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1-11-05 18:26:49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1년 11월 4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11월의 첫번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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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 목요일인 4일은 양력 한해 가운데서 308일째 되는 날입니다. 올 한해가 마감할 때까지 두 달에 미치지 못한 57일이 남았습니다.

 

역사상의 이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2005년부터 러시아는 해마다 11월 4일 ‘인민단결의 날’을 경축했습니다. 이 명절은 1612년 러시아 의용군이 폴란드군을 모스크바공국에서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설립했습니다. 이 사건은 러시아의 17세기 ‘혼란한 시대’의 종식을 추진했으며 러시아인민의 단결을 상징합니다.

 

17세기 초, 러시아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습니다. 이 시기를 역사상 ‘혼란한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시기 러시아애는 실제상 국가정권이 없었으며 또 내전에 빠져있었습니다. 러시아는 국가와해와 독립상실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내외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하에서 단결하여 조국을 지켰습니다.

 

2018년 11월 4일, 러시아 각 지역에서 여러 행사를 개최하여 ‘인민단결의 날’을 경축했습니다. 러시아에서 320만명을 넘는 민중이 이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이 가운데서 모스크바의 경축행사에 77만 여명의 민중이 참여했습니다.

 

2019년 11월 4일, 러시아 ‘인민단결의 날’에 푸틴 대통령이 모스크바에서 연설했습니다. 그는, 러시아의 순조로운 발전의 돈독한 기초는 사회단결이며 평화를 귀중히 여기고 민족 사이의 상호존중과 신임을 귀중히 여기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합심하여 협력해야 어려움을 이겨내고 여러 도전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간주]

협회의 단결의 힘을 자랑한 '도라지 축제'가 열렸습니다. 중국 길림성 장춘의 김수금 청취자가 글을 보내왔습니다.

 

[청취자 내신]

10월 24일은 우리 장춘제일자동차그룹 조선족노인협회 활동의 날이었습니다.

 

이날은 협회 역사상 처음으로 자기 손으로 도라지를 기르고 자기 손으로 도라지를 다듬어 맛있는 도라지 요리를 맛보면서 축제를 벌였습니다. 이날 우리 협회는 조선족 음식문화잔치를 벌이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협회 회원들의 단결의 힘, 봉사의 정신을 자랑했습니다.

 

저는 깊은 산속도 아니고 시골 마을도 아닌 도시 장춘의 조선족노인협회 활동실에서 ‘도라지 축제’를 열었다는데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우리 협회의 활동실은 노인들이 자립생생, 간고분투의 정신으로 두 손으로 지은 활동실입니다. 활동실 남쪽에 작은 땅이 있는데, 해마다 이곳에 꽃을 가꾸고 있습니다. 여름이 되면 백화가 만발한 꽃밭에서 노래와 춤으로 즐기는 행복의 낙원입니다. 그러다가 7년전에 오정순 할머니가 도라지 씨를 가져와 실험적으로 심었는데, 산에서 자라나는 도라지가 뜻밖에 여기 평야인 할동실 정원에서 자라났습니다. 우리 정원은 이때부터 여름이면 남색의 아름다운 도라지꽃이 만발했습니다. 리문식 노인은 해마다 정원의 풀을 뽑고 김을 매는 등 정성껏 도라지꽃을 키웠으며 윤영선 부회장님은 ‘도라지’를 어린애처럼 애지중지 가꾸면서 가을이 되면 또 씨를 받아 봄이면 다시 땅에 심었습니다. 도라지꽃은 해마다 여름이 되면 활짝 피어나 남색의 아름다움으로 화원을 장식했습니다. 노인들은 이 꽃밭에서 사진을 찍으며 기념사진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우리 협회의 정원은 어느 노인협회도 향수하기 힘든 행복하고 즐거운 낙원으로 되고 있습니다.

 

올해는 도라지를 재배한지 7년이 되는 해입니다. 박룡익 회장님은 우리가 직접 심고 가꾼 도라지를 캐서 맛보고 노동의 성과를 향수하자고 말했습니다. 우리 협회의 활동일은 10월 24일 ‘도라지 축제’를 열기로 결정했습니다. 회원들은 이것은 ‘대축제’라고 기뻐서 말했습니다.

 

10월 22일, 흥성흥성한 노동 장면이 벌어졌습니다. 남성 노인들은 괭이를 휘둘러 도라지를 캤고 여성 노인들은 도라지를 정성들여 다듬었습니다. 10월 24일은 말 그대로 잔칫날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집에서 또 따로 요리를 해서 밥상에 올려놓았습니다. 점심식사와 함께 노래와 춤이 벌어졌습니다. 국가1급 바이올리니스트 김숙자씨가 바이올린으로 ‘도라지’를 연주하자 회원들은 흥에 겨워 노래‘ 도라지’를 불렀고 음악에 맞춰 춤판을 벌였습니다.

