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01 11:27:18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2년 3월 31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3월의 다섯 번 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임봉해(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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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인 31일은 올해 양력으로 90일째 되는 날입니다. 올 한해가 마감할 때까지 275일 남았습니다.

이날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태어났고 또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날 많은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으며 영원히 잊지 못할 날로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평범한 날이며 또 평범하지 않은 날입니다.

‘역사속의 오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2008년 3월 31일, 올림픽 성화 환영식 및 성화 봉송 가동식이 천안문 광장에서 성대하게 열렸습니다. 호금도 당시 주석이 의식에서 직접 성화에 점화했으며 베이징 2008년 성화 봉송의 시작을 선포했습니다.

베이징에서 출발한 성화 봉송은 경외 봉송의 간섭, 사천 문천의 특대지진 재해의 영향을 이겨내고 오대주 19개 도시와 전국 각 성, 자치구, 직할시 그리고 홍콩특별자치구, 마카오특별자치구의 봉송을 거쳐 130일 동안 15만킬로미터의 여정을 마쳤으며 봉송주자 2만 1880명이 참가했습니다. 이번 성화봉송은 올림픽 사상 봉송 노선이 제일 길고 범위가 제일 크며 참여자 숫자가 제일 많은 성화봉송 활동으로 베이징 올림픽경기대회에 좋은 분위기를 마련했습니다.

3월 31일은 국제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입니다. 이날은 2009년 미국에서 시작된 기념일입니다. 이날 여러 나라에서 차별에 반대하고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당당하게 드러내자는 취지의 행사들이 열립니다.

3월 31일은 몰타의 국경절입니다.

2012년 3월 31일, ‘지구의 한시간’ 활동의 날이 열렸습니다.

2013년 3월 31일, 중국 상해가 전 세계적으로 처음 신종 아형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조류독감을 발견했습니다.

1927년 3월 31일, 중국 청나라 유신파 대표인물인 강유위가 청도에서 병사했습니다.

 [간 주]

한국 남부지방에서 벚꽃 피는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면서 김연준 청취자가 글을 보내왔습니다.

[청취자 내신]

“춘분이 지나면서 기온도 올라 완연한 봄기운을 만끽하는 요즘입니다. 

백목련과 개나리가 피기 시작했으며 남부지방에서는는 벚꽃 소식도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코로나 확진자는 일일 평균 30만명대를 기록하고 있으며 지난 주말에 일일 18만명 대를 기록하면서 감소세로 돌아선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동방항공 소속 민항기 추락사고로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 사고와 관련해 유가족 여러분께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행히 블랙박스를 회수해 분석하고 있으니 차후 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 대책이 마련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주 한국의 차기 대통령인 윤석열 당선자와 습근평 주석간 전화통화를 가졌습니다. 

통화에서 한중수교 30주년을 맞이해 한중관계 발전을 이뤄나가자는데 뜻을 같이하고 윤 당선인은 상호존중과 협력 정신으로 한중 관계 발전을 지속해 나가기 위해 습근평 주석과 함께 노력해 나가길 희망한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습근평 주석은 양국은 이사 갈 수 없는 가까운 이웃으로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발전을 촉진함으로써 양국 국민들에게 혜택을 가져다주도록 함께 노력해 나가자고 말했습니다.

양국은 고위급 전략적 소통을 강화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실질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로 했습니다.

한국의 새로운 정부와 중국의 우호관계가 이전 정부 보다 더욱 발전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김연준”

네, 올해는 한국 새 정부가 출범하는 첫해입니다. 첫해를 맞이하여 한국 새 정부와 중국의 우호관계가 보다 좋아지길 바라겠습니다.

한국의 봄기운과 더불어 김연준 청취자가 보내온 소식이었습니다.

