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23 15:54:07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2년 3월 24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3월의 네 번 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임봉해(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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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인 24일은 올해 양력으로 83일째 되는 날입니다. 올 한해가 마감할 때까지 282일 남았습니다.

‘역사속의 오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3월 24일은 세계 결핵의 날입니다.

세계 결핵의 날은 그 무슨 경축하기 위한 날이 아닙니다. 이날은 불치병으로 알려져 있던 결핵의 발병 원인인 결핵균 발견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정되었습니다.

비록 기나긴 역사의 강이 흘렀고 우리가 그동안 과학적으로 많은 돌파를 가져왔지만 인간의 최대의 킬러는 여전히 사납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세계 결핵의 날은 세계적인 범위에서 사람들의 지지를 동원하고 결핵 방지를 강화하기 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금주 화요일 22일은 세계 물의 날입니다.

세계 물의 날은 사람들에게 물 절약 의식을 불러일으키고 물 자원에 대한 보호를 강화하기 위한데 주요한 취지를 두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만족시키고 상업과 농업의 물 자원에 대한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유엔은 장기간 물 자원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인기된 글로벌 물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977년에 소집된 ‘유엔 물 회의’는 물이 심각한 사회위기로 될 것이며 석유 위기후 다음 위기가 바로 물이 될 것이라고 전 세계에 경고했습니다. 1993년 1월 18일, 제47차 유엔총회는 결의를 통과하고 해마다 3월 22일을 ‘세계 물의 날’로 정했습니다.

물은 생명이 생존할 수 있는 기반이며 사회 경제발전에서 없어서는 안 되고 대체할 수 없는 중요한 자연자원이며 환경요소입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인구 성장, 공농업 생산 활동, 도시화의 급격한 발전은 유한한 물 자원과 물 환경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글로벌 범위에서 수질의 오염, 물 수요의 급속한 성장 그리고 부문 간의 경쟁적인 로 초래합리한 이용은 물 자원을 더 결핍하게 했고 물 환경이 보다 악화되게 했으며 사회경제의 발전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고 인류의 복지를 위협했습니다.

사회와 경제의 모든 활동은 담수의 공급량과 품질에 아주 크게 의지되고 있습니다. 인구성장과 경제발전에 따라 많은 나라는 물 부족 경에 빠졌으며 경제발전에서 제한을 받았습니다. 물의 보호와 지속성 관리는 지방과 전국 그리고 지역간, 국제간의 대중의 의식을 높일 것을 필요로 합니다.

세계 물의 날은 지구의 물 자원을 절약하고 국가와 전 세계의 물 부족 를 해제하기 위한데 있습니다.

사람들의 물 의식을 불러일으키고 보다 전면적인 물자원의 지속가능 체제, 상응한 운행 메커니즘을 구축하기 위해 1993년 1월 18일, 제47차 유엔 총회는 유엔 환경발전대회가 제정한 ‘21세기 행동의정’의 제안에 따라 제193호 결의를 채택하고 해마다 3월 22일을 ‘세계 물의 날’로 정했습니다. 세계 물의 날은 물 자원에 대한이고 전면적인 통일 계획과 관리를 추진하며 물 자원 보호를 강화하여 날을 따라 심각한 물 결핍 문제를 해결하려는데 취지를 두었습니다. 이와 함께 광범위한 홍보교육활동을 전개하여 물자원에 대한 개발과 보호의식을 게 됩니다.

모두 용수를 절약하여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 눈물로 되지 않게 합시다. 

[간주]

한국 황명채 청취자가 3월 19일자 수신보고서를 보내왔습니다.

[청취자 내신]

“안녕하세요. 황명채입니다.

3월 19일 베이징시간 05시, 한반도시간 06시 수신보고를 올려드리겠습니다.

중간중간에 잠시 잡음에 묻히다가 돌아오는 편입니다.

 

지난 메일을 방송에서 소개주시면서

수신확인증을 중앙방송총국 통합에 맞춰 새롭게 준비하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제작이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발급이 가능하다고 회신을 주신다면 자세한 연락처를 남겨드리겠습니다.

 

함께하는 멜로디 선곡을 홈페이지에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현재 홈페이지에서는 휴대전화 환경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 적습니다.

예를 들면 편성표나 선곡 내용, 방송 원고 같은 것들은 PC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 주파수 안내와 프로그램을 담당하시는 아나운서, 출연자 여러분을

홈페이지에 소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우리 방송을 청취, 소감을 적어준 황명채 청취자님 감사하구요.

