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1-10-22 14:58:26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1년 10월 21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10월의 세번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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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 목요일은 21일은 양력 한해의 294일 째 되는 날입니다. 올 한해가 끝날 때까지 71일 남았습니다.

10월 21일은 '화교의 날'입니다. '화교는 혁명의 어머니'라는 이 역사적 의미를 기리기 위해 10월 21일을 화교의 날로 정하고 해외 중국인, 화교가 신해혁명, 항일전쟁, 조국건설, 통일촉진 등 측면에서 한 큰 기여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화교의 그 가족은 3천여만명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해외 화교와 중국인은 약 5천여만명 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국이 기타 나라와 다른 특수한 국정입니다.

2016년 10월 21일, 홍군장정 승리 80주년 기념대회가 베이징에서 성대하게 열렸습니다. 습근평 중공중앙 총서기 국가주석,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대회에서 중요한 연설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역사는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하면서 이상의 대안에 이르려면 중국공산당이 확정한 길을 따라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또한 세대마다 세대의 장정이 있다고 하면서 세대마다 모두 자기의 장정의 길을 잘 걸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내신 간주】

10월 14일 중국국제방송 한국어 중파방송 수신 보고서를 받았습니다.

한국 김한수 청취자는 이날 서울특별시에서 19:00시부터 19:10분까지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방송을 수신했다고 하면서 약간의 잡음이 있는 채로 수신했다고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김한수 청취자는 19:10부터 갑자기 잡음이 심해져서 중파방송 수신이 불가했다고 하면서 단, 중국국제방송에만 잡음이 심했던 것은 아니고 타 방송도 잡음이 심해서 청취 불가한 상황이었다고 자세히 상황을 전해왔습니다.

방송을 청취하시고, 자세한 수신 상황을 보내준 김한수 청취자님에게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우리 방송을 청취해 주시고 수신 등 좋은 소식을 부탁드립니다.

네, 이번에는 중국 길림성 연길의 박철원 청취자가 9월의 퀴즈 답안을 보내오셨습니다.

박철원 청취자가 보내온 답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훈춘  방천을  옛날에  “헤무기”라고  불렀다는데요.

헤무기는  중국글어 검은 나무 조각무더기(黑木积)   혹은 검은 목계(黑木鳮)의  발음이   불린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헤무기란  만족말로  메귀리란  말이라는데  방천지역에는  이런  식물이  없었다고  합니다.

오늘의  이  방천 마을은  3국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소문난  민속촌으로  참신하게  꾸려져있습니다."

네, 9월의 퀴즈 답안은 내달 11월 첫 목요일 방송에 말씀드립니다.

박철원 청취자의 자세한 답안 감사하구요, 11월 첫 목요일 방송에 이 답안이 맞는지 다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길림성 왕청의 오랜 청취자 이강춘 님도 소식을 보내오셨습니다.

동북호랑이표범국가공원에서 희소식을 전해왔는데요. 야생동북호랑이가50마리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네, 자세한 소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0월 12일, 동북호랑이표범국가공원이 정식 설립되였다. 동북호랑이표범국가공원관리국의 최신 데이터에 따르면 동북호랑이표범국가공원 야생동북호랑이, 동북표범 수는 2017년 시범 초기 27마리, 42마리에서 각각 50마리와 60마리로 증가되었는며 새로 번식한 새끼호랑이가 10마리 이상, 새끼표범이 7마리 이상 관측 되었다고 한다. 동북호랑이와 표범은 서쪽으로 길림 교하, 서란 일대로 확산되었고 북쪽으로 밀강 요하일대로 확산되었다. "

 

네, 중국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 이래 중국은 생태를 우선하고 녹색의 발전을 견지하고 생태환경 보호의 법률체계를 날을 따라 보완하여 생물 다양성 거버넌스의 새로운 국면을 기본상 형성했으며 생물다양성 보호가 새로운 역사시기에 들어서게 했습니다.

동북호랑이와 표범도 이런 환경에서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중국 생물 다양성 보호의 성과는 세계에 신심과 희망을 갖다주고 있습니다.

 

네, 동북호랑이와 표범이 늘어나고 있다고 리강춘 청취자가 소식을 보내왔습니다.

