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0-08-21 08:57:24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0년 8월20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8월 세 번째 주의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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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월

갑:

8월 20일은 양력 해의 232번째 날이며 올해 한해가 끝나는 날까지 133일 남았습니다.

이틀 후인 8월 22일은 처서입니다. 처서는 24 절기의 열네 번째 절기입니다. 처서는 또 '출서(出暑)'라고 하는데요. 무더위를 떠난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처서의 내림은 더운 날씨가 막고비에 이르렀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무더위가 차츰 사라지고 인제 곧 시원한 날씨로 넘어가겠지요.

이때엔 이미 가을 기운이 물씬 나게 기온이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대륙의 중원은 지금 한창 덥기만 하다. 대륙의 중원을 기준으로 해서 만든 24절기가 맞지 않는 현상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렇게 찾아오는 늦더위를 중국에서는 추로호(秋老虎)라는 재미있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늦더위의 표현에 초가을 늙은 호랑이를 등장시키는 상상력을 발휘한 것입니다.

해마다 오늘 8월 20일은 헝가리의 국경일이기도 합니다.

(고정 간주 6")

2. 지명과 연변

계속하여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이런 제목으로 지명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지명 왕청의 이야기입니다.

         "밀어로 통하는 동네 왕청"

  연변에만 통하는 밀어(密語)가 하나 있다. 바로 ‘왕청같은 소리’이다. 이 말을 들으면 연변태생이 아닐 경우 십중팔구 난색을 짓는다.

  “뭔데요? 도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해요?”

  그러면 좌중에는 금방 웃음소리가 터진다. 아이러니컬하게 진짜 ‘뚱딴지같은 소리’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왕청(汪淸)은 연변에서 외진 고장이다. 예전에 현지인들은 못난 이 고향 때문에 덩달아 똘똘치 못하다고 늘 핀잔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동문서답을 하거나 엉뚱한 말을 하면 대뜸 기다렸다는 듯 ‘왕청’이라는 감투가 씌워졌던 것이다.

  ‘왕청’ 같은 밀어 이야기는 차안에서 색다른 분위기를 띄웠다.

  “손님들은 뭐가 그렇게 재미나세요?” 택시를 몰던 오춘본吳春本 씨가 궁금한 듯 일행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춘본 씨는 현지에서 나서 자란 토박이였지만 조선족이 아닌 한족(중국인)이었다. 이 때문에 우리 일행의 대화 자체가 모두 뭐가 뭔지 모를 밀어로 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대충 화제의 내용을 설명하자 그도 피씩 웃음을 흘렸다.

  “우리 왕청이야 정말 한심한 시골이지요. 그런 소리를 들어도 무방합니다.”

  기실 왕청은 인적이 드문 황량한 고장이 아니었다. 상고시대에는 북옥저(北沃沮)가 생활하고 있었고 훗날에는 고구려와 발해국의 속지였다. 발해국이 상경 용천부에서 동경 용원부로 가는데 꼭 거쳐야 할 고장이었다. 바다를 건너는 국제통로인 ‘일본도(日本道)’도 왕청을 경유했다고 한다.

  옛날 이 천년의 교통요로에는 역참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왕청하와 가야하(嘎砑河)의 합수목 부근에도 합순참(哈順站)이라고 부르는 역참이 있었다. 합순(哈順)은 만족 말로 ‘잿빛의 물고기’라는 의미이니 예전에는 강에 물고기가 엄청 많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물고기가 발치에서 퍼덕거려도 합순참은 분명히 낚시터가 아니라 보루였다. 보루를 만족 말로 ‘왕흠(旺欽, 왕친)’이라고 한다. 왕흠의 원래의 뜻은 ‘단단하여 창으로 꿰뚫을 수 없는 갑옷’이며 보루라는 의미는 여기서 파생된 것이다. 아무튼 이에 따라 합순참을 흘러 지나는 강도 왕흠하(旺欽河, 왕친하)라고 불렸던 것이다.

  선통(宣統) 2년(1910), 청나라 정부는 역참 부근에 현성을 설치하려고 하며 현 이름을 ‘왕흠(왕친)’이라고 지었다. 정작 현성은 사신들의 행렬처럼 역참을 지나치고 내처 남쪽으로 내려가서 가야하의 기슭에 자리를 잡는다.

  가야하는 만족 말로 ‘채주하(采珠河)’ 즉 진주를 채집하는 강이라는 의미이다. 금나라 때는 잔준하(孱蠢河), 청나라 때는 갈합리하(喝哈哩河)라고 불렸다. “길림통지(吉林通志)”는 또 ‘13도(十三道)의 가야하’라고 기록하고 있다.