수신확인증은 중앙방송총국에서 통합된 3사의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여전히 새롭게 제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발급이 가능한대로 꼭 소식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태양이 적도 위를 똑바로 비추고 지구상에서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때가 춘분, 추분입니다.

올해 3월 21일은 바로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입니다. 춘분은 봄의 네 번째 절기로 봄이 바야흐로 무르익어갑니다.

춘분에 즈음한 18일 뜻밖에 기러기 떼가 나타나서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고 길림성 왕청현의 리강춘 청취자가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18일, 기러기가 왕청현 천교령진 상공에서 떼를 지어 날아예는 경상이 촬영애호가에 의해 포착되었습니다. 기러기는 봄을 알리는 상징이며 이들의 출현은 사람들에게 봄의 생기와 희망을 갖다줍니다.

이 기러기들은 상공에서 질서정연한 대형을 만드는가 하면 각양각색의 조형도 만들어냈다. 이주하는 계절이면 수십마리, 수백마리, 심지어는 수천마리가 기러기떼를 형성하는데 그중 경험이 있는 코기러기가 비행을 이끕니다. 이들은 때로는 '인'자, 때로는 '중'자, 때로는 '일'자 모양으로 줄지어 북쪽으로 향해 날아갑니다. 그 장면은 장관을 이루며 한폭의 아름다운 생태화폭을 이뤘습니다. 보기 드문 기러기떼들의 비상은 짧은 시간안에 수많은 관광객을 매료했습니다. 

기러기떼가 천교령 상공에서 자유롭게 날아예도록 하기 위해 천교령삼림공안국은 부단히 조류를 보호할 데 관한 선전을 강화함과 아울러 '식용 금지, 포획 금지, 공생공존' 활동을 펼쳤습니다. '불법 야생동물 거래를 전면 금지하고 조류를 포획하는 위법 행위를 타격하는 것을 꾸준히 강화해 조류들이 푸른 하늘에서 자유롭게 날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

 

네, 봄을 알리는 기러기가 떼를 지어 날아왔다는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리강춘 청취자가가 전했듯이 누리에 봄의 생기와 희망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간 주]

[중국 대륙의 조선인 옛 마을]

이 시간에는 ‘대륙의 옛 마을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북대하의 외로운 ‘섬 마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북대하의 외로운 ‘섬 마을’

 

북방의 철새처럼 만리장성을 건너 왔을까?

산해관 남쪽의 북대하(北戴河) 근처에 나타나는 조선족마을에 호기심이 부쩍 동한다. 정말이지 북대하가 중국 최대의 휴양지라고 해서 언제인가 동북의 조선족들이 대량 이주하여 이 마을을 이뤘을까.

북대하는 하북성(河北省) 북단의 해변 마을로, 청(淸)나라 때 대씨(戴氏) 집안의 산을 강물이 흘러 지난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5,6년 전, 관방 신문 《인민일보》는 화북 지역 언어문화의 ‘외로운 섬’이라고 하는 내용의 기사로 북대하의 이 조선족마을을 지면에 올린 적 있다. 조선족들이 집거한 이 마을은 장장 70년 동안 주변 타민족의 동네에 홀로 둘러 있다는 것이다.

그때는 북대하가 아니라 하북성 무녕현(撫寧縣)의 서하남(西河南) 조선족촌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러나 북대하와 불과 20리 정도 상거한 마을이니 진작 무녕현의 성씨를 바꿔버릴 법 한다. 실제로 북대하 기차역에서 택시에 오른 후 얘기를 몇 마디 나누기 전에 벌써 조선족촌의 동네 어귀에 당도하고 있었다.

택시가 차를 멈춘 것은 북적이는 인파로 길을 메운 서하남의 마을 장터 때문이었다. 재래 장이었는데 아침에 해가 뜨면 웅기중기 모였다가 점심에 해가 중천에 오르면 구름처럼 흩어진다고 한다.

문득 장터의 어디선가 귀 익은 말소리가 들렸다. “자야, 마이 기다린나?”

경상도 말투의 아줌마 두셋이 좌판에 둘러서 있었다. 뒷이야기이지만, 조선족마을에는 평안도와 함경도 태생의 사람들도 있지만 경상도 출신의 사람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촌민 정성수가 알려준 마을의 ‘내막’이다. 장성수는 촌민위원회 부근의 농가를 찾아 만난 마을의 오랜 토박이다. 정성수는 1959년에 대륙 북쪽의 흑룡강성(黑龍江省) 치치하얼(齊齊哈爾) 부근에서 이곳에 이주를 했다고 한다.