 

[간주]

 

2. 박씨 마을과 중국 대륙

이 시간에는 ‘박씨 마을과 중국 대륙’, 대륙의 옛 마을에 조선인의 옛 얼굴이 나타난다‘ 이런 제목으로 중국 대륙의 옛 마을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자금성에 살고 있던 박씨의 ‘국모’

 

  그들의 계보(系譜) 맨 꼭대기에 적힌 시조(始祖)는 여인이었다. 족보(族譜)치곤 정말로 희귀한 계보였다. 하긴 족보라면 같은 할아버지의 자손들을 기록한 책이 아니던가. 족보를 편찬할 때 시조로부터 성(姓)과 본관(本貫)이 같은 남자 쪽의 혈통을 기록하는 게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박옥경(朴玉卿, 1954년 출생)은 그들의 시조가 분명히 여인이라고 거듭 말하고 있었다. 박옥경은 북경의 어느 지인의 소개를 받아 일부러 찾아 만난 사람이다. 그들의 선조는 벌써 3,4백 년 전부터 북경에 거주하고 있다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박씨의 선대(先代)는 노조부(老祖父)가 아닌 노조모(老祖母)의 성씨를 따랐다는 것이다. 노조모가 청(淸)나라의 황제에게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박옥경은 아련한 옛 기억을 되살리고 있었다.

  “우리 시조는 박국태(朴國太)라고 불리는데요, 동릉(東陵)의 어디에 묻혔다고 전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박옥경이 살고 있는 곳은 동릉이 위치한 북경 동쪽에 있는 게 아니다. 박씨의 가족은 일찍부터 북경 서쪽의 문두구(門頭溝) 향욕촌(香峪村)에서 살고 있었다.

  향욕촌 박씨의 시조도 원체 여느 고려 여성처럼 이름이 없었을 수 있다. 국태(國太)라면 이름이라기보다 문자 그대로 황제의 모친 즉 국모의 의미라는 얘기이다.

  정말로 박씨 성의 ‘국모’는 궁실에 실재한 인물로 현신(現身)하고 있었다. 청나라 때 자금성(紫禁城)에는 분명 박씨 성의 유모(乳母)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순치(順治, 1644~1661)황제의 유모였다고 《청성조실록(淸聖祖實錄)》이 문자로 기록한다. 박씨 유모는 나중에 청나라 황릉인 동릉의 근처 원침(園寢)에 묻혔다. 동릉에 있는 순장무덤의 4기의 유모 원침에서 박씨 유모는 신분이 제일 특수하다. 박씨는 젖먹이의 순치황제를 길렀고 또 어린 시절의 강희(康熙)황제를 보살폈다고 한다. 박씨의 이런 특수한 신분은 청나라에 유일무이하다. 강희황제는 나중에 박씨를 봉성(奉聖)부인으로 봉(封)했다. 강희 20년(1681), 봉성부인이 병사한 후 강희황제는 특별히 동릉 동쪽 부근에 땅을 선택하고 박씨를 순장했으며 봉성부인의 원침이라고 칭했다. 강희황제는 그 후 봉성부인의 원침을 4차나 찾아 직접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봉성부인은 한때 북경 동쪽에 살던 박씨들과 친척이었다고 전한다. 경동의 박씨는 언제인가 관리 가족과 분쟁이 생긴 적 있는데, 이때 봉성부인이 강희황제에게 알려 현지의 지부(知府)를 파면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 때문에 북경 동쪽의 박씨는 현지인들의 미움을 받게 되어 부득불 북경을 떠났다.

 이 봉성부인은 《팔기만주씨족통보(八旗滿洲氏族通譜)》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박씨의 가세(家世)가 그녀의 훗날의 신분과는 달리 비천(卑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살씨가보(薩氏家譜)》에도 봉성부인은 박씨의 만족 명칭인 듯한 포모포리씨(布母布哩氏)로만 기록되고 있다. 이 가보에 따르면 봉성부인은 시댁이 휘발살극달씨(輝發薩克達氏)이며 남편이 파살리(巴薩哩)이었다. 파살리는 일찍 사망하면서 수룡입관(隨龍入關) 즉 황제를 따라 장성을 넘는 호황을 만나지 못했다. 대신 박씨는 황실을 따라 북경에 진출하며 미구에 강희황제에 의해 봉성부인으로 등극하는 인생의 절정기를 맞는다. 또 이로 인해 박씨는 궁극적으로 자식에게 성씨를 물려주는 등 향욕촌 박씨 가문의 시조로 탄생하는 것이다.

  박국태를 시조로 삼는 박씨는 실은 향욕촌 한 마을의 박씨만 아니었다. 박씨가 시초에 어디에서 살았는가 하고 묻자 박옥경의 대답은 곧바로 향욕촌의 뒷산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박옥경의 말에 따르면 박국태 후손의 두 형제는 산 앞뒤의 마을로 갈라졌다. 뒷이야기이지만, 두 마을의 박씨는 항렬의 돌림자가 다를 뿐이며 각기 항렬의 세수(世數)와 인구 숫자가 모두 비슷하게 존속하고 있었다.

  향욕촌 박씨의 선조는 옛날 고분 때문에 산을 넘었다고 박옥경이 밝히고 있었다.

