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0-08-15 18:34:03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0년 8월 13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8월 두 번째 주의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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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월

갑:

  오늘 8월 13일은 2020년 말복의 첫날입니다. 말복은 삼복 가운데 마지막 날에 드는 복날인데요, 삼복은 “삼복지간(三伏之間)에는 입술에 붙은 밥알도 무겁다”는 속담이 있듯이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절기입니다.

  이 속담은 삼복 기간에는 더위가 심하기 때문에 몸의 기운이 쉽게 약해지고, 따라서 입술에 붙은 밥알조차도 무겁게 느껴질 정도로 기력이 쇠하기 쉬운 계절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사소한 일조차도 힘들어지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때는  더위로 인해 손상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하여 보신(補身)음식에 관심을 가져야 함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속담입니다.

  이처럼 삼복에는 건강관리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하겠지요. 특히  보양식 소비량이 많은 기간이기도 합니다.

  네, 이틀 후인 8월 15일은 역사에 기록된 날인데요. 이날은 인도와 콩코의 독립일입니다.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노인절이기도 합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 선언을 했습니다. 일본이 전패한’후 중국은 대륙과 대만에 각기 군사법정을 설립하고 중국 침략 전쟁에서 엄중한 죄를 지은 일본의 을․병급 전범을 심판했습니다.

  공화국이 창립된 후 중국은 또 특별군사법정을 설립하고 제일 마지막 일본 전범을 심판했습니다.

  그럼 이어서 ‘일본전범 특별군사법정의 기록원’ 이런 제목으로 당시 법정의 기록원으로 있었던 권덕원의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고정 간주 6")

“일본전범 특별군사법정의 기록원 권덕원”

  권덕원은 중국 대륙의 제일 마지막 일본전범 특별군사법정의 기록원이다. 군사법정의 판사나 통역관은 물론 전범들이 모두 저 세상으로 사라지고 있는 현 주소에서 그는 또 한 번 그 역사의 살아있는 '기록원'으로 되고 있다.

  그때 그 시절 일본전범에게 심판을 내리기 위한 특별군사법정은 당시 법학계의 거두와 엘리트들이 집결한 장소였다. 그런데 20대 초반의 야릿야릿한 애송이가 법정에 버젓하게 앉아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설명을 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항복을 선고했다. 1946년 1월 19일 동맹국 점령군 사령관 아이젠하워는 특별공시를 발표하고 도쿄에 중국과 미국, 영국, 소련 등 11국의 판사와 검사로 구성된 극동 국제군사법정을 설립한다고 선포했다. 이와 함께 《극동국제군사법정헌장》을 공표, 국제군사법정은 평화를 파괴한 죄, 전쟁법규와 관례를 위반한 죄, 인도주의를 위반한 죄를 심리할 권한이 있다고 규정했다. 상기 3종의 죄를 저지른 것은 갑급 전범이었다.

  국제군사법정은 주로 갑급 전범을 심판했고, 을․병급 전범은 각 피해국 법정에서 단독 심리했다. 을․병급 전범의 죄장은 주요하게 제네바 적십자조약 등 국제공약을 위반했거나 전시 법규를 위반하고 살인, 성폭행 등 잔혹한 행위, 전쟁포로의 학대, 인원 구금 등 비인도적 행위에 직접적으로 종사, 지휘한 것을 망라한다.

  중국은 전승국이자 일본침략의 피해국이다. '8.15' 후 각기 대륙 남북의 여러 지역과 대만에 군사법정을 설립하고 중국침략 전쟁에서 엄중한 죄를 저지른 일본 을․병급 전범을 심판했다. 1945년 12월부터 1947년 말까지 중국 각 지역의 군사법정은 전범 안건 2,435건을 수리, 이 가운데서 110건이 사형으로 언도되었다.