  뒤미처 왕흠이라는 지명은 새롭게 탈바꿈을 한다. 옛 지명의 공경할 흠(欽)을 비슷한 음의 맑을 청(淸)으로 고쳤던 것. 그런데 만족의 발상지인 요녕성 흥경(興京)의 동쪽에 이미 동명의 왕청(旺淸) 변문(邊門)이 있었다. 그래서 첫 글자인 성할 왕(旺) 역시 넓을 왕(汪)으로 고쳐 지금의 이름인 왕청(汪淸)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어쨌거나 본연의 고장을 잊을 수 없었던가 보다. 현성은 1938년 마침내 왕청하 기슭으로 돌아간다.

  이때 현성이 자리한 곳은 옛 역참 부근의 대두자천(大肚子川)이었다. 대두자천은 훗날 현성의 거리 이름으로 전락했지만 지명지(地名志)의 기록에 따르면 원래는 하곡河谷 평지의 가운데가 넓다는 의미라고 한다. 왕청하(汪淸河)가 벌을 가로 질러 흐르는 모양을 형용한 지명이라는 것.

  오춘본 씨도 그렇게 전해 들었다고 한다. “대두자천은 배때기가 큰 강이라는 의미가 아닙니까?”

  그 역시 중국말 그대로 뜻풀이를 하고 있었다. 공교롭게 동명의 지명은 이웃한 훈춘에도 나타난다. 그러나 이 대두자천은 만족 말이며 ‘사냥꾼이 살던 마을’이라는 의미라고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왕청의 대두자천이 ‘사냥꾼이 살던 마을’일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올 법 한다. 봉금(封禁)으로 황폐한 이 지역에는 19세기 말부터 비로소 인가가 생겼다. 두만강 저쪽의 조선인들과 관내의 중국인들이 이곳에 와서 정착했다. 그들은 땅에 화전을 일궜으며 산에 올라 삼을 캐고 수렵을 했던 것이다.

  그때 사냥꾼의 대오에 조선인이 구경 얼마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조선인은 개발 초기부터 상당한 규모를 이루고 있었다. 1910년 말 일본의 조사 자료에 의하면 조선인이 도합 1660가구, 9890명이 있었다. 그 지역을 나누어 보면 배초구(百草溝)와 목단천(牡丹川) 일대에 270가구의 1350명, 대두천 일대에 330가구의 1800명, 양수천자(凉水泉子) 일대에 730가구의 4940명, 하마탕(蛤蟆塘) 일대에 70가구의 450명이 있었다고 한다. 지난 세기 30년대부터 집단이민이 시작되면서 조선인들은 더구나 급격히 늘어났다.

  비록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을 선포한 후 조선인이 대량 귀국하는 등 파동이 있었지만 조선인 부락은 여전히 적지 않았다. 왕청골(汪淸溝) 남쪽의 신흥향(新興鄕)은 10개 정도의 마을로 이뤄졌는데 대부분은 조선인 부락이었다고 한다. 왕청골은 훗날 도로가 길게 지났다고 해서 장령(長嶺)이라고 개명하였다.

  조선인 부락 이야기가 나오자 이상윤(66)씨는 도리머리를 저었다. “그게 언제 있은 이야기인데요?”

  이상윤 씨는 한때 신흥향에서 부향장으로 있었다. 1986년 현성에 전근하면서 신흥향을 떠났다. 그 무렵 신흥향에 조선족 부락은 벌써 몇몇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1950년대 말부터 관내에서 한족이 대량으로 밀려왔지요.”

  오춘본 씨의 부친은 바로 그 무렵 왕청에 이주했다고 한다. 그들은 워낙 산동성의 빈주(濱州)에서 살았다. 인연이라면 기이한 인연이었다. 빈주는 한나라 때의 발해현(渤海縣)으로 발해국의 국명과 연줄을 갖고 있는 지방이다.

  “고향마을의 토질은 알칼리성이라서 농사가 잘 안되었다고 합니다.”

  마을에서 20여 가구가 함께 이삿짐을 둘러멨다. 바다 건너 변강의 땅은 그들에게 희망의 땅으로 되고 있었다. 이때 그들은 정부의 ‘변강지원’이라는 명분을 앞세우고 있었다. 이민은 도도한 물결을 이뤄 장성을 넘었다. 예전의 ‘관동돌입(闖關東)’이 재현되고 있었다. ‘관동돌입’은 근대사상 산동, 하북 지역의 가난한 농부들이 만주로 대거 이민한 운동이다. 관동(關東)은 산해관(山海關) 너머 만주 땅을 가리키는 말이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더니 과연 그런데 없었다. 지난 세기 90년대부터 발해기슭의 옛 고향은 부자동네로 거듭났다. 새우 등 양식업으로 집집마다 황금 낟가리에 앉았다. 천대를 받던 땅은 ‘금’을 낳는 ‘거위’로 되었다.