 [간 주]

[중국 대륙의 조선인 옛 마을]

이 시간에는 ‘대륙의 옛 마을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모란꽃의 소택지에 갇힌 황제의 후예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란꽃의 소택지에 갇힌 황제의 후예들 

아무래도 먼저 설명을 하고 건너가야 할 것 같다. 아니면 강의 소택지 하택(菏澤)을 연꽃의 소택지 하택(荷澤)으로 잘못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고장은 워낙 선진(先秦) 시기 산동(山東) 남부의 아주 이름난 늪이었다. 일찍 제왕 요(堯)가 용을 기르던 늪이 있었으며 실제 당(唐)나라 때 용의 못이라는 의미의 용지(龍池)라고 불렸다고 전한다.

“옹정(擁正) 13년(1735) 곽현(郭縣)을 부설(附設), 강역은 주(州)의 옛것대로였으며 하택(菏澤)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청(淸)나라 건륭(乾隆, 1736~1796) 21년본(本)의 《조주부지(曹州府志)》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훗날 경내에 모란꽃이 많이 난다고 해서 원래의 하택 현성지역을 모란구(牡丹區)라고 개칭했다고 우리 일행을 안내했던 유충(劉忠)이 말했다. 다들 낙양(洛陽)을 모란꽃의 고향이라고 말하는데, 기실 모란꽃으로 유명한 곳은 바로 하택이라는 것이다.

당(唐)나라의 무측천(武側天, 624~705)이 겨울날 당장 꽃을 피우라는 칙지를 내리고, 나중에 이를 따르지 않은 모란을 전부 뽑아서 추방시켰다고 한다. 이 때문에 고도(古都) 낙양은 ‘낙양화(洛陽花)’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모란의 재배면적이 제일 크고 품종이 제일 많은 곳은 낙양이 아닌 이 하택이라는 것이다.

모란의 품종은 1천여 종이나 되는데요, 해마다 곡우를 전후로 뇌택호(雷澤湖)에 만발한다. 꽃이 피는 4,5월이면 뇌택호는 금세 붉고 희고 검고 푸르며 노란 꽃으로 뒤덮인다. 당나라 때의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읊조리듯 “꽃이 피고 꽃이 지는 20일, 성의 사람 모두 미친 듯 즐긴다.”

하필이면 섣달 그믐날에 우리 일행이 하택을 찾은 것은 뇌택호가 아니라 초하룻날 새벽의 마을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하택 시내의 남쪽 교구에 있는 옛 마을 유성촌(劉城村)은 마을이 생긴 지 약 6백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한다. 유충은 유성촌에서 나서 자란 알짜배기 토박이다.

사실상 대륙에서 옛 촌락은 하루 밤 사이에 꽃이 지듯 소실되고 있다. 국가통계국의 수치에 따르면 2000년 중국에는 무려 360만개의 자연촌이 있었지만, 2010년에 270만개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하택 외곽의 유성촌은 아직도 흥성하고 있다고 유충이 말하고 있었다.

유충은 초하룻날의 이른 새벽에 호텔에 와서 일행이 주숙한 방의 초인종을 눌렀다. 설날은 중국의 제일 성대한 명절이다. 섣달 그믐날 한족들은 자시(子時) 즉 밤 12시에 물만두를 먹는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는 의미로 물만두를 ‘교자(交子)’라고 부른다. 이 물만두를 유성촌은 그믐날이 아닌 초하룻날 아침 6시에 밥상에 올리며 뒤미처 이웃 어르신에게 인사를 다녀온다는 것이다.

유충은 산동무용대학의 교원으로 있는데, 이번에 설을 쇠고자 미리 고향마을로 돌아왔다고 한다. 처마 밑에 옥수수가 주렁주렁 걸리고 툇마루에 옥수수의 자루가 더미로 무덕무덕 쌓인 그의 고향집은 시골의 정취가 다분했다. 객실 정문 맞은쪽의 벽에 집안의 가계도가 걸려 있었고, 가계도 앞의 제사상에 향불이 피어나고 있었다. 마을의 집집마다 모두 이런 가계도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에피소드가 하나 생겼다. 유충의 모친이 손님에게 교자 즉 물만두를 올리면서 ‘밴새’라고 말하고 있었다. ‘밴새’는 연변의 조선족들이 물만두를 이르는 말로, 실은 중국말 ‘편식(扁食)’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 ‘편식’은 대륙 남부 복건성(福建省)의 특유한 어휘이다.