 국민당 정권 시절의 이 군사법정이 열렸을 이때 권덕원은 고작 15살의 어린 나이었다. 그는 흑룡강성 목단강(牡丹江) 고려제1소학교를 마친 후 중학교에서 책을 들고 공부하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모택동(毛澤東)청년단'에 가입했습니다. 그때까지 청년단은 비공개 조직이었습니다." 권덕원은 자랑스러운 어조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모택동청년단'은 그때 그 시절 중국공산당 하부조직인 공청단 조직의 이름이었다. 어린 권덕원이 이런 조직에 가입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그의 큰형은 공산당 산하의 민주연군에 입대했으며 둘째 형도 뒤미처 민주연군의 별칭인 해방군에 입대했다. 후문이지만, 가족과 본인의 남다른 경력 역시 그를 특별군사법정의 심판석에 앉게 하고 있었다.

  권덕원은 미구에 베이징정법대학의 학생으로 입학했다. 졸업할 때 권덕원은 중앙정법간부학교에 통일적으로 배치되는데, 총장은 훗날 베이징시 시장으로 취임한 팽진(彭眞)이었고, 부총장은 훗날 국가 지도자로 있었던 동필무(董必武)였다. 이 무렵 중앙정법간부학교는 심양에 분교를 설립하고 기층 사법간부를 훈련시키고 있었다. 권덕원은 심양 분교에 내려갔다.

 그런데 세계의 이목을 끄는 사건이 수도 베이징이 아닌 심양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1956년 4월 25일, 모택동 주석은 명령서에 수표하고 중국에 수감되어 있는 제일 마지막 일본전범을 심판, 처리할 데 대한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의 결의를 선고한다. 이 결정을 집행하기 위해 잇따라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과 요녕성 심양 두 지역에 일본전범을 심판하기 위한 군사법정을 각기 설립한다.

 잠깐 설명을 한다면, 일본이 전패하여 항복한 후 일부 일본 군인은 국민당 군대에 참가하여 국공내전에 참가했으며 나중에 인민해방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 부분의 일본전범이 도합 140명 되었으며, 산서성 태원의 전범관리소에 구금되었다. 1950년 7월, 소련은 중국 동북에 출병했을 때 체포했던 일부 전범을 중국에 송환했는데, 이 부분의 전범이 도합 969명으로 요녕성 무순(撫順)의 전범관리소에 구금되고 있었다.

 특별군사법정에는 판사만 아니라 변호사, 기록원, 도우미 등 인원이 필수적이었다. 군사법정 근무인원을 선정할 데 대한 특별과업은 요녕성 공안청(公安廳)에 의해 정법간부학교 심양분교에도 떨어졌다. 심양의 유일한 중앙기관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법률을 전공하고 일본어를 숙지했으며 중공 당원이고 '열사군인' 가족인 권덕원은 유력한 후보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특별군사법정에 파견된 권덕원은 시초에 법정의 음성 녹음을 담당하고 녹음기록을 자료로 편성했으며 그 후 방청객 입장권의 수취, 현장질서의 유지 등 기타 작업을 함께 수행했다.

 권덕원의 말을 빈다면 특별군사법정에서 그의 직무는 지금의 '법관(法官) 보조원'이었다.

  특별군사법정은 개정 그때부터 권덕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었다.

  심양 특별군사법정은 1956년 7월 괴뢰정부인 만주국의 총무청 장관 다케베 로쿠조(武部六藏) 등 일본 전범 36명에 대한 심판을 진행했다. 에피소드가 있다. 이때 다케베 로쿠조는 심각한 마비증으로 인해 좌립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래서 변호인의 신청에 의해 특별군사법정은 다케베 로쿠조가 병상 앞에서 심문을 받을 수 있다는 재정(裁定)을 내린다.

