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东光
2020-12-29 17:10:46 출처:cri
편집:金东光

포장화심(包藏禍心)

图片默认标题_fororder_7.包藏祸心

◎글자풀이: 쌀 포(包 bāo), 감출 장(藏 cáng), 재화 화(禍 huò), 마음 심(心 xīn).

◎뜻풀이: 나쁜 마음(못된 생각)을 품다.

◎출전: 춘추•로(春秋•魯) 좌구명(左丘明) 『좌전•소공원년(左傳•昭公元年)』

 

◎유래: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초(楚)나라의 북쪽에 이웃한 정(鄭)나라는 그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초나라와 화목하게 지내려는 목적으로 대부(大夫) 공손단(公孫段)의 딸을 초나라의 영윤(令尹)인 공자 위(公子圍)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기원전 541년 봄, 공자 위가 정나라에 공손씨를 맞이하기 위한 영친(迎親)을 떠났다. 그러나 영친대오는 무장을 갖추고 위풍이 당당한 군사들이었다. 초나라는 영친의 기회를 틈 타 정나라를 병탄하려는 심산이었다.

정나라 상경(上卿)인 자산(子産)은 초나라의 간사함과 영악함을 잘 알고 있었다. 공자 위가 수많은 군사들과 함께 영친을 온다는 소식을 들은 자산은 초나라의 음험한 속셈을 알아 차리고는 학식이 깊고 언변이 출중하며 외교적인 경험이 풍부한 자우(子羽)를 보내 이들을 대처하게 했다.

자우는 도성밖에 나가 공자 위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국의 도성이 협소하여 이처럼 방대한 영친대오가 머무를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 성밖에서 한곳을 정해 혼례를 치르도록 합시다.”

이 말을 들은 공자 위가 몹시 화가 났고 태재(太宰) 백주리(伯州犁)를 보내 자우에게 말을 전했다. “귀국의 국군은 자기의 존엄을 낮추고 아국의 영윤 공자 위에게 공손단의 여식을 부인으로 맞을수 있는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만약 황폐한 이 야외에서 혼례를 치른다면 이는 귀국 국군의 은혜를 풀더미속에 방치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아국의 영윤 공자 위는 다른 대신들과 같은 반열에 설수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공자 위는 조상님들을 속이고 모독한 것으로 되니 더는 초나라의 신하라 할수 없게 됩니다. 이는 공자 위를 너무나도 심하게 경멸하는 처사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우는 전혀 꿇리지 않고 직언했다. “태재대인, 우리 정나라는 나라가 작지만 나라가 작은 것이 잘못일수는 없습니다. 소국이 너무나 대국에 의존하여 경계심을 잃는다면 그것이 바로 잘못일 것입니다. 많은 소국들이 대국을 등에 업고 자신의 평안을 도모하려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허나 일부 대국은 겉으로는 우호적인 척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악의를 품고 암암리에 소국을 멸하려 합니다. 겉으로는 강대한 이런 대국은 자신의 총명을 자부하지만 사실은 매우 아둔하고 가련한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의 소국이 대국에 의존하다가 오히려 그 대국에 의해 멸망된다면 다른 여러 작은 제후국들이 경계심을 더 크게 가지고 대국의 겉발린 말을 믿지 않을 것이라는 도리를 모릅니다. 우리 정나라도 과거의 고난속에서 경험과 교훈을 얻었습니다. 공자 위가 성밖에서 혼례를 치르는 일에 대해 우리도 깊은 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허나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만약 귀국의 군대가 성안에 들어온다면 정나라는 이 땅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태재께서 저보다 더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자우의 말은 초나라의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 이들은 “영친기회를 타 정나라를 멸하려”던 음모가 드러났고 정나라가 이미 준비를 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초나라는 하는수 없이 기습계획을 포기하였고 군대를 성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기로 약속했으며 이때에서야 정나라는 혼례를 성안에서 치르는데 동의했다. 이해 정월 보름에 공자 위가 정나라의 도읍에 들어가 공손씨와 혼례를 치르고는 곧바로 초나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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