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1-10-07 09:10:07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1년 10월 7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10월의 첫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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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은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기념일 즉 국경절입니다.

1949년 10월 1일, 베이징 천안문광장에서 개국 축전이 열렸으며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가 정식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중국 대륙, 홍콩, 마카오 지역은 모두 이날을 법정 휴일 혹은 공중 휴일로 삼았습니다.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기 전국위원회 제1차 회의가 1949년 10월 9일 베이징 중남해에서 열렸습니다. 회의에서 선거를 통해 제1기 정협 전국위원회 주석, 부주석이 산생되었습니다. 이번 회의에서 10월 1일을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일로 정하며 이로써 10월 10일의 옛 국경일을 대체할데 대한 제안이 나왔습니다.

1949년 12월 2일, 중앙인민정부 위원회 제4차 회의는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일에 관한 결의”를 통과했습니다. 결의는 “1950년부터 해마다 10월 1일을 중화인민공화국의 창립을 선포한 날 즉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일로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올해의 국경 연휴는 10월 1일부터 7일까지 7일간입니다.

2. 박씨 마을과 중국 대륙

이 시간에는 ‘박씨 마을과 중국 대륙’,  대륙 마을의 옛 이야기에 조선인의 옛 얼굴이 나타난다‘ 이런 제목으로 중국 대륙의 마을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박씨는 1800년 전에 벌써 대륙의 오지에서 왕으로 출현하고 있었다. 건안(建安) 20년(215), 파이(巴夷)의 왕 박호(朴胡)가 파이(족)를 데리고 귀화했다고 《삼국지·위지(三国志·魏志)》가 기록한다. 모든 박씨는 신라의 첫 임금 박혁거세를 유일한 시조로 받들며 김씨, 이씨와 더불어 반도 3대 성씨의 하나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신라에서 출현한 박씨가 문득 사천(四川) 남서쪽 지역의 웬 마을 종족에게 우두머리로 등극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신라인들은 이 무렵 벌써 대륙에 대거 상륙하고 있었다. 나중에 그들은 연해 일대에 신라촌과 신라방(新羅坊) 등 신라인의 마을을 세웠다. 대륙의 남부에는 신라현(新羅縣)이라는 이국적인 행정지명도 나타나고 있었다.

  반도의 상징적인 성씨인 박씨는 훗날에도 계속 대륙에 등장한다. 고려 때의 환관 박불화(朴不花)가 《원사(元史)》에 의해 원(元)나라의 도읍인 대도(大都, 북경)에 나타나고 또 조선의 여성포로 박단용(朴丹容)이 조선실록(朝鮮實錄)에 의해 명(明)나라 말의 요동(遼東)에 그의 행적을 남긴다.

  대륙에 살던 박씨는 진작부터 족명(族名)을 달리 불리고 있었다. 조선실록에도 “요동의 한인(漢民) 박우朴右…”라는 옛 기록이 나오고 있다.

  실제 이런 박씨는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현지의 다른 민족과 동화 되었던 것이다. 멀리는 그만두고서라도 명(明)나라 말, 청(淸)나라 초 산해관(山海關)을 넘어 하북성(河北省)에 안착했다고 하는 조선인 후예의 박씨도 그러하다. 20세기 80년대 하북성에서 민족 성분을 확인할 때 일부 조선인 후예는 족명을 조선족으로 개명했지만, 대부분의 족명은 한족으로 되었고 심지어 만족으로 그냥 남아 있기도 했다. 무슨 민족으로 불리든지 그들은 동성끼리 통혼하지 않는 등 습속을 제외하고는 여느 한족과 다름이 없다. 우리말이나 우리글을 전혀 모르며 모두 한어와 한자를 통용한다. 성씨가 박씨이고 또 마을 이름이 박씨 성을 따서 그 씨족의 뿌리를 알리고 있다. 이런 조선족은 당산시(唐山市) 그리고 승덕시(承德市)의 평천현(平泉縣), 진황도시(秦皇島市)의 청룡현(靑龍현) 등 여러 지역에 집거(集居) 혹은 잡거(雜居)하며 7개의 촌으로 집중, 분포한다고 하북성의 지방지(地方志)가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박씨는 성씨나 마을 이름에만 그들의 유전자를 남긴 게 아니다. 하북성의 박씨촌은 또 족보에도 그들의 유전자를 또렷이 남기고 있다. 승덕 부근의 박장자(朴杖子)와 박가원(朴家院) 등 박씨 마을에는 아직도 항렬 돌림자가 내려오는데, 저자가 현지를 답사하던 그 무렵 14대손을 잇고 있었다. 돌림자는 가문을 중요시하고 혈통을 지키던 선조들이 같은 씨족임을 알리기 위해 이름에 쓰던 것이다. 이 박씨는 3,4백 년 전, 요녕성(遼寧省) 지역에서 살다가 만주 8기를 따라 이주했다고 박씨 가족에 구전하고 있다.