이 고장은 날씨가 따뜻하고 우량이 충족한데다가 무상기가 240일이나 되어 그야말로 흑룡강성 오지의 마을이 비할 수 없는 곡창이었다. 게다가 북대하는 청나라 때부터 해변을 끼고 있는 휴양명소로 주변 환경이 일품이었다.

정성수의 외삼촌은 일찍 1952년 이 마을에 행장을 풀었다고 한다. 그때 요녕성(遼寧省)의 개원(開源), 창북(昌北) 등 지역에서 이씨 등 성씨의 조선족 14가구의 55명이 이곳에 이주했다. 마을의 어귀에 세운 석비의 비문에 따르면 서하남의 조선족촌은 로 이때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기실 조선족 농부들이 최초의 목적지는 북대하가 아니었다. 그들은 원래 북대하를 지나 남쪽의 천진(天津) 녕하현(寧河縣)의 노태(盧台)농장을 목적지로 삼았다고 정성수가 밝히고 있었다. 일찍 1936년, 일본군은 녕하 지역에 ‘군곡(軍谷)회사’를 설치하고 현지인의 땅을 강매(强買)하였으며 일본과 조선에서 이민을 데려다가 노태농장을 세웠다. 이때 농장에 1천여 명의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정성수가 옛 이야기를 전했다. 녕하현 현지의 사람들은 조선인이 군집하고 있다고 해서 농장을 일명 ‘고려인 울타리(高麗圈)’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10여년 후 장성 저쪽에서 개척민들이 다시 찾아오던 1952년 노태농장에는 벌써 조선인이라곤 살지 않고 있었다. 정성수 씨는 1945년 광복(8.15) 후 조선인들이 잇따라 농장을 모두 떠났다고 말한다.

하북성 《녕하현지》에 따르면 그 후 전란으로 하여 논이 황폐화되고 수리시설이 파괴되었다. 공화국 정부에서 농부를 모집, 농장을 재건한 것은 1950년대 중반의 일이다. 그러나 현재로선 옛 마을의 옛 이야기는 더는 한 켤레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1976년 부근 당산(唐山) 대지진으로 노태의 옛 시설이 철저히 파괴되었고, 옛날 노태농장에서 살던 노인들이 거의 다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때 조선족 농부들이 북대하 지역을 찾은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찍 1939년 박씨 성의 형제가 친구의 소개로 서하남 일대에 논을 가꾼 적 있었다. 이 두 형제가 벼농사에 성공하자 그해 겨울과 이듬해 봄 동북에서 박씨, 김씨, 최씨, 우씨, 황씨 등 30여 가구의 친척과 친구가 이 지역에 연이어 이주, 거주했다. 1940년 봄, 조선인들은 부근의 양하(洋河)에 흙을 쌓아 보를 만들고 10리 ‘고려구(高麗溝)를 파서 강물을 서하남까지 에워왔다. 나중에 그들이 가꾼 논은 무려 120여 정보 되었다고 《무녕현지(撫寧縣志)》가 기록한다. 그들 역시 노태농장의 조선인처럼 광복 후 가산을 처분하고 전부 반도에 돌아갔다.

그때까지 서하남의 현지인들은 아직 벼농사에 숙련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서하남의 땅이 밭농사에 적합하고 논농사에는 불편한 게 아니었다. 속칭 염지(鹽地)라고 일컫는 바다 연해의 알칼리성 토지라서 농사 자체가 어려웠다. 조선인 농부들이 현지의 땅을 쉽게 매입, 개간할 수 있었던 원인이기도 했다. 조선인이 이주한 후 논은 다시 황폐화 되었으며 1949년 당산(唐山) 지역의 농장에 징수되었다.

정성수의 가족이 서하남에 올 무렵인 1959년 초 조선족 37가구 183명이 서하남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시초의 1952년 봄부터 촌사(村史)에 등장하는 조선족촌의 인구는 한동안 들쑥날쑥 큰 변화를 보인다. 비록 1952년 봄, 현지에 이주한 조선족 농부들이 부근의 군대와 농장의 지원으로 이전의 보와 ‘고려구’ 를 복구했지만, 잇따른 대량의 인구 이주에 따른 논의 수원문제를 당분간 전부 해결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53년 2월경, 요녕성과 길림성(吉林省), 내몽고(內蒙古) 등 지역에서 서하남에 집단이주했던 조선족 36가구 138명의 일부는 당산 정부의 권유로 그해 여름 원적지로 부득불 돌아가기에 이르렀다. 참고로 이 가운데서 2가구는 연말에 또 서하남에 돌아왔다고 한다.