  벨이 처음으로 울리자 입장권을 소지한 방청객들이 법정에 들어섰다. 각 계층의 유지인사와 중앙의 간부 등 전국 각 지역에서 선정된 인물들이었다. 두 번 째 벨이 울리자 공소인과 변호사, 피고, 증인, 번역인원이 입석했다. 공소인과 변호사는 1:1 비례였다. 이어 피고가 들어섰다. 병석에 있는 1명을 제외한 27명이었다. 세 번째 벨이 울리자 판사 2명이 심판장을 앞세우고 들어섰다…

  와중에 변호인은 짙은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검은 구두를 신었으며 옆구리에 검은 가방을 끼고 있었다. 당시 국내에는 거의 양복을 입은 사람이 없었으며 이로 하여 그들의 복색은 법정 내외에서 더구나 유표하게 눈에 띄고 있었다.

  특별군사법정의 판결서는 주은래(周恩來) 총리가 직접 관리했다고 권덕원이 말한다. 주은래 총리는 판결서를 일개 사법문건이라기보다 외교문서 수준의 높은 요구를 하고 있었다.

  "문장부호 하나라도 틀린 게 있으면 국제적인 망신을 하는 거라고 말씀했지요."

  그래서 특별군사법정의 판결서는 60년 후에도 법률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권덕원은 인터뷰 도중에 여러 번 강조하고 있었다.

  증인석에 나선 대청국(大淸國)의 마지막 황제는 잊을 수 없는 모습으로 권덕원의 기억에 남고 있었다.

  "저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최대의 한간(漢奸)인 애신각라 부의(愛新覺羅․溥儀)입니다."

  부의가 증인석에 나서 한 첫마디의 말이었다. 1956년 7월 2일, 부의는 심양 특별군사법정에 처음으로 전범과 증인 2중 신분으로 등장했다

  바람에 날려갈 듯 가냘프고 껑충한 키, 잡아당긴 듯한 긴 목, 검은 테의 안경… 귀로만 들었던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는 그렇게 만주 땅에 살던 옛 '신민(臣民)' 권덕원의 눈에 뛰어들고 있었다.

  "'황제'는 말을 잘 했고 또 알고 있는 것도 많았습니다…" 권덕원은 이렇게 '황제' 부의가 남긴 인상을 더듬고 있었다.

  부의는 도쿄 극동 국제군사법정에도 증인으로 참석했다고 한다. 그때 부의는 그가 일본 천황의 '괴뢰'였으며 '전범'이 아니라고 고집했다고 한다. 또 중국에 돌아가면 사형으로 판결될까 우려되어 기어이 일본에 남으려 했다는 것. 그러던 이 '황제'는 무순 전범관리소에서 6년 동안 교양을 받고 심양 특별군사법정이 설립되던 1956년에는 드디어 '인간 개조'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심양 특별군사법정에서 부의가 증언한 것은 괴뢰 만주국 총무청의 차장 후루미 타다요미(古海忠之)의 죄행이었다.

  심양과 태원의 특별군사법정은 6월부터 7월까지 종국적으로 45명의 일본전범을 심판했다. 당시 공화국 정부의 재판 원칙은 "죄는 일본 군국주의에만 있고, 일본의 인민에게는 없다"는 것이었다. 45명의 일본전범은 모두 20년 이하의 유기도형에 언도되었으며 형기는 1945년 전패 후 구금된 시일부터 시작했다. 일본전범 재판에서 한명도 사형하지 않은 용서와 관용을 베푼 것은 중국공산당뿐이다.

  1956년, 공화국 정부는 또 죄질이 경하고 죄를 뉘우치는 표현이 좋은 1017명 전범의 기소를 면하고 전부 석방하여 귀국시켰다. 심양과 태원에서 판결을 받은 일본전범도 1964년 3월 전부 석방했다. (잠깐 설명을 드린다면, 공화국 정부가 수감한 일본전범은 도합 1,109명이지만, 수감 기간 47명이 사망했으며 이들은 석방자 명단에서 제외된다.)

  심양 특별군사법정의 심판이 끝난 후 권덕원은 부분적 일본전범의 귀국을 위한 무순-심양-천진(天津)행에서 안전보위, 생활 봉원, 통역 등을 겸한 요원으로 있었다.

