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29 17:57:56 출처:cri
편집:朱正善

다우르족의 역사

다우르족은  내몽골자치구(內蒙古自治區) 모리다와(莫力達瓦) 다우르자치기(自治旗), 흑룡강성(黑龍江省) 치치할시(齊齊哈兒市) 메리스다우르족구역, 어원커족자치기 일대에 주로 살고 있다. 그 외 일부가 신강(新疆)의 타청(塔城), 요녕성(遼寧省)의 일부 지역에 산재해 살고 있다.

다우르족이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가장 이른 기재에는 타오얼하(討兒河)라고 되어 있다. 명나라 초반에 흑룡강 이북지역으로 이주했고 17세기 중반에 중국과 러시아간 국경분쟁이 발생함에 따라 청나라는 후방을 튼튼히 하려는 목적으로 다우르족을 눈강(嫩江)유역으로 이주시켰으며 이때 일부분이 자바이칼 일대에 남았다. 그후 청나라정부가 청장년을 모집해 동북과 신강의 국경과 도시들에 주둔시킴으로써 현재 다우르족의 분포형태가 나타났다.

다우르족은 민족언어가 있다. 문자는 원래의 문자가 이미 소실되고 현재는 라틴자모를 기초로 한 문자를 사용한다. 지금의 다우르족은 대부분 한어와 한문을 잘 알며 몽골족과 함께 거주하는 경우 대부분 몽골어에도 능하다. 역사적으로 다우르족은 용맹하게 싸움을 잘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후금 때 중원지역에 진입하면서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숴룬(索倫)을 세번 정벌했다. 숴룬의 기병이 천하제일이라는 말은 예 전부터 전해져 내려왔다. 청나라의 대내외 전쟁에는 모두 다우르의 장령들이 참가했다. 다우르족은 항일전쟁 때 동북지역의 항일에서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다우르족은 춤과 노래에 능한 민족이며 이들의 민간음악은 다양한 방식을 보인다.

<중국통계연감-2021>의 집계에 따르면 중국에 살고 있는 다우르족은 총 13만 2천여명이다.

이들의 기원을 살펴보자.

다우르족이 청나라 이전에 사용했던 거란(契丹)문자는 이미 실전되고 구술의 방식으로 그 역사를 전한 관계로 청나라 이전의 역사는 고증이 어려운 부분이 많다. 그러나 다우르족의 전설과 다우르족 및 거란족의 생산과 생활, 풍속, 종교, 언어 등 부분의 대비연구를 통해 다우르족이 거란의 후예라고 인정하는 사학자들이 많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다우르족은 현지의 토착민들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한다. DNA분석으로 볼 때 거란과 다우르족은 가장 가까운 유전관계를 가지고 있다.

요(遙)나라가 멸망한 후 다우르족의 선민들은 흑룡강 이북지역으로 이주했다.

1640년 8월 청나라 정부는 숴룬부 정벌에서 포로한 장정들과 부녀자, 어린이 총 5673명을 8기의 우록(牛錄)이라는 편제에 편입시켰다. 그후 청나라는 내지로 이주한 다우르족인들을 우록에 편입시켰으며 이들을 치치할총관관아의 관할에 두었다.

17세기 중반 다우르족의 선민들은 외흥안령이남 징치리강(精奇里江)유역의 하곡(河谷)지대, 그리고 동으로는 뉴만강(牛滿江), 서로는 스러카하(石勒喀河)에 이르는 흑룡강북안의 하곡지대에서 주로 살게 되었다. 제정러시아의 식민주의자들의 침략과 다우르족에 대한 청정부의 통치가 극심해짐에 따라 이들은 눈강유역으로 이주했으며 따라서 대흥안령과 눈강유역은 다우르족의 고향으로 되었다. 그 후 청정부의 변강정책으로 일부 다우르족인들이 후룬베르(呼倫貝爾), 애훈, 신강 타청 등 지역으로 이주했다.

1643년 러시아 군대가 중국 흑룡강유역을 침범하고 중국 징치리강 다우르 거주지역을 공격하자 다우르 주민들은 이에 단호하게 반격했으며 침략자들은 황망히 철거했다.

1651년에 러시아군이 재차 침입하고 세금을 바치라고 하자 다우르인들은 우리는 중국황제에게 공물을 바치는데 어찌 당신들한테 줄 공물이 있겠는가? 꼮 받겠다면 우리는 마지막 한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울것이라고 대답했다.

1732년에 청정부는 8기병중의 다우르족,어원커족들을 기반으로 부터하(布特哈) 8기를 창설한다. 그 중 다우르 군인들은 양황기(襄黃旗), 정황기(正黃旗), 정백기(正白旗)에 분산 편입된다. 애훈, 모르겐(墨爾根), 치치할, 후란(呼蘭) 등 도시에 주둔한 8기병 중에는 모두 일정한 숫자의 다우르군인들이 있었다.

1914년부터 1916년까지 치치할의 다우르족은 반동군벌들의 폭거에 항의해 저항운동을 벌였다.

1931년 일본제국주의가 중국 동북을 침략한 후 다우르인들은 항일연군을 적극 지원하고 참군했다. 그 중에서도 다우르족의 뱃사공인 바하부(巴哈布)는 여러번 항일연군 전사들의 도하를 돕다가 장렬히 희생되었다.

1944년 신강 타청지역의 다우르인들은 국민당통치에 저항하는 3구 혁명을 일으켜 신강의 평화적인 해방을 위해 기여했다.

1946년 1월, 모리다와가 해방되었고 중국공산당과 인민정부는 현지에 부시기인민정권을 세웠다. 이로써 현지의 다우르족과 기타 민족이 나라의 주인 권리를 향유하게 되었다. 이해 3월 부시기를 모리다와기로 개명했다. 1947년부터 농업지역에서 토지개혁을 실행했고 목축구에서도 목장의 공유화와 방목의 자유화를 실행했다.

1952년 7월 흑룡강성 당위원회와 정부는 용강현 다우르집거구역인 워뉴투에 다우르자치구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1956년 9월 치치할 시정부는 원 용강현 후르후라구, 다르덴구, 워뉴다우르자치구와 유수툰 등 4개 농업구역을 합병하여 현급인 메리스다우르족구역을 설립했다. 메리스다우르족구역은 중국에서 현존하는 다섯개 도시내 민족구역 중의 하나이고 또 중국 유일의 다우르민족구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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