정말로 유씨의 시조는 이 어휘가 사용되고 있는 복건성에서 이주했다고 유한봉(劉漢峰, 78세)이 말하고 있었다. 세배를 하기 위해 찾은 유충을 따라 유한봉 옹을 만났다. 유한봉 옹은 마을 소학교의 교원 출신으로 옛날의 시골 훈장처럼 유씨 가계의 역사에 깊은 학식을 갖고 있었다.

중시조 유언심은 원(元, 1271~1368) 나라 때 포태현에서 현위(縣衛)로 있다가 그냥 머물렀다고 한다. 조주(曹州, 하택의 옛 지명) 일대는 요․금(遼․金), 원나라 때 북방민족의 남침 경유지였다. 이에 따라 병란이 심했고 또 황하가 범람하면서 땅이 황폐하고 인가가 희소했다. 명(明)나라 초, 정부는 산동 등 지역의 농부를 이주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게 했다. 영락(永樂, 1403~1425) 연간, 유언심은 세 아들을 데리고 금제(金堤, 하택 남쪽 지역)의 북쪽에 이주하여 그곳에 안착하였다. 이때부터 100여 년 동안 유언심과 그 후손은 촌락을 만들고 성채와 담을 세웠다. 성채는 날을 따라 나무처럼 커지고 높아졌으며 마치 성읍을 방불케 했다. 나중에 촌락의 이름을 유씨의 성곽이라는 의미로 유성(劉城)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마을에서 생존하고 있는 유씨의 제일 높은 항렬은 제19대라고 한다. 유씨네 가계도에 따르면 유충은 바로 19대손이다. 이에 따르면 유충이 마을에서 세배를 올릴 가문의 연장자는 유한봉 한명 뿐이라는 것이다. 설 인사를 다니는 마을 사람들이 유독 유충의 집에 줄을 제일 많이 잇고 있는 이유였다.

설 인사를 다니는 사람들이 길에 줄레줄레 나타났다. 구경을 나가려는 일행에게 유충의 모친은 문어귀의 홰나무를 제발 다치지 말라고 재삼 귀띔을 하고 있었다.

유충의 모친은 홰나무가 50여 년 전에 고목에서 새로 움텄다고 하면서 ‘홰나무 할배(槐樹爺爺)’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홰나무에는 누군가 얼핏 홰나무를 다친 탓으로 그 무슨 병을 앓았다는 이야기가 여러 켤레나 있었다.

신령스런 나무는 이 홰나무처럼 산 나무만 아니었다. 집마다 문어귀를 가로막는 죽은 토막나무가 있었다. 유충의 말을 따르면 귀신을 쫓는 액막이 나무인데, 음력 그믐날부터 초하룻날까지 사용한다고 한다. 또 이날만은 전기나 가스 대신 풍구를 쓰며 ‘마디마다 향상’한다는 의미의 ‘절절승(節節升)’으로 깻잎 대를 아궁이에 태운다. 객당에 들어서는 문설주의 양쪽에는 특별히 문신(門神)을 공양하여 섬기고 있었다.

유성촌의 제일 성스런 곳은 궁극적으로 마을의 유씨 종묘였다. 동네방네 설 인사를 마친 사람들은 두셋씩 짝을 지어 종묘로 가고 있었다. 길가에는 조선족마을의 전혀 만날 수 없는 풍속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마을에 어린애가 와글와글 들끓고 있었다

종묘 바로 옆의 소학교에는 유충이 다니던 시절 1학년만 해도 3개 반급이 되었다고 말한다. 지금은 부근 마을의 어린이들까지 이곳으로 다니면서 학교의 규모는 오히려 더 늘어나고 있었다.

