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17 15:58:30 출처:cri
편집:金东光

임인유현(任人唯賢)

◎글자풀이: 맡길 임(任rèn), 사람 인(人rén), 오직 유(唯wéi),어질 현(賢xián).

◎뜻풀이:자신과의 관계에 상관없이 인격과 능력을 갖춘 사람만 임용한다. 

◎출처: 『한비자•외저설좌하(韓非子•外儲說左下)』

◎유래: 춘추시대(春秋時代) 때 제양공(齊襄公)에게는 공자 규(公子糾)와 공자 소백(公子小白)이라는 두 동생이 있었으며 이들은 아주 유능한 스승을 모시고 있었다. 제양공은 그 성품이 황음무도하였고 위협을 느낀 공자 규는 스승인 관중(管仲)과 함께 기원 686년에 노(魯)나라로 피난을 갔고 공자 소백은 스승인 포숙아(鮑叔牙)와 함께 거(莒)나라로 도망갔다. 

   얼마 후 제나라 내부에서 큰 반란이 일어나 양공이 살해되고 새로운 왕을 옹립했다. 그 이듬해 대신들이 왕을 죽이고 사신을 노나라에 파견해 공자 규를 제나라 국군으로 옹립하려는 뜻을 밝혔다. 이에 노나라 장공(庄公)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공자 규의 귀국을 배웅했다. 

   관중은 거나라에 도망간 공자 소백이 제나라와 가까운 곳에 있는 지리적 우위를 이용해 먼저 귀국해 왕위를 차지할가봐 걱정되었다. 그는 장공의 동의를 얻은 후 한갈래의 군사를 이끌고 공자 소백의 귀국을 막기로 했다. 관중이 군사를 이끌고 강행군을 하여 즉묵(卽墨) 부근에 이르니 과연 공자 소백이 제나라로 가고 있었다. 관중이 소백을 설득하였으나 별 소득이 없는지라 소백이 방심하는 틈을 타서 화살을 날렸다. 소백이 살을 맞고 쓰러지니 관중은 그가 죽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황급히 노나라로 가서 공자 규와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허나 공자 소백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관중이 쏜 화살은 그의 허리띠의 걸개에 맞았고 소백은 임기응변으로 관중을 속였던 것이다. 포숙아가 소백 일행과 합류한 후 이들은 공자 규보다 먼저 제나라 도성에 입성했다. 대신들은 공자 소백을 새로운 국군으로 옹립했고 그가 바로 제환공(齊桓公)이다. 

  한편 관중은 노나라에 가서 공자 규의 일행과 합류했으며 장공이 파견한 군졸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제나라로 갔다. 결국 제나라와 노나라간에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고 이 싸움에서 노나라 군이 크게 패했다. 결국 노나라는 제나라의 조건을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고 공자 규를 핍박해 죽였으며 관중도 잡히게 되었다. 제나라의 사신은 관중이 국군에게 화살을 날렸으니 제나라 국군은 원수를 갚기 위해 직접 관중의 목을 벨것이라고 위협하면서 그자를 반드시 제나라에 압송해 오라고 요구했다. 노나라 장공은 이 요구를 받아 들일수밖에 없었다. 

   죄인이 된 관중은 포승줄에 묶여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향했고 길에서 굶주리고 목이 말랐으며 그 고초가 말이 아니었다. 그 일행이 기오(綺烏)라는 곳에 이르자 그는 국경을 지키는 관리를 찾아 음식을 구걸했다. 그런데 그 관리는 땅에 머리를 조아리며 직접 관중에게 밥을 먹여주었고 극진히 공경하는 태도였다. 관중이 식사를 마치자 그 관리는 조용한 틈을 타서 이렇게 물었다. 

   “공께서 제나라에 도착한 후 다행히도 죽지 않고 높은 자리에 오르시면 저에게 어떤 보답을 하시겠습니까?”

   이에 관중이 답했다. “당신의 말대로 된다면 나는 현명한 자를 등용하고 능력 있는 자를 채용하고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내릴 것입니다. (임인유현) 그러하니 내가 무엇으로 당신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까?”

   관중이 제나라 도성에 압송되어 오니 포숙아가 직접 마중을 나왔다. 후에 제환공은 관중에게 복수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를 상국(相國)으로 봉했고 포숙아는 관중의 수하에 있기를 자청했다. 포숙아는 관중의 재능이 자신보다 훨씬 높음을 알고 있었고 제환공을 설득해 관중을 용서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후 관중은 관리를 등용함에 있어서 “임인유현”이라는 기준을 견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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