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正善
2021-09-06 11:06:38 출처:cri
편집:朱正善

위구족의 문화와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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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문자:

위구어에는 주로 두갈래가 있다. 하나는 서부위구어로 숙남(肅南)위구족자치현의 서부에서 주로 사용하며 알타이어계 돌궐어족 동부헝그리어갈래에 속한다. 다른 한가지는 동부위구어로 숙남위구족자치현의 동부에서 주로 사용하고 알타이어계 몽골어족에 속한다. 서부위구어는 옛 돌궐어로 알려지며 지금까지도 고대돌궐어와 회골어의 단어들을 보류하고 있으며 특히 수량사에서 돌궐인들의 옛 숫자표기를 보류했다. 동부위구어는 몽골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특히 단어와 음성특징으로 볼 때 13,14세기 고대몽골어에 가깝다는 평을 받는다. 동부와 서부위구어는 서로 다른 점이 있지만 일부 공동의 단어를 가지고 있으며 이런 단어는 돌궐어 혹은 몽골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와 동시에 위구어는 중국어와 티베트어의 단어들을 대량 차용한 특징도 보인다.

◎신앙:

위구족은 동부로 이주하기전에는 샤먼교와 마니교를 신봉했다. 동부이주후에는 티베트불교 거루파(황교)를 신앙했다. 명나라 말 위구족은 본 민족의 최초황교사원인 고불사(古佛寺)를 세웠다. 청나라 때 황교는 위구족 거주지역에서 전성기에 달했으며 선후로 경요(景耀), 강륭(康隆), 전륜(轉輪),연화(蓮花) 등 9개 절을 세웠고 이런 사원은 각 부락에 분포되어 있었다. 위구족 사원은 규모가 크지 않았으며 최대 규모의 강륭사는 최고로 5백여명 승려들이 있고 나머지 여러 절은 대부분 승려가 2,30명 규모였고 승려가 제일 적은 절은 일여덟명이었다. 사원 내부의 조직은 비교적 느슨했으며 일부 사원에는 생불과 칸부, 법대가 있었으나 일부 절에는 승관이나 제경이 있을 뿐이었다. 이들은 종교명절이나 방회(放會) 때 사원에 가서 송경하는 외에 평일에는 대부분 목축업이나 농업에 종사했다. 규모가 큰 몇개 절에서는 해마다 정기적으로 정월대법회, 4월대법회, 6월대법회, 10월대법회를 열었으며 매달 보름이면 소법회를 열기도 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창건전에 사원은 여러 부락의 종교활동중심인 동시에 정치경제중심 역할을 했다. 사원의 관리층과 부락의 두령들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부락두령은 마을의 일부 중대사들을 사원의 관리층과 의논하군 했다. 청해주사(靑海主寺)는 종교권리를 이용해 위구족 부락두령의 세습비준권을 장악하기도 했다.그 예로 위구족의 “칠족황번총관(七族黃番總管)”은 먼저 청해 광혜사 주지의 비준을 받은 후 다시 지방 주재 관아의 위임을 받는 식이었다.

위구족은 티베트불교를 믿으면서도 오랜 신앙도 유지한다. 그중 “칸덴게르(汗点格爾)", 큰 하늘에 대한 숭배가 대표적이다. 동부와 서부 위구어를 사용하는 신자들이 “칸덴게르”를 모실 때 요후르어를 사용하는 전통으로 볼때 이는 원시적인 샤먼교에서 유래했음을 알수 있다. “덴게르”는 위구어로 “하늘”을 지칭하며 “칸”은 바로 카칸 최고수령을 뜻한다. 위구족은 칸덴게르가 자신들을 보우해 재난을 피하고 일년 사계절 태평하고 길한 생활을 보장해준다고 여긴다. 여기서 말하는 칸덴게르의 구체적인 발현을 보면 가는 밧줄의 윗쪽에는 여러가지 가축의 털과 여러가지 색상의 천조각을 달고 아랫부분에는 흰천으로 된 작은 주머니를 달아 놓으며 주머니에는 탈곡을 하지 않은 곡식과 탈곡을 한 오곡을 넣은 후 장막내의 오른편 윗쪽에 모셔준다.