설 무렵이었지만 종묘 역시 학교의 개학날처럼 북적이고 있었다. 음력설이나 청명 날에는 1만 명이 종묘에 찾아와서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유성촌은 1천여 가구의 3천 3백여 명 상주인원이 있는 마을이다. 마을 가족은 물론 친지 이상으로 종묘를 찾아오는 셈이다. 실제로 유씨의 종족은 유성촌 부근의 50여개 마을에 분포하며, 명절 때면 이런 마을은 대표 등을 종묘에 파견하고 있었다.

예전부터 종묘가 사람들의 심중에 메카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종묘에 전시되어 있는 유씨의 제5대 인물 영정은 명나라 때의 유물이며 동란 때 어느 촌민의 품에 감춰져 보존되었다고 한다. 종묘는 하택시 정부에 의해 올해부터 구급(區級) 문화재로 등재되고 있었다.

유충은 마을의 자랑은 그뿐만 아니라고 말한다. 마을에는 유씨 시조의 전설도 전한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유씨 시조는 유성촌을 만든 명나라 때의 유언심을 앞서 동한(東漢)을 개국한 황제 유수(劉秀)를 말한다. 신망(新莽, A.D.8~23) 말년, 천하가 혼란하자 전 조대의 혈통을 갖고 있던 유수는 고향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이 무렵, 유수는 적군이 뒤쫓자 현 유성촌 부근의 동굴에 몸을 숨겼다. 유수는 동굴에서 잠깐 눈을 붙이다가 문득 벌레 하나가 목덜미에 기어오르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유수는 마음이 언짢아서 냉큼 손가락으로 벌레를 두 동강 냈다. 이때 갑자기 동굴 밖에서 적군의 인기척이 들렸다. 겨우 밖으로 몸을 피한 유수는 그제야 벌레가 위급한 상황을 알리느라고 그의 목덜미에 기어올랐다는 걸 깨닫는다. 나중에 그는 동강난 벌레를 찾아 다시 하나로 붙여놓았다. 그때부터 이 벌레는 몸뚱이의 중간 부분에 엉겨 붙은 마디가 생겼다는 것. 이 벌레는 유성촌의 부근에만 쉽게 만날 수 있다고 유충 씨가 거듭 말하고 있었다.

6백년의 마을에 생긴 천년의 전설은 이뿐만 아닌 듯 했다. 그때 유수에게 음식을 공양했던 마을의 처녀가 있었다고 전한다. 훗날 유수는 황제로 등극한 후 그녀에게 상을 내리고자 신하를 마을에 보냈다. 이 시골처녀는 황제가 그녀를 찾는다는 소문을 듣자 너무 놀라서 졸도, 당장에서 숨졌다는 것. 이 처녀를 묻은 홍낭묘(紅娘廟)는 20세기 60년대까지 마을에 잔존했다고 한다.

유성촌은 전설이 있고 종묘가 남아 있다. 또 마을의 풍속이 살아있다.

유충의 말에는 이름 못할 긍지감이 흠씬 배어나고 있었다. 전래된 이 마을의 땅처럼 깊은 사랑은 어디서나 황제의 후손에게 숨 쉬고 있는 듯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길림성 돈화에는 세계의 제일 큰 비구니의 수련 도장이 있는데요, 이 도장은 현지를 도시 이름을 의미하는 자연적인 조형물로 되고 있습니다. 이 도장의 이름은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길림성 돈화에는 세계의 제일 큰 비구니의 수련 도장이 있는데요, 이 도장은 현지를 도시 이름을 의미하는 자연적인 조형물로 되고 있습니다. 이 도장의 이름은 무엇이겠습니까.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임봉해(MC),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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