  기왕에 말이 났으니 망정이지 옛날 요녕성 지역에는 박씨는 물론 김씨, 최씨, 백씨 등 조선인 성씨가 40여개나 있었다고 민국(民國, 1912~1949) 초기의 《수암현지(岫岩縣志)》가 밝힌다. 수암은 반도와 근접하고 있는 요녕성 남부의 지역이다.

  미상불 수암이 아닌 다른 지역에도 박씨 아닌 다른 조선인들이 적지 않았으리라. 청나라 때 천진(天津)의 소금장사 안기(安岐)도 조선인의 후예라고 전한다. 안기는 한때 청나라 건륭(乾隆, 1736~1795) 황제가 구입했던 고화(古畵)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의 주인으로 있는 등 집안의 막강한 재력을 보였던 유명한 고서 수집가였다.

  아쉽게도 실명의 이 안씨 역시 여느 무명인처럼 뿌리가 어딘지 근원을 알 수 없다. 종족 군체를 이룬 하북성의 박씨도 어디선가부터 문득 뿌리가 끊어지고 있다. 구전하는데 따르면 그들은 장성을 넘은 후 선인을 따라 북경에 정착하다가 장두(庄頭, 우두머리)로 되는 등 여러 번 이주하면서 현재의 거주 상황을 이뤘다. 그들이 대륙에서 어느 선조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이미 고증할 길 없다. 3,4백 년 전의 박씨가 그러하거늘 하물며 일찍 1천 년 전 하북 지역을 비롯하여 대륙의 방방곡곡에 이주했던 신라인은 더 말할 데 있으랴.

  오늘 이 시간부터 대륙의 전설 같은 박씨 마을의 이야기를 찾아 선인들의 옛 얼굴을 만나고 중국 대륙의 마을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간주]

                 한왕(罕王)의 선봉관(先鋒官) 박씨와 그의 마을

  박씨의 선조는 일찍 청(淸)나라 군대를 따라 산해관(山海關)을 넘어섰다. 만주 8기(八旗)의 정백기(正白旗) 일원이었으며 또 선봉관을 담임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참고로 정백기는 한왕(罕王) 누르하치(努爾哈赤, 1559~1626)가 처음으로 설립, 기(旗)에는 왕이 없었고 병사는 황제의 친병이었다.

  선봉관은 선견부대의 장령으로 험지에서 늘 앞장에 서야 했다. 실제 박씨의 선조는 전장에서 중상을 입은 적 있다고 박동립(朴東立, 80세)이 가족의 전설을 전했다.

  “청나라가 북경에 도읍을 정한 후 선조님은 교구의 향하(香河)에 정착했다고 하지요.”

  이때부터 박씨의 선조는 “대청조내무부정백기구갑화호(大淸朝內務部正白旗九甲花戶)”로 되어 있었다고 후손에게 전승되고 있다. 옹정(擁正, 1723~1735) 연간 세조(世祖) 박충문(朴忠文)과 그의 동생 박종문(朴宗文)이 10여명의 가족과 함께 하북성(河北省) 당산(唐山) 동쪽 근교의 야리촌(冶里村)에 이주했다고 박동립이 마을의 향토지에 저술하고 있었다.