◎건축문화:

중화인민공화국 창건전에는 유목생활의 편의를 위해 위구족인들은 주로 장막을 치고 거주했다. 위구족의 장막은 소털 혹은 양털을 짜서 만든다. 장막을 세울 때는 양지바른 쪽을 향해 바람을 피할수 있는 곳을 선택하며 대부분 남향이다. 잘 사는 집의 장막은 크게 세우며 그 중앙에 부뚜막을 지어 조리와 난방용으로 쓴다. 과거에는 돌 세개를 놓고 그위에 솥을 걸어놓았으며 이를 위구어로 쟈거스(加格斯)라고 불렀다. 후에는 돌과 흙으로 부뚜막을 만드는 방식을 취했다. 1958년 후에는 점차 연통을 갖춘 철난로를 사용했다. 장막의 꼭대기부분에는 작은 창문을 내어 낮에는 열어놓고 저녁 혹은 비나 눈이 오는 때는 닫아 놓았다.

1958년부터 숙남현 목축구의 주민들은 기본상 정착생활을 시작했다. 노인들은 평안한 생활을 할수 있었고 어린이들은 가까운 곳의 학교에 등교할수 있게 되었다.

◎음식문화:

위구족 목축민들의 음식은 수유차(酥油茶), 참파(糌粑)와 건우유 등 유제품이 위주다. 매일 아침과 점심, 오후에 수유우유차를 마시고 저녁에는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양고기떡국이나 쌀밥을 함께 먹으며 때로는 만두와 꽃만두를 먹을 때도 있다. 손으로 양고기를 집어먹는 요리와 고기순대, “즈궈깐(支果干)”은 위구족인들이 가장 즐겨 먹는 특색음식이다. 손으로 양고기를 집어먹는 요리는 금방 삶아낸 고기를 먹는 것이 통례인데 그 입맛이 신선하고 연하다. 고기순대는 양고기를 탕쳐서 넣고 여기에 미숫가루와 조미료를 함께 넣어준다. 양간과 양의 폐 등 내장을 잘게 썰고 여기에 미숫가루와 마늘, 파 등을 넣은 후 기름에 튀겨 둥글게 만드는게 이 요리가 바로 “즈궈깐”이다.

◎문학:

위구족은 민간 구두문학이 발달했으며 여기에는 역사전설, 민간이야기, 서사장편시, 민가 등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

만간이야기는 그 내용이 풍부하고 언어가 생동한데 널리 전해진 작품으로는 “모라(莫拉)”, “명궁의 기러기사냥”, “진주사슴” 등을 꼽을수 있다. 제일 유명한 서사장편시로는 “황다이첸(黃黛琛)”이 있는데 한 처녀가 봉건사회의 억혼으로 겪은 불행한 처지를 다룬 이야기이다.

민가는 위구족이 가장 즐기는 일종의 구두문학형식으로 그 내용이 다양한다. 생산노동을 다룬 풀베기, 풀쌓기노래, 방목노래, 낙타끌기노래 등이 있으며 혼인예절과 관련되는 노래로는 두면가, 이별가, 손님맞이노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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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위구족은 조형예술에 강하며 주로 실용공예미술을 잘 활용한다. 이들은 자체로 만든 털주머니와 펠트, 말고삐에 여러가지 수려한 도안을 엮는다. 위구족 여성들은 한족의 자수공예를 배워 여자들의 옷깃이나 옷소매, 헝겁신 등에 화초와 벌레, 새, 가축 등을 수놓기도 하는데 그 색상이 잘 어울리고 형상이 살아 움직이는 듯 하다.

명화(明花)지역의 위구족남자들은 나무뿌리조각에 능하다. 이들은 사막에서 자라는 나무의 뿌리를 원시적인 모양새로 가공을 하고 여기에 맑은 칠을 해서 하나의 예술품으로 만든다.

◎무용:

위구족의 무용에는 단체무, 이인무용, 남녀독무, 마상무용(馬上舞) 등 여러가지가 있다. 이런 춤들은 풍작이나 명절을 경축하거나 혼례, 수렵, 종교행사 등 내용을 담고 있다. 단체무는 그 형식이 다양하며 북의 반주와 노래소리가 어우러지는 와중에 남녀노소가 원모양으로 둘러서며 그 중앙에는 우등불을 지피거나 사냥물을 놓는다. 사람들은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천천히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데 절주감이 강한 편이다. 이인무는 주로 생활과 생산노동과정의 일부 장면을 재현하고 남녀독무는 도약동작이 많은데 이는 위구족의 오랜 도약방식의 춤을 보류한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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