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07 10:22:29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 내신] 2022년 5월 5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5월의 첫번 <청취자의 >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 함께하는 아나운서 임봉해(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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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 목요일인 5일은 양력 올해의 125일째 되는 날입니다. 한해가 마감할 때까지 240 남았습니다.

역사 속의 오늘 말씀드리겠습니다.

올해의 5 5일은 입하입니다. 입하는 24절기에서 일곱 번째 절기입니다.

5 5일은 한국에서 공휴일입니다

1922 5 5, 중국 사회주의청년단 대표대회가 광주에서 열렸습니다.

1924 5 5, 황포에 설립된 국민당 육군 군관학교 1 학원이 입학하기 시작했습니다.

1986 5 5, 중국에서마르크스-엥겔스 전집중문판 50권이 완역, 출판되었습니다.

금주 수요일은 5 4일은 역사상 중대한 사건인 ‘5.4운동 발생한 ‘5.4’운동은 1919 5 4, 베이징에서 청년학생을 위주로 일어난 학생운동으로 광멈위한 군중, 시민, 상공인사 중하위 계층에서 광범위하게 참여한 시위, 청원, 파업으로 정부에 대항한 여러 형식의 애국운동입니다. 중국인민이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종건주의에 반대한 애국운동입니다. ‘5.4’운동은 중국 신민주주의 혁명의 발단이며 중국 혁명사상 획기적인 사건이고 중국 구민주주의 혁명으로부터 신민주주의 혁명으로 이르는 전환점입니다.

1939, 섬감녕변구 서북청년 구국연합회는 5 4일을 중국 청년절로 정했습니다.

청년절 기간 중국 여러 지역에서는 풍부하고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가집니다. 청년들은 여러 가지 사회지원 실천활동을 진행합니다. 여러 지역에서는 청년절 기간 성인 식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5 4일은 베이징대학 개교일입니다

1912, 당시 중국의 최고의 학부였고 중국 최고의 교육행정기구였던 경사대학당은 베이징대학으로 개명했습니다.

중국 인텔리들의 추앙을 받고 있던 근대 계몽사상가이며 번역가, 교육가인 엄복이 베이징대학 초대 총장으로 되었습니다.

베이징대학은 신문화운동의 중심과 5.4운동의 책원지입니다. 최초로 중국에서 마르크스주의 과학, 민주 사상을 전했으며 중국 공산당을 창립한 중요한 기지의 하나입니다.

장기간에 걸쳐 베이징대학은 중국과 중국인민과 운명을 함께 했습니다.

1996 5 4, 전국 과학보급실무회의의 정신을 실행하고과학과 교육으로 나라를 부흥하는전략을 실시하며 중국과학협회 ‘5 대표대회 소집을 맞이하고 계속 청소년을 상대한 과학보급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중국과학협회는 성과 , 과학협회 그리고 소속한 전국적인 학회, 연구회를 조직하여 5 4 청년절에 ‘5.4’ 과학기술 보급의 행사를 전개했습니다. 5 4 이날은 이해 과학기술보급행동의 중점 활동으로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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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는 승려를 따라 찾은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천년 고목과 해동 법사 그리고 사랑 이야기 말씀드리겠습니다.

천년 고목과 해동 법사 그리고 사랑 이야기

지상사는 서안西安 남쪽에 있는 종남산終南山 천자욕天子峪 위치한다. 천자욕은 나라 고종高宗 이치李 출생한 곳이라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그래서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 천자욕의 지상사를 여러 참배하고 향을 피워 올렸다고 한다.

역설적이지만 지상사는 대륙의 멸불滅佛 운동으로 인해 생겨났다. 대륙에서 불교가 한창 자리를 잡고 있던 북위北魏 북주北周 시기 멸불 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경성京城 장안長安에서 승려들은 근처의 종남산에 도망하여 역량을 보존했다.

북주시기 장안의 명승 보안普安 종남산의 천자욕 서쪽비탈에 은거하고 있었다고 속고승전續高僧傳 전하고 있다. 나중에 보안은 법난을 피하여 산속을 들어온 승려들을 종남산 서쪽비탈의 유밀幽密 처소에 안치한다. 정작 보안은 홀로 몸을 드러내고 날마다 탁발하여 승려들의 입고 먹는 것을 제공했다. 그리하여 여러 승려들은 수행을 계속할 있었다. 그들은 보안과 함께 종남산에 선후로 불사佛舍 27개를 세웠다. 불사가 바로 지상사의 추형雛形 만든 것이다.

나라 문제文帝 개황(開皇, 581~600) 초년, 지상사가 종남산에서 정식으로 창립되었다. 불교의 종파인 화엄종華嚴宗 지상사에서 전승傳承 법계法系 형성하고 있었다. 지상사는 시초부터 화엄학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도장이었다. 일찍 승려 보안이 화엄을 존숭했고, 뒤이어 고승 지정智正 이곳에 와서 화엄을 연구했다. 화엄종의 2 지엄智儼 12 지상사에 출가하며 지상사에서 지정의 화엄경 강설을 들었으며 지상사에서 화엄경소華嚴經疏 연구했던 것이다.