  1958년, 북경 군부대가 땅을 징발하여 사용하면서 주민들이 철거되었고 옛 향욕촌은 금지구역으로 되었다. 옛 향욕촌의 옛 무덤은 더구나 찾을 수 없는 옛 이야기로 멀어지고 있었다.

  융은사의 옛 무덤은 향욕촌 박씨들의 소실된 옛 기억을 어느 정도 되살리고 있는 듯 했다. 융은사는 명나라 때의 사찰인데, 청나라의 개국공신 아파태(阿巴太)가 장성을 넘은 직후인 1646년 사망하면서 그의 원침(園寢)으로 되었다. 아파태는 청나라의 태조 누르하치(努爾哈赤)의 일곱 번째 아들이며 아파태의 원침은 그와 아들, 손자의 무덤을 주축으로 이뤄지고 있다. 여러 무덤 주인의 친척과 병사, 하인 등이 무덤의 지킴이로 되었다.

  융은사촌의 박림삼(朴林森, 1951년 출생)은 마을의 여러 성씨 가족이 각기 다른 무덤을 지키고 있었다고 밝혔다. 그들 박씨는 아파태의 무덤인 선조(先祖) 태왕(太王) 무덤을 지키던 가문이라고 한다.

  또 조씨(趙氏)가 큰 태왕의 무덤, 반씨(潘氏)가 둘째와 셋째 태왕의 무덤, 제씨(齊氏)가 넷째 태왕의 무덤 지킴이인 그런 식이었다고 박림삼은 회억했다. 융은사촌에는 이렇듯 전문적인 무덤 지킴이의 성씨가 10여개였으며 공화국 창건(1949) 후에도 여러 무덤 주인의 위치에 각기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향욕촌 박씨가 그 무슨 무덤 지킴이었다는 게 자못 수긍이 되는 대목이었다.

  오히려 의문이 가는 것은 박씨들의 돌림자가 없는 박림삼의 이름이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는 원래 넓을 홍(洪)의 돌림자를 썼는데 이날 함께 저자의 인터뷰를 받은 융은사촌의 박홍강(朴洪剛)과 같은 항렬이었으며 또 박홍강과 함께 같은 증조부를 두고 있었다. 호적에 이름을 올릴 때 마을의 동명의 박씨와 서로 다투다가 부득불 이름을 고쳤다는 것이다.

  청나라 때 박씨는 달마다 봉록을 받았다고 박홍강이 박림삼의 말을 잇고 있었다. 관가에서 달마다 관원이 내려와서 무덤 지킴이에게 각기 은자를 내줬다는 것. 박국태 즉 봉성부인은 백년이 지나도록 후손들에게 계속 복을 물려주고 있는 듯 했다. 박씨는 무덤 지킴의 신분을 떠나 현지에서 큰 세도를 누리고 있었다. 박홍강의 셋째 증조부 박덕견(朴德甄)은 왕실의 작은 두목으로 총잡이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왕실의 소유지가 있는 하북성(河北省) 고원현(沽源縣) 일대에 박씨가 총잡이들을 데리고 다녀올 때면 연도의 마적들은 아예 멀찌감치 박씨의 일행을 피했다고 한다.

  고원현은 증조부가 자주 드나들면서 언제인가부터 박씨네 셋째의 주둔지라는 의미의 지명 ‘박삼영자(朴三營子)’가 생기기까지 했다. 사실상 이 총잡이들이 아니더라도 워낙 만주 8기병을 따라 말을 타고 장성을 건넜던 박씨는 군부대와 남다른 인연이 있는 듯하다. 예전에 북경 시내에는 박씨 장령의 ‘박대장군(朴大將軍)’ 묘비가 있었는데, 이 묘비는 1960년대 중반 때까지 숭문문(崇文門) 일대에 잔존했다고 한다.

  북경 서쪽의 마을에서 시작된 박씨의 옛 이야기는 며칠 후 북경 동쪽의 하북성 동릉에서 끝났다. 유감스럽게도 동릉 현지의 사람들은 그 누구도 봉성부인이 박씨의 유모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봉성부인의 원침(園寢)은 단지 ‘유자의 엄마 무덤(乳子媽墳)’이라는 무명의 무덤으로 전하고 있을 뿐이었다.*

 

네, '자금성에 살고 있던 박씨의 옛 '국모' 이런 제목으로 중국 대륙의 옛 마을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지명과 관련한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제일 동쪽에 훈춘의 버들방천에 있었던 그 부락은 ‘헤무기’라고 불렸다고 하는데요, 이 지명은 무슨 의미일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명 ‘헤무기’는 무슨 의미로 지은 이름일까요.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박은옥(MC),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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