 

이번 ‘도라지 축제’는 우리 협회의 단결의 힘, 사랑의 정, 나눔의 기쁨을 보여준 행사였습니다. 우리 노인들의 말년의 즐거움이 이런데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장춘제일자동차그룹 조선족노인협회 김수금

 

[간주]

 

2. 박씨 마을과 중국 대륙

이 시간에는 ‘박씨 마을과 중국 대륙’, 대륙의 옛 마을 조선인의 얼굴이 나타난다‘ 이런 제목으로 중국 대륙의 옛 마을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박물관에 소장된 한족 박씨의 비사(秘事)

 

옛 마을을 개척한 선조가 운무속의 흐릿한 인물로 되고 있었다. 적어도 12대손인 박계전(朴桂全)의 기억에는 선조의 이름자를 읽을 수 없었다. 박씨의 선조는 그의 형상을 화판이 아닌 나무로 마을에 심어놓고 있었다. 마을 귀퉁이에 이 선조가 심었다고 하는 느릅나무 한 대는 지금도 땅을 박차고 소소리 높이 자라고 있었다. 마을은 그때부터 선조의 성씨를 따서 박가툰(朴家屯)으로 불리고 있다.

박씨의 옛 흔적은 나이를 먹은 오랜 느릅나무뿐만 아니었다. 또 지방문헌에 문자로 남고 있었다. 박씨의 선조는 민국(民國, 1912~1949) 초년에 이곳에 황무지를 개간하고 촌락을 세웠다고 옛 《서란현지명지(舒蘭縣地名志)》가 기술하고 있었다. 이 무렵 박씨들은 다른 성씨의 조선인들과 더불어 서란현을 비롯한 길림성(吉林省) 그리고 이웃한 흑룡강성(黑龍江省)과 요녕성(遼寧省)의 여러 지역에 나타나고 있었다. 조선인 간민(墾民)의 대량 이주는 이에 앞서 청(淸)나라 말의 광서(光緖, 1871~1908) 연간부터 중국 동북의 전 지역에서 진행 되고 있었다.

지명지에 따르면 박가툰의 박씨는 한족(漢族)이라고 한다. 실제로 박계전의 신분증에는 그의 족명(族名)이 한족이라고 명백히 적혀 있었다. 박계전은 물론 가게에 들린 동네의 박씨 노인도 현지의 토박이 중국말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옷차림이나 주거 습관이 모두 현지의 한족과 다름없었다.

박씨는 조선반도의 고유의 성씨로서 신라의 시조왕(始祖王) 박혁거세를 유일한 시조로 받들고 있다. 박가툰 박씨의 선인(先人) 역시 옛날에는 조선반도에서 살았다고 가문에 구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계전은 시조왕인 ‘박혁거세’의 이름자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조선글을 한 글자도 읽지 못했고 조선말을 한 마디도 외우지 못했다. 어찌됐거나 박계전의 선조는 분명히 한족이 아니었다고 연변 민속학자들이 방문기록에 밝히고 있었다. 그들은 1984년 특별히 박가툰을 찾아와서 박씨의 가계(家系)를 조사했었다.

가계도에 따르면 박가툰의 박씨는 요녕성(遼寧省) 본계시(本溪市) 부근의 박보(朴堡) 일대에서 살았으며 훗날 서란현 지역으로 이주한 것이다..

박보 역시 박씨 사람들로 동네를 이룬 옛 박씨 마을이다. 박보 박씨의 이민 역사는 근대의 민국시기가 아니며 최소 명(明)나라 말의 후금(後金)까지 이어진다. 그때 박씨는 후금과 조선 사이에 일어난 전쟁에서 포로로 되었다고 한다.

박가툰에 구전하는데 따르면 박씨의 선조는 예전에 만주 8기의 일원이었다. 실제로 박씨를 망라하여 동북에 살던 조선인의 40여 개 성씨가 만주 8기에 귀부(歸附), 편입되었다. 후금의 천총(天總, 1627~1636) 연간과 청나라 초에 생긴 일이었다.

박씨가 박보 마을을 떠나 길림(吉林) 서쪽 서란 귀퉁이의 소성진(小城鎭)에 이주한 내력은 아직도 불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박씨가 그들이 소속한 만주 8기의 만족 지명을 따라 북상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공교롭게도《길림통지(通志)》에 따르면 길림은 길림우라(烏拉)의 약칭인데, 길림은 만족어로 따를 연(沿), 우라는 큰 내 강이라는 의미이니 길림우라는 강가에 늘여 있는 땅을 말한다. 서란 역시 만족어로 만든 말이며 열매를 의미한다고 《길림지지(吉林地志)》가 해석하고 있다. 이 지방문헌에 따르면 청나라 때 서란의 경내에서 산사(山査) 열매를 공물로 채집했다.

박씨의 세조가 처음으로 서란에 나타난 것도 실은 청나라 때였다. 《서란현지명지》에 기술된 민국시기가 아니었다. 세조는 일찍 강희(강희, 1662~1722)연간에 서란의 소성진에 행장을 풀었다고 전한다. 연변의 민속학자들이 박가툰에서 발견한 박씨의 가첩(家牒) 등에서 읽은 내용이다. 실제 박씨의 세조가 마을 어귀에 심었다고 전하는 느릅나무의 수령과 비슷한 시기로 맞먹는다.