지상사는 흥성할 규모가 무려 7백여 정보에 달했고 기세가 종남산의 산세처럼 웅장했다.

오동나무가 숲을 이루면 봉황이 날아든다. 당나라 고종高宗 영휘永輝 2(651), 신라의 명승 의상義湘 장안에 들어오며 지상사에 체류했다. 효충孝忠, 승전勝詮, 도량道亮, 보양寶壤 신라승려가 지상사를 찾아왔다.

옛날의 여느 명승처럼 의상도 고서의 행간에 신이神異 행적을 남긴다. 고려 후기의 사서 삼국유사三國遺事 의상전교義湘傳敎 소설 같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고승) 지엄은 전날 이상한 꿈을 꾸었다. 나무 하나가 해동에서 났는데,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서 중국까지 와서 덮였다. 가지 위에는 봉황새의 둥지가 있었고 둥지에는 마니보주摩尼寶珠 있어 광채가 곳까지 비쳤다. 꿈에서 깨자 놀랍고 이상해서 집을 깨끗이 소제하고 기다리는데 의상이 왔다. 그래서 지엄은 특별한 예로 의상을 맞고 조용히 말했다. 어젯밤의 꿈은 그대가 내게 징조였구려. 입실을 허락하니 의상은 화엄경 세밀한 곳까지 해석했다. 지엄은 영질靈 만난 것을 기뻐해마지 않았다.

기실 이에 앞서 의상은 벌써 소설 같은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고 소설 같은 인물을 만나고 있었다. 삼국유사, 대장경大藏經, 송고승전宋高僧傳 문헌에 기록된 이야기의 판본은 약간씩 차이를 보이지만 대체적인 줄거리는 비슷하다.

의상은 29세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는데, 부처의 교화를 보려고 650 중국행을 단행했다. 그런데 요동의 변방에서 고구려 순라군에 의해 첩자로 잡히며 수십일 만에 겨우 풀려난다. 의상의 육로를 통한 번째 입당入唐 시도는 이로써 실패로 끝나는 것이다.

이때 의상을 동행한 인물은 원효元曉로서 훗날 의상과 쌍벽을 이룬 한국 불교계의 고승이다.

원효는 의상보다 8 위인데 의상과 친교를 맺었고 함께 고구려의 승려 보덕普德으로부터 열반경涅槃經 배웠다고 한다. 그때의 신라 풍조에 따라 당나라 유학을 결심하고 의상과 함께 중원으로 떠났던 것이다. 661,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다시 당나라로 들어가려고 한다. 원효는 여로에서 무덤의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자리에서 득도, 심외무법心外無法,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다 것을 깨우치며 의상과 헤어져 돌아갔다. 원효는 민중 교화의 승려로 되어 당시의 귀족적 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꿨다. 에피소드라고 할까, 와중에 원효가 파계를 하여 요석搖石 공주와 더불어 낳은 아들 설총薛聰 우리말 표기법인 이두를 집대성한 신라의 대학자로 거듭난다.

한편 의상은 홀로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마침내 산동반도의 등주登州 해안에 상륙했다. 의상은 현지의 불교신자의 집에 잠깐 기숙을 하는데, 신자는 그의 용모가 출중한 보고 며칠 묵게 했다. 신자에게 선묘善妙라고 부르는 딸이 있었으며 손재주가 좋고 용모가 예뻤다. 선묘는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만, 의상의 마음을 돌려세우지 못했다. 이에 선묘는 도심道心 얻고 불교에 귀의할 것을 발원한다.

의상은 장안으로 떠나며 종남산에 들어가서 화엄종의 2 지엄智嚴으로부터 8 동안 화엄을 공부했다. 화엄종의 3조인 법장法藏 그의 친밀한 법우法友였다.

스승 지엄이 입적入寂 얼마 후인 670 의상은 급급히 귀국길에 올랐다. 삼국유사 기록에 따르면 의상은 당나라의 신라 침공을 알리기 위해서 길을 떠났다고 한다. 이때 의상은 등주에서 상선에 탑승했다. 소식을 들은 선묘가 미리 준비했던 법복과 집기를 들고 부랴부랴 부두에 달려왔다. 그러나 상선은 저만치 멀리 떠나간 뒤였다. 선묘는 용으로 되어 스님의 배가 무사히 신라로 돌아갈 있도록 돕겠다면서 바다에 투신한다. 과연 선묘는 용으로 형체를 나타내고 배를 밀어 저쪽 바다 건너 한반도의 기슭에 닿게 했다.