  “우리 이모와 고모는 모두 산동에 계셔요.” 오춘본 씨의 말에는 발해기슭의 소금기가 짙은 해풍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는 듯 했다.

  그는 얼마 전 산동에 다녀왔다고 한다. 친척들은 모두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그분들이 아버지를 따라 나서지 않은 게 다행이지요.”

  그러나 오춘본 씨에게 산동은 그저 아버지의 옛 고향일 따름이었다. 산동에는 그의 호적이 없었고 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느덧 오씨네는 가계도에 수풀을 그리고 있었다. 발해기슭을 떠날 때 몇몇에 불과하던 그들은 어느덧 왕청에서 수십 명의 대가족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이처럼 한족은 골물처럼 불어나 반수를 넘고 있었지만 조선족 역시 상승세를 그어 10만 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시바람이 불면서 조선족 인구는 다시 곤두박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왕청은 시골이기 때문에 다들 안착을 하기 힘들다는 오춘본 씨의 해석에 자못 수긍되었다. 현성에 승강기를 놓은 아파트가 일떠선 지 겨우 3,4년 정도라고 한다. 오죽했으면 ‘현장(縣長) 어른의 연설’이라는 밀어가 생겼을까. 이 밀어는 왕청 시가지를 가로지른 대로를 이르는 말이었다. 고작 수백 미터에 달하는 이 대로는 한때 현성에서 제일 곧고 긴 길이었다. 길 양쪽에는 또 어둡고 칙칙한 건물들이 늘어섰다. 말 그대로 무미건조하고 지루한 ‘현장 어른의 연설’을 상기시키는 풍속도였다.

  이상윤 씨도 퇴직한 후 고향인 왕청을 떠나 연길 시가지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었다. 현지에서 다른 고장으로 이사하는 중국인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어쩌면 나무가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듯 도시화의 자연스런 흐름일지 모른다. 물도 냇물을 버려야 강으로 간다고 하지 않던가. 왕청하도 나중에 가야하에 흘러들며 가야하는 또 부르하통하와 합류한다.

  드디어 강과 강이 만나는 곳에는 홀연히 마을 하나가 나타난다. 굽은 강이라는 의미의 곡수(曲水)이다. 곡수는 물 위에 또 하나의 ‘밀어’를 띄워 올리고 있다.

  곡수는 1940년 기차역을 세울 때 가야하가 부르하통하에 흘러드는 모양을 따서 지은 마을 이름이다. 물길이 이곳에서 하나로 합친다고 해서 합수평(合水坪)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기실 예전에 조선인들은 ‘모둠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순 우리말 지명이었다. 그러나 집단기억에 소실된 지 오랜 이 지명은 언제인가부터 누구도 알아들지 못할 밀어로 되고 있는 것이다.*

갑:

네, 밀어 같은 지명 왕청, 실은 만족어에서 비롯된 옛 이름이었다는 이야기었습니다.

노래 한곡 듣고 다음 코너로 이어가겠습니다.

(노래 한곡)

[청취자의 벗 편지 사연]

갑: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소개해드리는 ‘편지가 왔어요“ 시간입니다.

오늘은 먼저 연변조선족자치주 노인절 '8.15'와 관련한 청취자들의 편지 사연을 만나 보겠습니다.

8월 15일, 노인절을 경축하기 위해 왕청현 교육국노인협회(총회)에서 "80세 고령 노인 경축식"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강춘 청취자가 전해왔습니다.

이 경축식에서 김대봉 노인협회 회장은 "올해는 전염병으로 인해 유난히 힘든 해지만 노인들에게 뜻깊은 노인절을 선물하고 싶었다”며 80고령 노인들에게 존경의 마음이 담긴 선물을 드렸다고 합니다.

이강춘 청취자는 또 경축식에서왕청2교, 왕청1중, 왕청2중, 현 교육국 노인들이 대합창 <<나의 조국>>,<<연변인민 모주석을 노래하네>>, 조선족 고전무용 <<노들강변>> 등 다채로운 문예공연이 이어져 명절의 분위기를 고조에로 이끌었다고 전했습니다.