  박동립과 그의 형 박동성(朴東成, 89세)을 촌민의 안내로 만났다. 박동립은 야리촌의 전 촌장이었고 박동성은 마을 박씨의 최고의 연장자라고 했다. 두 형제는 야리촌에 정착한 박충문을 하나같이 일곱째 조부(七太爺)라고 부르고 있었다. 야리촌의 박씨는 모두 박충문의 후대이며 여덟째 조부인 박종문은 후손이 없다고 한다.

  “그분들은 모두 여덟 형제였다고 전하는데요, 기타의 형제 여섯은 산해관 북쪽으로 다시 돌아갔다고 합니다.

  박씨 가족의 구전하는데 따르면 박충문 형제의 선조는 요녕성(遼寧省) 지역에서 만주 8기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형제 여섯이 실은 산해관 저쪽의 옛 고향 마을로 돌아갔다는 설이 나올 법 한다. 요녕성의 중부와 동부 지역에는 박보(朴堡), 박가구(朴家溝) 등 박씨의 옛 마을이 잔존한다. 박보와 박가구의 선인(先人)은 4백년 지어 그 전에 대륙에 나타났으며 후금(後金, 1616~1636) 시기 만주 왕공귀족의 포의(包衣, 노복)로 되고 있었다. 혹여 박가구, 박보의 박씨와 야리촌의 박씨는 그 무슨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하북성에는 야리촌과 같은 박씨의 집성촌은 여럿이나 된다. 그러나 그들의 선조가 동일한지는 고증할 길 없다고 1990년대의 《하북성지(河北省志)》가 밝히고 있다. 아무튼 야리촌처럼 하북성의 여러 마을에 집거하거나 잡거하는 박씨의 선조는 모두 청나라 군대를 따라 산해관을 넘어섰다고 박씨들에게 유전되고 있다.

  그럴지라도 박동성은 다른 박씨의 마을이 하북성의 북부 지역에 여럿이나 있다는 사실을 1986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한다.

  “지방 신문에서 승덕(承德) 당패진(党壩鎭)의 박가원(朴家院) 마을 이름을 읽고 그들에게 편지로 연락을 했지요.”

  박동성이 말에 따른다면 야리촌의 박씨가 언제 어떻게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이때 박동성은 박가원의 박씨로부터 그들이 전승하고 있는 항렬 돌림자를 받게 되었다. 이 돌림자는 차례로 “세문천준용/광수청점창/수준방걸서/경흥의옥상(世文天俊勇/廣修淸占昌/樹俊芳傑瑞/景興義玉祥)” 등 20자였다. 박가원은 부근 평천현(平泉縣) 칠구진(七溝鎭)의 마을 박장자(朴杖子)에 살고 있는 박씨와 함께 같은 항렬 돌림자를 쓰고 있었다. 그들 두 마을의 박씨는 마을 이름이 달라도 동일한 선조를 삼고 있다는 얘기였다.

  정말로 박씨의 선조가 그의 후손에게 내린 천운이었을까, 박동성은 박씨의 이 돌림자에서 그들의 뿌리가 실은 평천의 박씨 마을과 같다는 실오리 같은 단서를 찾았다.

  “항렬 돌림자를 보세요. 일곱째 조부 형제의 이름자에 있는 (글월) 문(文)이 박가원 박씨의 항렬에서 두 번째 자리에 놓여 있지 않습니까?”

  비록 20년 세월이 흘렀지만 박동성은 아직도 그날의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 20자의 돌림자를 따른다면 야리촌의 박동성도 돌림자를 그에게 알려줬던 박가원의 박준창(朴俊昌)과 같은 항렬의 제10대가 된다.