조선족 농부들은 도랑을 만들고 염지에 물을 넣어 소금기를 씻어냈으며 밭에 두렁을 만들어 두 뙈기 세 뙈기의 논을 늘였다. 뒤미처 동북 3성과 내몽고 지역에서 조선족 농부가 소식을 듣고 비옥한 농토를 찾아 북대하에 찾아왔다.

정성수는 조선족 농부들이 그들끼리 촌락을 이룬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의 일이라고 했다.

1954년, 북대하의 조선족 농부들은 초급사를 설립, ‘녕선사(寧鮮社)’로 명명하며 1959년 ‘수전(水田) 전문대대(大隊, 촌)’로 개명한다. 1984년, 대대의 편제를 취소하고 정식으로 서하남 조선족촌으로 정명(正名) 한다. 마을 비석에 새김을 한 촌사(村史)의 약지(略誌)이다.

《인민일보》가 기사를 게재할 무렵 조선족촌은 156가구의 513명에 달하고 있었다. 《인민일보》는 북대하의 조선족촌이 조선족 본 민족 내부의 풍속 습관을 지키고 있어서 조선족 언어문화를 완정하게 유지하고 이로써 조선족 민족성분의 단일하고 절대적인 관계를 보증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조선족촌은 서하남의 장터에 이웃, 마을 어귀의 벽과 거리에 씌어있는 조선족 글의 환영 문구 등으로 이색적인 정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하북성 지역에는 북대하 서하남의 조선족촌을 비롯하여 조선족 집거촌이 공식적으로 무려 8개나 되지만, 이처럼 조선족 언어문자와 풍습이 남아있는 마을은 이 서하남의 조선족촌이 유일하다.

산해관(山海關) 남쪽 오지의 이 외로운 섬에도 도시화의 바람과 한국 출국 붐은 예외가 아니었다. 현재 140가구의 450여명 인구가 살고 있으며, 5,60명의 노인이 마을을 지키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호적상으로는 타민족을 한 가구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어서 그나마 조선족마을이라는 명맥을 계속 잇고 있는 것이다.

정성수는 거의 노인들만 마을에 남아있는 상황이이서 논을 부칠 수 없다고 이유를 말했다. 2016년 조선족 한 가구가 논 100무를 경영하면서 조선족촌의 또 하나의 ‘외로운 섬’으로 되고 있다고 한다.

‘조선족학교’라고 하는 마을 근처의 ‘북대하신구 조선족소학교’의 조선족학교 역시 ‘외로운 섬’이었고, 학교의 조선족은 더구나 ‘외로운 섬’의 고독한 ‘등대’였다.

1940년대, 서하남 최초의 조선인들은 학교를 세우지 않았고, 자식들을 부근 창려(昌黎)의 현성 학교에 보냈다고 한다. 조선족학교는 1957년 현지의 무녕현 서하남소학교에 부설한 조선족반으로 시작되었다. 교장 김진일의 말에 따르면 조선족소학교는 마을에 조선족이 아주 흥성하던 1963년에 정식으로 설립했다. 김진일은 이 조선족소학교의 제4대 교장이다. 그 역시 정성수처럼 경상도 출신이며 또 조선족촌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1988년 말, 조선족소학교에는 6개 학급의 6개 수업반이 있었으며 재학생이 60명 되었다. 연변교육출판사에서 출판한 조선족소학교의 통용 교과서를 사용했다. 연변의 여느 조선족학교처럼 서하남조선족소학교도 지난 세기 7,80년대 전성기를 이뤘고 90년대부터 급속도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얼마 전 북대하를 답사하면서 들렸던 부근 노룡현(盧龍縣)의 신나채(新挪寨)가 새삼스레 눈앞에 떠올랐다. 신나채 역시 이름 그대로 조선족촌처럼 새로 옮겨서 만들어진 마을이다. 당(唐)나라 정관(貞觀) 연간 주변에 분산되어 있던 촌락을 재차 이동하여 한데 합쳐 놓았으며 이로 하여 신나촌이라고 불린다고 마을의 석비가 분명하게 적고 있다. 현지(縣志)는 이 마을을 집성(集成)했던 원주민의 신분은 고려인이라고 낱낱이 밝힌다. 신나채는 그때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어명으로 지은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원주민의 정체를 감감 모르고 있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길림성 돈화에는 세계의 제일 큰 비구니의 수련 도장이 있는데요, 이 도장은 현지를 도시 이름을 의미하는 자연적인 조형물로 되고 있습니다. 이 도장의 이름은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길림성 돈화에는 세계의 제일 큰 비구니의 수련 도장이 있는데요, 이 도장은 현지를 도시 이름을 의미하는 자연적인 조형물로 되고 있습니다. 이 도장의 이름은 무엇이겠습니까.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임봉해(MC),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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