赵雪梅
2021-12-02 19:25:07 출처:cri
편집:赵雪梅

영원한 친선의 메아리 - 천생 방송인 백일승씨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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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승】“2000년에 우리 방송이 반세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기념행사도 마련하고 기념책자도 내기로 했었는데요 저도 그때 무엇인가를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때 우리 선배님들의 회억록도 있고 우리 현직인원들의 연구논문이라든가 전망 같은 글도 있고 해서 저는 생각 끝에 노래를 하나 지어보는게 어떨까 싶어서 노래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마침 중국의 유명한 조선족 작곡가 김봉호 선생께서 저의 작곡요청을 기꺼이 수락해주셔서 이 노래를 만들게 되였습니다. 우리 방송이 친선의 뉴대, 우정의 가교라는 역할을 한다는 그런 취지를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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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유명 작곡가 김봉호 선생의 지휘로 <친선의 메아리>를 열창 중인 조선어부 임직원 들(백일승 씨: 첫줄 左1)

1999년7월, 중국 조선어(한국어) 국제방송 50주년 기념행사에서 방송부 임직원 전원이 <친선의 메아리>라는 노래를 열창하여 행사 현장을 뜨겁게 달궜다. 중국과 조선, 중국과 한국, 조선과 한국의 친선의 가교 역할을 꾸준히 해 온 조선어 방송 50주년을 기념하여 특별히 지은 노래이다. 중앙방송총국 조선어(한국어) 국제방송의 베테랑 방송인 백일승 씨가 노랫말을 만들고 <붉은 해 변강을 비추네>등 중국 전역에서 널리 불려지는 많은 명곡을 창작한 국가1급 유명 작곡가 김봉호 선생이 백일승 씨의 요청에 응해 곡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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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조선어부 임직원(백일승씨:뒷줄 右1)

조선어(한국어) 국제방송에 대한 한없는 열정으로 방송에 대한 노래를 만든 백일승 씨, 40년 가까이 방송인의 외길을 걸었다.

【백일승】“우리 방송이 꼭 35주년이 되는 1985년에 입사했습니다. 지방대학을 졸업하면서 저는 ‘촌놈’이라고 할까요 수도 베이징에 있는 중국국제방송국 국가방송사에 뽑혀서 입사한다는 것은 저에게는 대단한 행운이였고 영광이였습니다. 그때는 디지털 시대가 아니였기때문에 매일 일과가 좀 많이 어려웠어요. 타자기로 타닥타닥 매일 원고를 만들었고 또 녹음테이프를 안고다니면서 녹음하던 시절이였습니다. 지금도 그 타자기와 녹음테잎이 가끔 기억이 날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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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래식 녹음테잎이 가득했던 아날로그 시대의 스튜디오(백일승씨: 뒷줄 左1)

1985년 중국국제방송국에 입사해서부터 최근 은퇴할 때까지 백일승 씨는 40년 가까이 오로지 방송인의 외길을 걸어왔다. 그 세월 속에 조선어(한국어) 방송이 타자기로 기사를 작성하고 녹음 테잎에 프로그램을 녹음하던 재래식 녹음방송에서 디지털 라디오 방송, 뉴미디어, 멀티미디어로 발전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또 함께 했다. 백일승 씨는 아나운서와 기자, 번역 편집, 제작편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를 섭렵하면서 베테랑 방송인으로 되었고 그 과정에 조선어부 부주임, 주임, 동북아남아시아센터 부주임, 동북아중아시아센터 부주임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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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녹음 중인 백일승씨(左)

【백일승】“입사해서 몇년 간은 선배님들의 가르침 속에 방송을 배우고 익히느라 겨를이 없던 나날들이였습니다. 아나운서의 화술실력을 높이기 위해서 (아나운서들이) 1984년부터인가 조선중앙방송위원회에 가서 방송화술연수를 하게 됐습니다. 저도 1987년에 조선중앙방송위원회에 가서 조선 인민방송원으로부터 화술지도를 받은적이 있습니다.”

백일승 씨가 입사한 1985년은 온 나라가 개혁개방의 물결을 타던 그런 시대였고 조선어방송도 기사에서 프로그램 편성에 이르기까지 오래동안 유지되던 고정적인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고민을 많이 했다. 또 새롭고 변화된 방송을 하기 위해서 노력했으며 방송도 번영발전의 시대를 열어갔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방송기술이 도약적으로 발전했고 컴퓨터가 일상화되기 시작하고 인터넷이 나타났다. 이 무렵 백일승 씨는조선어방송의 부서장을 지내면서 다양한 혁신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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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 조선어부 임직원(백일승씨: 첫줄 右1)

【백일승】“1997년7월에 중국국제방송국이 석경산구에 있는 새 사옥으로 이전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우리 방송이 전통적인 아날로그 방송에서 디지털 방송으로 전환하는 전환의 시대에 진입했습니다. 그런 기술적 여건에서 우리 방송의 모든 임직원들이 다양한 업무영역을 개척하고 확장해나갔습니다.” 

1998년 뉴스 생방송 개시를 시작으로 수도권 FM방송, 공식 사이트 개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어 방송에 획기적인 변화가 발생하였다.

