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仙花
2020-08-27 17:19:36 출처:cri
편집:朴仙花

중국 과거제도의 형성과 발전

중국 소설 “유림외사”를 읽은 사람은 중국 봉건왕조의 과거제도에 대해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이 소설은 청조 후기 과거제도가 지식인의 사상에 일으킨 독해를 규탄하고 있다. 과거제도는 과학문화의 발전을 심각하게 저애했고 근대 중국 자연과학의 낙후를 초래한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라는 평가가 있다. 과거제도는 과연 소설에서 묘사했듯이 악영향만 일으켰을까? 그 답은 과거제도의 형성과 발전에서 알 수 있다. 

중국 고대역사에서 과거제도 발전의 궤적을 살펴보면 지식인들의 사상을 독해한 폐단은 후세인들이 과거제도를 비난하는 주요 원인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수양제가 과거제도를 창립한 최초의 좋은 지향은 부인할 수 없다. 당시 수양제는 나라의 장원한 발전과 중앙정권의 확고함을 위해 과거제도를 창립했다. 위진(魏晉) 시기 이래 관원은 대부분 세습이었고 중앙 혹은 지방에서 관원을 임용할 때 전국 각지의 문벌귀족 중에서 선발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벌귀족은 재능이 있든 없든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반대로 지식과 재능이 있으나 신분이 낮은 사람은 관직에 임할 수 없었다. 수많은 선견지명이 있는 관원들은 이런 상황을 보고 수양제에 이러한 폐단을 제거할 것을 제안했으며 수양제는 결국 과거시험으로 인재를 선발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중국 과거제도가 정식 탄생했다. 과목별로 취사(取士)했기에 “과거”라 불렀다.

당나라때에 이르러 과거제도의 발전은 “완벽”이라는 단어로 형용할 수 있었다. 당태종, 무측천, 당현종 등은 모두 과거제도를 크게 지지했다. 송나라 때 무(武)보다 문(文)을 중시했기에 문관을 대폭 채용했으며 진사의 합격률을 높였다. 하지만 명나라에 이르러 과거시험은 팔고취사(八股取士)제도를 취하는 등 틀에 박힌 형식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청나라 말기 과거제도가 지식인에 일으킨 피해는 최고에 이르렀으며 지식인들의 사상을 심각하게 제한했다.

과거제도의 천여년간 발전여정에서 알수 있다싶이 소설 “유림외사”의 묘사처럼 과거제도는 결코 악영향만 일으킨 것은 아니다. 과거제도는 특정된 환경하의 봉건정권을 다소 다지는 역할을 해서 봉건사회의 진보와 발전을 추진했다.

번역/편집: 박선화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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