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仙玉
2021-06-16 10:42:45 출처:cri
편집:李仙玉

마오쩌둥의 어려운 선택은?

천두슈(陳獨秀)와 리리산(李立山)이 중국공산당을 코민테른으로부터 독립시키고 중국의 길을 걷는데 실패했지만 마오쩌둥(毛澤東)은 성공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바로 천두슈와 리리산은 중국혁명의 실제상황을 벗어난 지도방침을 정했고 마오쩌둥은 중국혁명의 실제상황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방침과 노선을 선택할 때 항상 발 밑의 땅에 뿌리를 깊이 내렸다. 팔칠회의(八七會義, 제1차 국내혁명전쟁 실패 후 1927년 8월 7일 중공중앙정치국이 개최한 회의, 천두슈의 잘못을 바로잡고 그의 당내 직무를 해임, 새로운 임시 중앙정치국을 선출하고 토지혁명과 무장투쟁의 총체적 방침을 확립한 회의) 후 추수(秋收) 봉기를 조직할 때 마오쩌둥은 실제상황에 근거해 방침을 적시적으로 조정했다.

추수봉기 기존의 방향은 대도시인 창사(長沙)를 공격하는 것이었으나 공산당 군대의 실력으로 창사공격전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인정한 마오쩌둥은 창사를 포기하고 징강산(井岡山)으로 향했다. 이로 인해 마오쩌둥은 팔칠회의에서 선출된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해임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오늘 이 사건을 돌아보면 당시 중국혁명의 실제상황에서 마오쩌둥이 군대를 이끌고 징강산에 올랐기 때문에 중국혁명이 중국의 실제에 부합하는 길을 찾게 되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중국이라는 땅에 뿌리를 내린 마오쩌둥은 근로자와 농민으로 구성된 공농 무장력(工農武裝)을 할거시키고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며 궁극적으로 도시를 쟁취하는 중국혁명의 정확한 길을 선택했다. 공농무장력이 많은 농촌에 분산되어 농촌근거지를 세웠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은 경제적으로 코민테른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났고 중국혁명도 진정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이는 중국혁명에 대한 마오쩌둥의 중대한 기여이다.

중국의 많은 시골에 설립된 소비에트 지구에서는 경작지를 농민들에게 배분해주는 토지정책을 시행해 중공의 경제독립에 기반을 닦아주었고 상하이 등 도시의 공산당 기관에 경비를 제공하기까지 했다. 자체의 상공세수와 독립된 전세(田稅)를 보유한 소비에트 지구는 재정의 자급자족을 실현해 코민테른의 자금지원이 없이 정권의 독립적인 운행모델을 보유한 것이다.

상하이의 조계지에서 코민테른과 소련의 도움으로 수뇌부를 설립한 공산당정권이 궁극적으로 낙후한 산악지대에 뿌리를 내린 것은 중국혁명의 일대 특징이다. 만약 당시 정권의 수뇌부가 대도시에 집중되지 않았더라면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선진적인 사상체계를 형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동시에 만약 당시 공산당의 공농무장이 가난하고 낙후한 산악지대에 분산되지 않았더라면 충분한 보급과 견강한 군인을 보유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마오쩌둥은 마르크스주의와 중국혁명의 실제상황을 접목해 독립적으로 무장투쟁을 진행하고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며 궁극적으로 도시를 쟁취하는 정확한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 길은 중국혁명은 적으로부터 독립하는 동시에 벗으로부터도 독립해야 함을 알려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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