【백일승】“1998년11월에 원래 전부 녹음방송이였는데 뉴스생방송을 개시했고 1999년3월에는 베이징 수도권 FM방송을 개시했으며고 1999년12월에 우리 공식사이트를 개통했습니다. 우리 방송은 이로해서 마침내 대외, 대내 방송에 사이트까지 다양한 미디어 형태를 가진 그런 방송부서로 성장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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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12월 조선어 방송 공식사이트 개통 순간 

수도권 FM방송을 하면서 국내에서 조선어방송의 위상이 크게 향상했다. 한국 방송사와 공동 제작한 <베이징아리랑> 프로그램은 베이징 수도권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또한 공식 사이트 개통으로 라디오 수신기로만 방송을 청취하던 데로부터 인터넷으로 방송을 청취할 수 있게 되면서 청취자가 크게 늘었다.

【백일승】“중국 지도자들의 조선방문 또는 한국 방문, 그리고 상대국 수반의 중국 방문 이런 행사들을 많이 취재 했었는데요 출국 방문을 보면 1990년 중국 당과 정부 대표단의 조선방문, 그리고 1991년 중국 이붕 총리의 조선방문, 1992년 중국 양상곤 국가주석의 조선 방문 이런 행사들을 제가 수행취재했습니다. 또 1991년 조선 김일성 주석의 중국방문, 1993년 노태우 한국 대통령의 중국방문, 1994년 김영삼 (한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 그리고 1998년 한국 김대중 대통령의 중국 방문 이런 행사들을 제가 수행취재를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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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취재 기자로 활약(백일승  씨左1)

그 당시만 해도 핸드폰도 없었고 실시간 통신이 어려운 시절이였다. 취재 기사는 고정전화 또는 특별전송코너를 통해서만 국내로 전송 가능했다. 특히 국가수반 수행 취재는 상당한 책임감과 의무감이 동반되는지라 한번 취재를 나갔다오면 본의 아니게 다이어트가 되었다.

【백일승】“지금 돌이켜 보면 그 나날들이 너무나 보람스럽게 느껴집니다. 중국, 조선, 한국의 정상들을 지척에서 바라볼수 있고 이런 중요한 행사들을 현장에서 취재했다는 것을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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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조선어방송 55주년 기념대회(백일승씨 右1)

중국과 한국이 수교한 일년 여만인 1994년 설을 맞이하면서 조선어 방송이 그 당시까지만 해도 교류가 거의 없던 조선과 한국이 서로에게 설 인사와 축복을 전하도록 가교의 역할이라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백일승】“1994년 설을 맞으면서 저희들이 송구영신 특집방송을 만들었습니다. 남북의 교류가 그렇게 많지 않았던 시기였거든요. 그때 한국에서 한창 인기였던 조용필 가수와 최진희 가수를 전화취재 하고 마침 중국 방문중인 조선예술단의 가수를 초청 취재해서 서로가 우리 방송을 통해서 상대 청취자에게 설인사, 축복의 인사를 하도록 했고 또 그분들이 부른 노래를 저의 방송을 통해서 들려주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는 굉장히 파격적인 일이였다. 프로그램이 방송된 뒤 남과 북의 청취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고 국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전국적인 프로그램 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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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9월 연변조선족자치주 설립 50주년 경축대회 현장 생방송 (백일승씨 두번째줄 1)

은퇴하기에 앞서 백일승 씨는 10년 가까이 한국에서 파견근무를 하고 2020년 초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백일승 씨는 중국 국내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었고 변화와 발전이 컸으며 방송사에도 큰 변화가 있어서 이제는 라디오뿐만 아니고 동영상과 SNS 등 여러 분야에서 활발하게 일하는 것을 보았다.

변화하고 발전하는 방송사의 모습을 보면서 백일승 씨는 방송의 밝은 앞날이 계속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면서 후배들에게 따뜻한 조언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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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한국 서울에서 청취자 만남 행사 개최(백일승씨: 두번째 줄 左3)

【백일승】“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발전하는 그런 시대입니다. 또 언론인들에게는 더욱더 그렇게 느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급속히 변화하고 있는 인터넷기술, 5G, 4K, 8K에 이르는 영상, 또는 AI가 우리에게 도전을 거는 그런 시대입니다. 앞서가지 않으면 뒤쳐지기 마련이고 우리가 존재감을 가지려면 물론 선두자가 돼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후배들께서 시대의 흐름에 적극 순응해서 무한한 열정과 그리고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업무에 임한다면 또 그리고 앞날에 대한 예지력을 가지고 우리 방송에 임한다면 우리의 방송이 앞으로도 계속 큰 발전을 하지 않을까 그렇게 믿습니다.”

중국의 국제방송이 올해로 80주년을 맞이하고 조선어 방송이 71주년으로 고희를 넘겼다. 80년전 중국어와 일본어로 방송을 시작해서 오늘날 44가지 외국어로 세계에 중국을 알리고 해외에 40여개 지국을 두어 중국에 세계를 알리고 있는 국제방송은 80년 세월을 꾸준히 그래왔듯이 다양한 컨텐츠와 시대를 앞서 가는 기술혁신, 브랜드 육성으로 중국인과 세계인의 마음을 이어주고 더 화목한 지구촌을 만드는 친선의 가교의 역할을 계속 잘 해나갈 것이다. 친선의 메아리, 영원의 메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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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조선 평양에서 청취자 만남 행사 개최(백일승씨:가운데)

【백일승】

“푸르른 창공에 울려가는 목소리

언제나 변함없는 친선의 메아리

화목한 지구촌 꽃피워 가며

서로의 마음을 이어주는

자랑찬 목소리 CRI방송

영원한 메아리 CRI방송”

 

(조설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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