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正善
2021-12-09 13:43:45 출처:cri
편집:朱正善

타타르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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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르족은 몽골인종의 시베리아 갈래에 속한다. 이들은 본 민족의 언어와 문자가 있다.  언어는 알타이어계 돌궐어족 서부흉노(西匈)어 갈래에 속하고 문자는 아랍문자를 기초로 창제되었다. 타타르족은 위구르어와 카자흐어를 통용하기도 한다.   

타타르란 민족의 자칭으로 ‘초가집’이란 뜻이다. 한문 사서에는 타타르족을 달단(韃靼, 達怛)으로 기재하고 있다.

타타르족은 중국의 신강과 러시아연방, 우크라이나, 발칸, 카자흐스탄 등 나라와 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민족의 다수가 중국 경외에 살고 있다. 2010년 제6차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중국의 타타르족은 3556명으로 중국 경내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소수민족으로 집계됐다. 중국의 타타르족은 주로 신강 위구르자치구 경내의 천산(天山)북부지역과 이리(伊犁) 카자흐스탄자치주, 창지(昌吉) 회족자치주, 우루무치시에 거주하고 있다. 그 중 신강위구르자치구 창지회족자치주 치타이(奇臺)현 다취안(大泉) 타타르향이 중국에서 유일하게 타타르족이 주체인 민족향이다.       

타타르족은 고대 불가르족과 킵차크인, 돌궐화된 몽골인들이 장기간 어우러져 살면서 형성된 민족이다. 불가르족은 흉노족이 서쪽으로 이주한 뒤 카스피해 이북의 초원에 나타난 유목부락에서 생겨났다. 기원 7세기를 전후해 기타 유목부락의 잦은 습격으로 불가르 부락은 부득불 이주를 선택하게 되었고 그 중 일부가 볼가강 중류와 카마강 일대에 정착해 현지 토착민들과 융합되며 농업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이런 불가르인들이 그 후 카잔(喀山) 지역 타타르족의 중요한 한 갈래가 되었다.

20세기 초엽까지 타타르족은 자신들을 불가르인이라고 자칭했다.

그러다 13세기 중엽, 서쪽 정벌을 떠난 몽골인들이 ‘볼가강-카마강 불가르부락연맹’을 소탕했고 칭키스칸의 손자가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한 킵차크한국(金帳汗國)을 세웠다. 깁차크한국의 주민은 주로 불가르인과 돌궐어를 사용하는 킵차크인들이었다. 킵차크한국의 통치자인 몽골인들은 현지 주민들의 영향하에 점차 돌궐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14세기때부터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15세기, 킵차크한국이 쇠락으로 나아가며 카잔한국에 대체되었고 카잔한국의 수령은 자신을 몽골인의 후대인 타타르로 자칭했다. 그 때부터 타타르가 카잔한국 및 그 인근 부락 주민들의 호칭으로 바뀌었다.

중국 경내의 타타르족은 19세기 20,30년대와 그 후 잇달아 지금의 러시아(옛 소련) 통치하의 카잔, 우파(烏法), 쉬미레지(斜米列齊), 자이쌍(斋桑)등 지역에서 이주해왔다.

타타르족이 중국에 이주한 시기는 대체로 세 단계로 나뉜다.

제1단계는 19세기 20~30년대이다. 19세기이후 러시아(옛 소련)의 농노제 위기가 날로 가심해지며 볼가강과 카마강 일대의 타타르인들의 토지가 대량으로 강점되었다. 하는 수 없이 각지로 피난을 떠나게 된 타타르인 일부는 볼가강 하류와 시베리아, 카자흐스탄을 거쳐 중국 신강 북부의 부얼진(布爾津),하바강(哈巴)에 이르렀고 일부는 남쪽으로 이주해 중아시아에 이른 뒤 파미르의 타스쿠얼칸을 경유해 중국 신강 남부에 들어왔다. 지금 아러타이(阿勒泰), 부얼진 등지의 타타르족의 다수가 이들의 후손으로 가난한 목민들이 위주였다.

제2단계는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이다. 1851년과 1881년 중국과 러시아가 ‘중러일리파하대(伊犁巴哈臺)통상규약’과 ‘중러일리조약'을 체결하면서 제정러시아가 신강 통상 무역에서 많은 경제특권을 향유하게 된다.따라서 많은 제정 러시아 상인들과 카잔지역의 타타르 상인들이 신강으로 모여들게 되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신강에 남는다. 이 시기 이주한 타타르족 중에는 지식분자와 성직자도 있어 이들은 신강에 학교와 청진사를 세우기도 했다.

제3단계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서부터 20세기 30년대까지이다. 이 시기 신강에 이주한 타타르인이 가장 많으며 이주 원인 또한 다양하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제국주의 전쟁의 총알받이가 되지 않기 위해 신강에 이주한 타타르족 청년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10월 혁명이후 타타르족의 적지 않은 소상공인과 수공업자, 농민, 지식인들이 옛 소련의 강제집단화를 피해 신강으로 이주해왔다. 이 시기 신강으로 이주한 타타르족 중 일부는 자본가, 지주, 부농 등 10월 혁명의 타도대상이다. 최초로 신강에 이주한 타타르인 일부는 아러타이 이르티시강 유역의 카자흐족 카라카스 부락에  자리 잡았다.그 후손들은 카라카스 부락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준가얼분지 동남 끝에 이주했고 그 후 20세기 초반에 지무싸얼(吉木薩爾)과 치타이(奇臺)현 접경지대의 바이양(白楊)강 양안에 이주했다. 그 후 또 일부 경외와 우루무치 등 지의 타타르인이 이 곳에 정착했다. 타타르인구와 가축이 늘면서 청정부는 서쪽으로 샤오둥거우(小東溝), 동쪽으로 쓰취안거우(四泉溝) 일대의 목장을 타타르인에게 떼주어 그들이 유목생활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하여 오늘의 창지회족자치주 경내에 상대적으로 집중된 타타르 거주구역이 형성되게 됐다.

1944년부터 1949년까지 삼구(三區)혁명시기, 적지 않은 타타르족이 삼구혁명사업에 적극 참여해 큰 기여를 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후 타타르족은 기타 각 민족 인민들과 함께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타타르족은 지금 전국 각 민족과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민주권리를 평등하게 향유하고 있으며 국가 대사와 현지 사무의 관리에도 많이 참여하고 있다.

타타르족은 신강의 평화 해방 전에는 주로 상업에 종사했다. 그것은 19세기 20~30년대 신강으로 이주해온 타타르인들이 주로 소상공인들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국민당 통치시기에는 악성 인플레이션과 물가폭등으로 타타르족 상점이 두 개 밖에 남지 않았으며 개혁개방 후에 상업전통을 다시 회복했다. 2000년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타타르족 인구 중 상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약 17%에 달했다. 타타르족에게 있어서 목축업은 상업버금으로 가는 중요한 경제 분야이며 그 외 이들은 농업에도 종사한다. 

타타르족은 교육을 중시하는 민족으로 신강의 교육발전을 위해 많은 기여를 했다. 많은 타타르 지식분자들이 신강 각지에서 학교 건설에 참여했으며 타타르족 학교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위구르족 학교에서도 교편을 잡고 농촌이나 목축구에 가 인재양성에 힘을 쏟기도 했다. 신강에 세워진 초기의 현대화 학교들은 타타르인의 참여를 떠날 수 없었다.타타르족 인구의 문맹률은 아주 낮아 약 2.13%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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