  아쉽게도 야리촌과 박가원 박씨의 동일한 돌림자는 글월 문(文) 하나뿐이었다. 야리촌의 박씨는 제5대까지 종족의 항렬 돌림자를 전했지만, 박가원의 박씨 항렬 돌림자에는 동일한 돌림자가 더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또 박가원의 박씨 역시 황제기 직접 통솔하던 친병이라고 하지만 야리촌의 박씨와 달리 양황기(攘黃旗)라고 전하고 있었다. 야리촌 박씨의 시조 돌림자는 박가원 박씨의 어느 돌림자와 우연히 합치했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마저 야리촌의 박씨는 20대까지 항렬 돌림자를 잇지 못하고 있었다. 제6대부터 박씨의 후손들은 가족끼리 각자 제멋대로 이름자를 지었다고 박동성이 말한다.

  그래서일까, 3백년 후 야리촌과 박가원 두 마을의 박씨는 족명(族名)도 서로 달랐다. 박가원의 박씨는 만족이었으며 야리촌의 박씨는 조선족이었다. 실제로 야리촌의 박씨도 만주 8기에 소속되어 산해관을 넘을 그때는 족명을 만족으로 썼다.

  “일본이 중국을 강점하던 그 시기에는 우리 박씨를 한족이라고 말했지요.”

  박동성이 특별히 밝히는 내용이다. 그때 만족이라고 하면 그 무슨 피해를 입을 지 두려워서 노인들이 일부러 그들의 족명을 바꿨다고 한다.

  1986년, 하북성에서 민족 족명을 확인할 때 야리촌의 박씨는 모두 조선족으로 개명되었다. 조선인 후예라는 박씨의 신분이 드디어 인정을 받은 것이다. 신라를 세운 국왕이 바로 그들 박씨의 시조라는 걸 알고 있다고 박동립이 한마디 곁들이고 있었다.

  “우리의 원적(原籍)은 조선반도의 옛 나라 신라이지요. 조선족이라는 진실한 족명을 찾은 거지요.”

  그러나 야리촌의 박씨는 하북성에서 족명을 회복한 최초의 조선족 박씨가 아니었다. 일찍 공화국의 창립(1949) 초기, 하북성 진황도시(秦皇島市) 청룡현(靑龍縣)의 박씨는 이미 조선족으로 인정되고 있었다고 《하북성지(河北省志)》가 전한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박씨의 선조가 야리촌으로 이주할 무렵 하북성 북부의 천진(天津)에서 거부로 있던 안기(安岐, 1683~?)는 그때 벌써 조선인 신분으로 세간에 전하고 있었다. 안기는 소금 장사를 하여 돈을 모았으며 중국 최대의 서화 수장가로 된 사람이다. 그가 수장했던 서화에는 ‘조선인’, ‘안기의 인감’ 등이 찍혀있어 그의 족명을 명백하게 알리고 있다. 유감스럽게 안기는 생애 후반에 가문이 기울면서 그의 후손을 세상에 알리지 못하고 있다. 박씨처럼 반도 고유의 특이한 성씨가 아닌 연유라고 하겠다. 만일 안기의 후손이 존속하고 있었더라면 그들의 족명도 박씨처럼 조선족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야리촌의 박씨는 정착한 후 지금까지 13대 존속하고 있었다. 제일 높은 항렬의 생존자는 제8대이었다. 박동성과 박동립 형제는 그 뒤를 이은 제9대이었다. 야리촌에는 1천여 가구, 3천여 명이 살고 있었다. 와중에 박씨 가족은 106가구, 413명이며 조선족 혈통의 인구는 기타 성씨의 며느리 등을 제외한 300여명이라고 박동립이 밝혔다.

네, 박씨 마을과 중국 대륙’,  대륙 마을의 옛 이야기에 조선인의 옛 얼굴이 나타난다‘ 이런 제목으로 중국 대륙의 마을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지명과 관련한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제일 동쪽에 훈춘의 버들방천에 있었던 그 부락은 ‘헤무기’라고 불렸다고 하는데요, 이 지명은 무슨 의미일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명 ‘헤무기’는 무슨 의미로 지은 이름일까요.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박은옥(MC),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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