8.15 노인절에 즈음하여 14일 길림성 연길시 연변의 한 혼례청에서 성대한 경축모임이 있었습니다. 이성복 청취자가 소식을 보내왔습니다.

이 혼례청은 항상 애심활동에서 선두모범 역할을 발휘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또 연길시 환경 미화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합니다.

이날 혼례청은 노인 대표 150여명을 모시고 그들에게 명절을 즐겁게 쇠드렸다고 이성복 청취자가 전해왔습니다.

8.15 노인절을 맞으며 중국공상은행 연변지사에서도 행사를 가졌다고 박철원 청취자가 전해왔습니다. 14일 중국공산은행 연변지사는 <화상 연환모임>으로 이퇴직간부들에게 기쁨을 선사하며 즐거운 하루를 보내게 했다고 합니다.

노간부관리센터 실무진들은 코로나19 방역으로 인해 노인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없는 실정을 감안해 화상연환모임을 기획하여 노인들이 장끼도 자랑하고 서로의 정을 나누는 장을 마련했습니다.

전국 각지와 해외에서 휴양하는 노간부 모두가 화상으로 한자리에 모여 즐거움을 나누는 새로운 형식의 연환 모임은 긍정적 에너지를 전파하며  훌륭한 정보를 교류하는 즐거운 장이 되었다고 박철원 청취자가 소식을 전했습니다.

박철원 청취자는 또 8월의 퀴즈답안을 보내왔습니다. 박철원 청취자는 방송프로에 새롭게 연변지명 유래가 소개되면서 젊은이들은 모르던 것을 알게 되어 신기하게 여기며 노인들은 예전에 많이 부르던 이름들인데 점점 잊혀 가고 있는 현 시점에 새로운 추억으로 된다면서 방송을 듣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도문은 박철원 청취자가 어린 시절 학교를 다니던 고장이라고 하는데요, 연변의 첫 한어사범학교가 도문에 있었다고 합니다. 이 고장에는 전설이 많았습니다. 박철원 청취자는 도문에는 중조친선의 이야기도 적지 않았다고 전했습니다.

네, 한국의 구원모 청취자는 8월 셋째주 대구 경북의 코로나19 현황을 전하면서 아래와 같은 편지를 전해왔습니다.

"안녕하세요?

2020년 8월 6일에 방송된 <청취자의 벗> 프로그램을 잘 들었습니다.

연변에도 [와룡]이라는 지명이 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제가 거주하고 있는 대구에도 [와룡]이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저희 집에 앞에 있는 큰 도로의 도로명이 와룡로이고, 멀리 있는 뒷산의 이름도 와룡산입니다.

[와룡산]은 용이 누운 모습처럼 생겼다고 하여 이름이 붙여졌으며, 형태가 분화구 모양으로 와룡산이 가운데 분지를 빙 둘러싼 형태입니다.

다만, 북쪽으로 넓게 터져서 말발굽 같은 형상입니다. 얼핏 보면 화산처럼도 보이는데, 실제로는 능선 부분이 변성암이고 가운데 부분이 화강암이기 때문입니다.

오랜 지질학적 기간이 지나면서 화강암은 쉽게 깎여서 사라지고, 단단한 변성암만 남아서 현재의 형태를 이룬 것입니다.

[와룡산]에서 제가 태어나기 전에 국내 3대 영구 미제 사건인 대구 성서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 즉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저희 집 옆동네에 용산동이 있는데, 달성군 다사읍을 관류하는 금호강변에 자리잡고 있는데, 다사읍 방천리과 서재리를 경계 짓고 있습니다. 이 산과 다른 산 셋을 합해서 보면 마치 용이 엎드려 있는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와룡산이라 하였고 그 밑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용산동이라고 이름 지어졌다고 합니다.

연변과 한국 대구에도 비슷한 지명이 있다는 것에 대해 놀랐습니다."

네, 지난 한주 받은 편지 사연들을 간추려 말씀드렸습니다.

[고정 코너]

[퀴즈 한마당]

갑: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그럼 계속하여 8월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민과 관련한 연변 지명 퀴즈인데요. 지난 7월의 [청취자의 벗] 시간에 방송한 기사에 이 퀴즈의 답이 들어 있습니다.

  네, 중국 연변의 국경도시 '도문'은 옛날 '무엇'이라고 불렸을까요.

  퀴즈 내용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중국 연변의 국경도시 도문은 옛날 '무엇'이라고 불렸을까요.

  네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갑: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갑: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프로편성에 진행에 박은옥(갑),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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