리영자, 리련옥, 리종길, 최화원, 박경만, 박종근, 황순금, 김정자, 박금숙, 태봉선, 박상국 등 22명.

이밖에

길림성 장춘시 쌍양구 전정남.

길림성 장춘시 애청애독자클럼 남관구 분회 제5소조 오동연

한국 대구 구원모 청취자

이상 도합 73명이 이메일이나 편지 등으로 퀴즈 정답을 보내왔습니다.

  이 시간을 빌어 [청취자의 벗]을 관심하고 청취한 여러 분께 거듭 감사합니다.

  네, 그럼 계속하여 8월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민과 관련한 연변 지명 퀴즈인데요. 지난 7월의 [청취자의 벗] 시간에 방송한 기사에 이 퀴즈의 답이 들어 있습니다.

  네, 중국 연변의 국경도시 '도문'은 옛날 '무엇'이라고 불렸을까요.

  퀴즈 내용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중국 연변의 국경도시 도문은 옛날 '무엇'이라고 불렸을까요.

  네,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갑: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 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갑: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프로편성에 진행에 박은옥,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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