  그때 일본전범을 수감하고 있던 무순 전범관리소는 세계적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전범 수감소로 되고 있다.

  무순 전범관리소는 대문밖에 전사 1명이 보초를 서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뜰에는 보초마저 없는 평화로운 경상이었다고 권덕원이 회억하고 있었다. 광장과 화원이 있었고 도서관이 있었으며 이발소와 의료소, 식당, 주방이 있는 등 오장육부가 구전했다. 이게 ‘요양소’이지 ‘감옥’이 맞느냐는 물음을 받을 정도였다.

  석방증서를 발급한 후 담당자는 전범의 가슴에 부착한 '전범명찰'을 뜯어냈다. 이때부터 그들은 일본전범이 아닌 외국 손님으로 변했고 그날 저녁 전범관리소가 아닌 호텔에 가서 국제 우호인사의 대우를 받았다.

  훗날 권덕원을 찾는 기자마다 묻는 물음이 있었다.

  "근간에 일본의 우경화가 아주 심한데, 그때 전범을 관대하게 처리한 게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거였죠."

  이런 질문을 권덕원은 무려 수십 번 받았고 또 수십 번 동일한 대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전범관리소를 '특수한 농장'으로 비유하고 있었다. "봄에 심고 여름에 길러서 마침내 풍작을 거둔 거지요."

 석방자들은 이듬해 도쿄에서 '중국귀환자연락회'를 설립하고 그들의 결집을 단행했다. 장정 제2조항은 연락회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중국침략에 참가하여 여러 가지 죄행을 저지른 사람들이 인도주의적 반성의 입장에 서서 침략전쟁을 반대하고 평화와 일중 우호에 기여하기 위한 취지"라고 명시한다. 1950년부터 1964년에 이르는 이 14년 동안 중국을 침략했던 1천여 명의 전범은 마침내 인성을 저버린 '귀신'으로부터 인간으로 재귀한 것이다. 정부의 용서와 전범 개인의 참회를 통해 처음으로 국제 전범을 성공적으로 개조한 기적이었다.

  네, 중국의 일본전범 특별군사법정에 있던 기록원 권덕원의 이야기었습니다.

  역사는 필경 기록입니다. 권덕원은 60여 년 전 발생되었던 그 사건의 기록원입니다. 어느 시점부터 그는 더는 단순한 기록원만 아닌 역사의 산 '화석'으로 되어 사람들에게 판독되고 있는 것입니다.

(코너 간주)

[청취자의 벗 편지 사연]

갑: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소개해드리는 ‘편지가 왔어요’ 시간입니다.

  오늘은 먼저 한국 부산에서 거주하고 있는 청취자 박경용의 편지 사연을 만나 보겠습니다.

[청취자의 편지]

안녕하십니까?

한국 부산에서 거주하고 있는 청취자 박경용입니다.

장마와 태풍 등의 영향으로 인해 한국과 중국 등지에서 피해가 급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부산에서도 7월 말에 갑작스런 폭우로 3명이 사망하는 등 피해가 발생하였습니다.

날씨가 좋아져서 이러한 피해가 줄어들기를 원합니다.

한편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도 계속 확산되고 있는데 청취자 여러분과 방송국 성원 여러분도 개인위생에 각별히 신경써주시고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도 좋은 방송 기대하겠습니다.​

2020년 8월 7일

네, 박경용 청취자는 우리 방송의 오랜 청취자인데요, 정말 오랜 만에 접한 소식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방송을 계속 관심, 청취하고 언제든지 좋은 의견, 소감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또 한국 대구의 구원모 청취자도 지난 주처럼 주간 지역 소식을 보내왔습니다.

8월 10일자 코로나19에 대한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 지역의 현황이었습니다.