선묘의 사랑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신라에 도착한 의상은 화엄종을 전파할 장소로 태백산을 점찍었다. 사찰을 지을 도둑떼가 몰려와서 공사가 중단되었다. 그러자 의상을 따라온 선묘가 다시 용으로 나타나서 신력神力 현시했으며 이에 도둑떼는 별수 없이 물러갔다. 선묘는 이때부터 부석사浮石寺 수호하기 위해 석룡石龍으로 변해서 사찰의 뜰에 묻혔다고 한다. 실제로 사찰의 뜰에서 언제인가 석룡 몸체의 일부가 발견되었다고 하니 바다를 건넌 선묘의 사랑 이야기가 전설인지 진실인지 헛갈린다.

어찌됐거나 의상이 세운 부석사는 허망 지은 이야기가 아니다. 의상은 676 한국 화엄의 근본도량이 부석사를 태백산(경상북도 봉황산) 창건했으며, 이를 시작으로 전국 지역에 10개의 화엄종 사찰을 지었다. 부석사는 떠있는 바위가 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사찰의 부석 아래에는 틈이 있어서 실을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든다는 얘기가 항간에 전하고 있다.

지상사가 본뜨고 있는 건축구조가 바로 부석사浮石寺라고 현지의 도전 스님이 이렇게 밝히고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부석사는 지상사를 상당 부분 베끼고 있다는 것이다. 역시 참조물參照物 되고 있는 일본 교토의 고찰도 기실은 당나라 때의 풍격이며 지상사의 모습을 더듬을 있다고 한다.

, 지상사는 해동에 건너간 정작 대륙에서는 본래의 형체를 잃었다. 당나라 무종(武宗, 814~846) 도교를 신봉하면서 멸불 운동을 단행, 842년부터 4년간 무려 40,000개의 사찰을 폐쇄했던 것이다. 멸불의 불길은 장안 부근의 명찰인 지상사에 선참으로 당겨 붙었다. 지장사의 종과 구리 조각상은 돈을 주조했고, 쇠로 만든 조각상은 두드려서 농기구로 만들었으며 승려는 전부 환속했으며 건물은 훼손되었다.

민국(民國, 1912~1949) 시기 종남산의 천자욕에는 사찰이 다시 수풀처럼 일떠서고 있었다. 공화국이 창립된 시초인 1950년에 지음하여 사찰은 승려가 30여명 있었고 건물이 80여간 있었으며 땅이 2,3 정보 되었다고 한다.

현재 사찰에는 유물이라곤 자곡紫谷 선사의 열반탑涅槃塔 탑신 하나뿐만 남아있다고 한다. 자곡 선사는 청나라 강희康熙 황제의 국사國師이다. 자곡 선사가 은거하면서 사찰 이름은 국청선사國淸禪寺 개명했다.

그야말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아버린 형국이었다. 국청사로 개명한 지상사의 이름은 집단기억에서 차츰 소실되었다. 20 , 한국의 일부 유지인사들이 여러 동안의 현지 조사와 탐방을 거쳐 비로소 국청사의 이름을 다시 찾았던 것이다.

의상의 이야기는 인제 홰나무처럼 사찰의 외로운 고목으로 남고 있었다. 사찰은 다시 전의 원상을 찾고 있지만, 복구한 법기法器 천년의 이야기를 모두 담아낼 있을지 궁금했다.

사찰 저쪽에서 독경 소리가 혼잡한 동음을 헤집고 잔잔히 들리고 있었다. 저도 몰래 의상을 삼국유사 구절을 머리에 떠올렸다.

덤불을 헤치고 바다를 건너 연기와 티끌 무릅쓰니,

지상사의 문이 열려 귀한 손님 접대했네.

화엄을 캐다가 고국故國 심었으니,

종남산과 태백산이 함께 봄을 맞았네.*

, 한국 승려들은 지금도 지상사를 견학하고 의상 법사를 기리고 있다고 합니다.

천년 고목과 해동 법사 그리고 사랑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승려를 따라 찾은 이야기 말씀드렸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북대하는 하북성(河北省) 북단의 해변 마을로, 중국에서 유명한 휴양지입니다. 이곳에는 화북지역 언어문화의외로운 이라고 불리는 조선족마을이 있는데요, 마을의 이름을 뭐라고 부르겠습니까?

, 화북지역 언어문화의 외로운 이라고 불리는 조선족마을은 서하남촌이라고 부르는데요, 하북성 무녕현에 있습니다.

계속하여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강소성 연운항은 중국의 종합교통중추로 새로운 유라시아 대륙교의 동방 교두보라고 불립니다. 2500 , 세계 4 성인 사람으로 불리는 공자가 바로 이곳에서 산에 올라 바다를 구경했다고 하는데요, 이처럼 이름난 연운항은 어떻게 지은 이름이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강소성 연운항은 어떻게 지은 이름이겠습니까.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16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

MC: ,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시간 진행에 임봉해(MC),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 함께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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