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연간 갈수록 많은 아세안 우호인사들이 개방, 포용적인 광서 남녕에 융입되어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그들의 꿈을 이루고 있다. 광서대학 태국어 외국교원 킨야리가 바로 이 가운데의 한 사람이다. 10여년 전, 그는 단연 중국에 머물고 가정을 이뤘으며 사업을 시작했다. 오늘날 그는 개인 발전의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여 중국 생활의 새로운 변화를 감수하고 있다.
우리 함께 중앙방송총국 기자를 따라 킨야리의 '그가 만난 중국' 이야기를 들어보자.
(음향1 킨야리의 말)
"안녕하세요? 킨야리라고 부릅니다. 태국 우룽타니에서 왔습니다. 중국에 온지 13년이 됩니다. 저는 대학 교원으로 있는데요, 태국어를 가르칩니다."
남녕 지방사투리가 섞인 이 유창한 중국말을 듣고 누군들 그가 태국사람인줄 알겠는가. 처음 강단에 올라서서 중국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던 정경을 회억하면서 킨야리는 약간 부끄러워했다.
(음향2 킨야리의 말)
"제가 방금 왔을 때 학생들은 저보다 한살이나 두살 정도 더 어렸을 뿐입니다. 그때 저는 중국말 한마디도 못했습니다. 훗날 저는 학생들을 친구로 사귀었습니다. 상과를 할 때 학생들도 저를 아주 존중했습니다."
킨야리는 태국어를 가르칠 때 교과서에 있는 것을 그대로 읽지 않았다. 그는 모든 방법을 대어 학생들이 이 언어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마음으로 공부하게 했다. 일례로 그는 늘 학생들에게 그의 태국 경력을 화제에 올리고 학생들이 보다 태국 문화를 요해하게 했으며 태국이라는 이 나라를 보다 더 사랑하게 했다.
남녕에 처음 왔을 때 킨야리는 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을 만나기 힘들었다. 태국에 대한 사람들의 요해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과 아세안 나라의 교류와 왕래가 날을 따라 밀접해지고 중국-아세안 박람회가 해마다 남녕에서 개최되며 또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관계협정'이 정식으로 발효되면서 남녕 시장에 태국 과일, 식품이 갈수록 많아졌고 태국요리점도 크고 작은 거리에 널리면서 모두 현지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킨야리는 중국에서 여러 해 동안 사업하고 생활하면서 줄곧 중국말을 배우기에 노력했고 또 중국문화에 매료되었다. 그가 제일 즐기는 것은 중국 고대의 시라고 한다. 중국 당나라 시인 이백의 작품 '고요한 밤의 사색'을 읽을 때마다 킨야리는 저도몰래 고향을 생각한다.
(음양5 킨야리의 말)
"밝은 달빛이 침상을 비추니/땅위의 서리 같구나. 머리를 들어 밝은 달빛을 바라보고/고개를 숙여 고향을 그리워하네. 저는 이 시를 들었을 때 중국만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중국의 이백도 우리 태국의 어느 시인처럼 술을 마시면 시를 지었습니다."
이국 타향에 있었지만 애인의 동반은 킨야리를 외롭지 않게 했다. 그리고 그는 갈수록 융입되고 귀속된 느낌을 받고 있다. 킨야리의 남편은 광서 사람으로 태국에 유학할 때 서로 만났다. 유학을 마친후 킨야리는 친구를 따라 남녕에 와서 남녕의 손님으로 되었다. 중국 방문은 그들에게 감정을 깊게 했으며 또 킨야리가 중국을 사랑하게 했다. 오늘날 일가족은 남녕에 정착하였으며 즐거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 킨야리는 중국 발전의 변화를 깊이 느끼고 있다.
(음향6 킨야리의 말)
"전에는 현금으로 물건을 샀는데, 지금은 폰을 들면 외출할 수 있습니다. 외출해도 교통 체증을 근심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지하철이 있고 고속철이 있어서 어디로 가든 모두 편리합니다. 저는 중국의 발전이 너무 빠르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때는 그 속도를 미처 따라 잡을 수 없습니다."
킨야리는 중국에서 오늘날 거둔 성과가 쉽지 않다고 하면서 이것은 한 세대 또 한 세대의 사람들이 부지런히 노력한 결과라고 말한다.
(음향7 킨야리의 말)
"저는 중문 역사학과를 배울 때마다 저도 몰래 자꾸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저는 중국이 이처럼 위대하고 이처럼 아름다운 생활을 누리게 된 것은 정말 조련치 않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