이에 따르면 대구지역의 확진자는 8월에도 1명 내지 한 명도 확진되지 않은 날이 많았고, 경북지역의 확진자 역시 8월에도 계속 1명 내지 한 명도 기록하지 않은 날이 많다고 합니다. 기록된 확진자 1명도 대부분 해외유입 사례라고 합니다.

 

항상 현지의 소식을 보내 주고 있는 구원모 청취자에게 감사합니다.

네, 요즘 중국에서 대학입시가 끝나고 대학입학 통지서가 날아들고 있는데요. 이에 따라 즐거움과 기쁨과 함께 일부 걱정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중국 길림성 왕청의 이강춘 청취자가 보내온 지역 소식 내용입니다.

“요즘 중국에서 대학입시가 끝나고 대학입학 통지서가 날아들고 있다. 이에 따라 여기저기에서 "스승위로 연회"," 진학연 회"를 차리느라 열을 올리는 반면에 친척, 친구, 동사자들은 부조에 힘이 들어 아우성이라고 합니다.

자녀가 만족되는 대학에 가게 되면 부모들이 기뻐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진학연회》를 차려 친척, 친구, 동사자 지어 풋면목이나 아는 사람들에게까지 전화를 하거나 청첩을 보내 요청하는것은 너무 과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뒤에서는 이러쿵저러쿵하면서 불만을 토로하지만 《초청을 받고 참석하지 않으면 후에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하겠는가?》하는 생각에서 하는 수 없이 참가한다.

최저생활보장금에 의해 어렵게 살아가는 왕청 현성의 박선생은 7월말부터  이미 8차의 《진학연회》에 참석했는데 부조금이 벌써 2천원을 넘겼다고 한다.

몇년래 각급 정부에서는 이 문제에 중시를 돌리고 여러 가지 규정을 세웠지만 《진학 연회》의 규모는 갈수록 커지고 부조액도 100원, 200원, 500원씩 늘어나면서 연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사람들의 말밥에 오르고 사회문제로 되고 있는 《스승위로 연회》, 《진학연회》는 언제까지 지속될까.”

  이강춘 청취자는 소식의 말미에 대학에 입학한 자녀를 둔 사람이라면 남의 사정을 헤아리고 남들에게 부담을 안기지 않는다는 마음가짐으로 《진학연회》 차리기, 《스승위로연회》초청을 자제했으면 한다고 부탁했습니다.

  네, 자식들이 대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은 다 경사중의 경사인만큼 남들의 축하를 받고 싶은 심정은 다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이강춘 청취자가 말하다시피 그것이 남들에게 부담으로 안겨진다면 진정한 축하의 의미가 아닌 것 같습니다

  대학입학이 진정으로 즐거운 ‘진학연회’, ‘스승위로연회’가 되길 바라겠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갑: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8월 이달에는 지명과 관련한 퀴즈를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민과 관련한 연변 지명 퀴즈인데요.

  중국 연변의 국경도시 '도문'은 옛날 '무엇'이라고 불렸을까요.

  퀴즈 내용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중국 연변의 국경도시 도문은 옛날 '무엇'이라고 불렸을까요.

  여기에 설명을 드릴 부분이 있습니다.

  퀴즈를 보낸 청취자 가운데서 일부는 국경도시 ‘도문’의 옛날 이름을 강 두만강을 이르던 옛 이름에서 찾았는데요. 지명 ‘도문’은 두만강의 옛 이름인 통문(統門), 토문(土門), 두만(豆滿) 등에서 유래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두만강의 옛 이름이 국경도시 ‘도문’을 부르던 옛 이름인 건 절대 아닙니다. 국경도시 ‘도문’은 약 90년 전에 비로소 지은 지명입니다. 국경도시 ’도문‘이 설립되기 전에 이곳에는 다른 이름이 있었습니다.

  ‘도문’의 이 옛 지명은 7월의 [청취자의 벗] 시간에 방송한 기사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네,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갑: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갑: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프로편성에 진행에 박은옥,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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