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正善
2021-10-05 15:48:31 출처:cri
편집:朱正善

로바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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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바족은 중국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소수민족이다. 총 인구가 약 60여만명으로 집계돼있지만 중국 관리구역 내에서 생활하는 로바족은 실제로 2300명 밖에 안된다. 나머지는 인도 관리구역 내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자세한 통계가 어렵다고 한다.  따라서 로바족은 중국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소수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로바족의 주요 거주지는 아로장포강 대굽이 서쪽의 고산협곡지대로 주로 티베트 동남부의 뤄위(洛渝)지역에서 살고 있으며 일부가 미린(米林)과 모퉈(墨脫), 지위(察隅), 룽즈(隆子), 랑현(朗顯)일대에 살고 있다. 때문에 티베트족은 이들을 ‘로바’, ‘남방사람’으로 호칭한다.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후 이들의 실제상황과 본 민족의 염원에 따라 이 민족을 로바족으로 정식 명명하고 1965년 8월에 단일 민족으로 확정했다.

로바족은 자신의 언어가 있으며 문자는 티베트문을 사용한다. 로바어는 한어-티베트어계 티베트미얀마어족에 속하며 이들은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구두전설로 민족의 문화바통을 이어가고 있다.

로바족의 기원을 알아보자

오늘 날 로바족의 주요 거주지인 뤄위지역은 예로부터 중국 티베트의 한 부분이었다. 상고시대부터 로바족 선민들은 이 일대에서 티베트족, 몬바족 선민들과 함께 히말라야 산간지대의 상고문명을 일구어왔다.

로바족은 자신의 문자가 없기 때문에 본 민족의 역사에 대한 문헌기재도 없다. 티베트문과 한문의 기재에도 로바족의 기원과 역사에 대한 기술이 아주 드물다. 비록 20세기 70년대 이후 중국의 일부 고고학자들이 히말라야 산간지대에서 소중한 고고학 발견을 했지만 로바족 선민들의 활동궤적을 알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때문에 로바족의 기원문제는 히말라야 산간지대에서 전해진 각 부락의 민족 전설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관점은 “로바족이 청해-티베트 고원 동남부 일대의 오랜 집단 중의 한 갈래 또는 여러 갈래에서 뻗어져 나왔으며 역사적으로 로바족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주한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로바족의 신화전설, 티베트족의 고대 문헌 기재 그리고 고고학 발견에 대한 분석에 근거해 로바족이 뤄위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티베트 고원 동부의 다수의 집단이 융합하는 과정에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로바족과 티베트족 선민간의 왕래는 토번왕조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티베트문 경전 <홍사>(紅史)에 송첸캄포(松贊甘布) 시기의 토번강역을 기술하며 남부의 뤄위가 거론된다.

명나라 말, 청나라 초기 겔로파(格魯派)가 티베트 지방정권을 점차 장악하면서 뤄위지역에 대한 관리를 한층 강화한다. 1680년에는 5세 달라이가 메이러(梅惹)라마에게 문서를 보내 “뤄위인들 역시 우리 통치하에 놓인다”고 분명히 밝혔다. 당시 청나라 조정의 책봉을 받은 티베트 지방정부는 벼슬을 하사하거나 파견 위임하는 등 방식으로 뤄위의 일부 지역을 관리했다. 19세기 중반, 티베트 지방정부는 한 때 뤄위지역을 보미(波密)토왕에게 할거해 관리하기도 했다. 한편 티베트정부도 자주 사람을 뤄위지역에 파견해 순찰했다. 당시 로바족에 대한 티베트 지방정부의 통치방법을 본다면 티베트지역에 인접한 곳에는 직접 관원을 파견해 관리하고 뤄위 중부와 남부지방의 로바족들과는 상품 거래를 하면서 물질적인 교류를 통해 로바족에 대한 견제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뤄위 지역은 비록 자연 환경은 훌륭하나 외부와의 접촉이 적은 관계로 사회발전이 더디어 1950년대까지 부계씨족제의 잔여가 많이 남아있었다.

로바족은 19세기 말엽,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당시 영국 침략자가 무력으로 뤄위지역에 침입하자 로바족 인민들은 우월한 지리 여건과 교묘한 전술을 이용해 활과 대도로 외래 침략자의 총포에 맞섰다. 영국 침략자들은 로바족 인민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한 때 아로장포강 왼쪽 기슭 경계선을 봉쇄하기도 했으나 장기간 북부의 티베트족과 밀접한 경제왕래를 유지해온 로바족이 그 영향을 전혀 받지 않자 하는 수없이 봉쇄령을 철회하기도 했다.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뤄위지역에 대한 영국의 일련의 침략행위는 중국정부의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변방사무를 책임진 대신 자오얼펑(趙爾豊)이 선통(宣統)황제에게 로바족이 살고 있는 곳 역시 청나라 강역이기에 영국의 침략을 좌시해서는 안된다며 군대를 파견해 영국의 침략을 물리칠 것을 권하는 조서를 올렸다. 청나라는 청펑샹(程鳳翔)이 군사를 이끌고 영국의 침략을 물리치도록 명했다. 1944년부터 1945년까지 영국령 인도 아쌈 당국은 수차 뤄위지역에 사람을 파견해 정보 탐문을 시도했지만 모두 로바족의 견결한 저항을 받았다. 그 후 영국은 “바리바라 개발계획’을 대거 추진해 뤄위지역의 부분적 영토를 잠식해 로바족의 강한 반대를 야기했다. 티베트 지방정부도 영국정부에 수차 항의를 제기하고 엄정히 교섭했다.

195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민주개혁으로 로바족은 봉건농노제의 사슬에서 벗어나 인민민주주의 독재의 정치제도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로바족 집거지역에서는 선후로 민족자치현과 민족자치촌을 세웠으며 현지의 실제에 근거해 경제문화 발전 계획을 세우고 조치를 취해 로바족이 정치와 경제, 문화, 교육 등 각 방면의 자주권과 자치권을 충분히 향유하도록 담보했다. 

오늘 날 로바족이 거주하고 있는 곳은 편벽한 마을까지 넓은 도로가 통하고 인민들의 생활도 눈에 띄게 개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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