그런데 서란의 지방문헌은 왜서 박가툰이 민국 초년에 생긴 마을이라고 기록했을까…

기실 ‘민국 초년’이 박가툰의 연대기에 나타나는 사건은 따로 있었다. 그 무렵, 박씨의 선인(先人)은 그의 선조와 가족 관계를 후대에 알리기 위해 집안의 가계(家系)를 밝힌 가첩(家牒)을 만들었다고 한다. 가첩은 촌민 박귀삼(朴貴森) 집안의 선조 8대 가족의 이름과 친족관계를 밝혔다.

박귀삼이 보존한 박씨 집안의 이 계보(系譜)는 박가툰의 유일한 개인족보이다.

박가툰의 박씨는 가계도에 제1대부터 제11대까지 박보의 박씨가 전승하고 있는 항렬의 돌림자를 거의 판박이처럼 옮기고 있다.

가계도에 등장하는 박가툰 박씨의 1대손은 박응원(朴應元)이다. 박보에 첫 삽을 박았던 박씨 5형제 가운데서 막내 박응원의 후손들이 서란의 박씨 마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항렬 돌림자 첫 10자는 세조 박씨 5형제부터 전승한 것이며, 그 다음의 20자는 1870년경 박보 박씨의 후손들이 합심하여 다시 만든 항렬 돌림자이다.

박가툰의 박씨는 12대손부터 박계전처럼 이름자에 계수나무 계(桂)의 돌림자를 넣는 등 더는 박보 박씨에서 전승되는 항렬 돌림자를 쓰지 않고 있다. 제11대손의 글월 문(文)은 박보의 20자 돌림자와 우연히 합치했을 수 있다는 얘기이다. 1870년에 다음 20자의 항렬 돌림자를 만들기에 앞서 박가툰의 박씨가 시작되었다는 것. 실제 박가툰의 옛 무덤에는 가멸 부(富) 돌림자의 9대손 선조가 묻혀있다. 박씨의 선조는 그의 조대 때 박가툰 마을을 처음 열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벌써 강희 연간에 서란 박가툰이 생겼다는 주장에 신빙성이 있다.

항렬 돌림자는 얼마 전 박가툰에 새롭게 나타나고 있었다. 박계전의 설명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박씨의 13대는 겨울 동(冬)을 돌림자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종이 한 장의 차이가 하늘과 땅으로 벌어질 수 있다. 같은 하나의 세조에서 시작되었지만 어느덧 서로 다른 종족으로 되고 있었다. 박보의 박씨는 종국적으로 조선족으로 회복했고 박가툰의 박씨는 그냥 한족으로 남아있다.

박씨의 신분이 한족으로 등록된 원인을 누군가 이렇게 한마디로 밝힌다. 공화국 창건(1949) 전, 민족 차별대우와 민족 압박의 정책으로 인해 많은 민족은 한족의 분파라고 거짓 주장하고 오랜 기간 자기의 족명을 은닉했다. 1982년, 제3차 전국인구보편조사가 진행된 후 중국에서 민족 족명을 회복, 개명한 사람은 단번에 260만 명이나 되었다. 족명을 줄곧 만족이나 한족으로 신고하고 있었던 하북성(河北省)과 요녕성의 적지 않은 박씨들도 나중에 조선족의 신분에 합류했다.

연변의 민속학자들이 서란 박가툰을 찾아 조사를 진행한 것은 1980년대 말이었다. 그때까지 박가툰에는 많은 조선인의 옛 풍속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찰떡을 칠 줄 알았고 막걸리를 거를 줄 알았다. 마을에는 또 정월 보름날에 오곡밥을 먹고 동짓날에 팥죽을 먹던 세속 습관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박보의 박씨와 달리 이전 세속습관이 잔존된 것은 부근에 시초부터 조선인(족)들이 살고 있은 원인이 아닐지 한다.

박가툰의 가첩은 이미 연변박물관 민속 소장품으로 되고 있다. 박씨의 이주 사실(史實)을 실증하고 중국 조선족 이민사의 상한선(上限線)을 연구하는 귀중한 사료(史料)였기 때문이다. 박씨는 조선족의 대륙 이주가 청나라 광서 연간에 시작되었다고 하는 기존의 설을 허물어뜨리고 있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먼저 지난 번 퀴즈의 답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제일 동쪽에 훈춘의 버들방천에 있었던 그 부락은 ‘헤무기’라고 불렸다고 하는데요, 이 지명은 무슨 의미일까요?

 

네, 지방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헤무기’는 만족 말이며 메귀리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메귀리는 볏과에 속하는 한해살이풀 또는 두해살이풀로 구황식물救荒植物입니다.

 

계속하여 지명과 관련한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한반도의 상징적인 성씨인 박씨는 오래전부터 중국 대륙에 등장하는데요, 역사서인 《원사(元史)》에 따르면 원나라 환관 박모모는 원(元)나라의 도읍인 대도(大都, 북경)에 나타납니다.

원나라 역사에 기재된 이 환관 박모모의 이름은 무얼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원나라 역사에 기재된 이 환관 박모모의 이름은 무얼까요?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박은옥(MC),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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