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14 10:01:23 출처:cri
편집:朱正善

키르기스족의 역사


키르키스족은 키르기스스탄 주체민족과 동일 민족이다.중국 경내의 키르기스족은 주로 신강위구르자치구에 집중거주하고 있고 흑룡강성 부유(富裕)현 오가자툰(五家子屯)에도 수백명이 살고 있다. 이들은 18세기 신강에서 이 곳으로 이주했다. ‘중국통계연감-2021’에 따르면 중국 경내의 키르기스족 총 인구는 약 20여만명이다.키르기스족은 자신의 민족언어인 알타이어계 돌궐어족의 키르기스어를 사용한다.

‘키르기스’란 민족의 자칭일 뿐만 아니라 이 민족에 대한 타민족의 지칭이기도 하다. ‘키르기스’란 단어에 대한 해석은 여러가지다. 하나는 ‘키르기스’가 40의 복수로 40개 부락을 뜻한다고 풀이한다. 다른 한 설법에 따르면 ‘키르기스’가 ‘산 속의 유목인’, ‘산 중의 우구스인’, ‘초원의 사람’을 뜻한다. 또 ‘키르기스’가 40여명의 처녀를 가리킨다고 풀이하는 설법도 있다.

키르기스족의 역사는 2천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키르기스족 선민에 대한 기재는‘사기·흉노열전’(史记·匈奴列传)에서 최초로 등장한다.  기원 전 3세기 말엽, 흉노가 정복한 북방의 여러 민족 중 ‘격곤’(鬲昆)이란 민족이 있었는데 《한서》(汉书)에서도 ‘격곤’(隔昆)이라고 기재했다. 키리기스어의 음역으로 부른 격곤민족이 바로 키르기스족의 선민들이다. ‘사서’의 기재를 보면 당시의 격곤은 흉노지역 이북, 지금의 몽골인민공화국 이북의 키르기스호 주변 지역에 살았다.

당나라 이전에 키르기스족은 주로 유목과 어렵에 종사했다. 당나라 때에 이르러 키르기스족은 큰 발전을 가져와 인구가 수십만명에 이르렀고 그중 승전할 수 있는 군대가 8만명에 달했다. 이 때 그들은 주로 목축업에 종사했으나 농업생산이 이미 일정한 정도로 발전했다. 그들은 철로 주조한 병기를 사용했으며 십이지신으로 연대를 기록했다. 이는 고대 키르기스족 사회경제문화가 당시 북방의 여러 민족 중 비교적 선진적이었음을 말해준다. 키르기스족의 언어는 알타이어계 돌궐어족에 속한다. 기원5세기와 6세기 이들은 돌궐의 통치를 받아 고대 돌궐어문을 사용하기도 했다. 흉노지역 서부에 거주했던 키르기스족은 한나라 때 흉노 모돈선우(冒顿单于)에게 정복되었다. 그 뒤 선비(鲜卑)와 유연(柔然) 등 민족의 통치를 받기도 했다.

수나라와 당나라 때 키르기스족은 ‘계골’(契骨)로 불렸다. 이들은 가장 먼저 돌궐의 통치를 받고 돌궐과 혼인관계를 맺었다. 정관(贞观) 초년에 돌궐은 당태종의 탄압을 받게 되고 계골은 설연타(薛延陀)에 귀순하게 된다. 그후 수십년간 이들은 북방의 여러 민족과 당나라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당숙종 건원(乾元) 연간 계골은 위구르족인 회흘(回纥)에 패해 회흘에 귀순하며 힐알사(黠戛斯)로 불렸다. 9세기 20년대 힐알사인들은 수령 아러(阿热)의 영도하에 점차 강대해져 회흘의 통치에 반항하기 시작한다. 이 투쟁은 20여년간 지속되었으며 아러가 회흘 대장군의 도움으로 십만병사를 파견해 회흘칸국을 침입해 회흘의 수령을 살해한다. 하여 회흘족은 고향을 등지고 남서로 이주하며 아러를 수령으로 하는 힐알사통치계급은 원 회흘칸국의 영토에 한 때 강성했던 힐알사칸국을 세운다.

10세기에 이르러 거란족의 흥기하면서 힐알사는 거란족 정권인 료(辽)의 속국이 되었다.

원나라 때 키르기스족은 치얼지스 또는 지리지스라고 불렸다. 12세기 말엽 몽골이 흥기하면서 키르기스족은 몽골의 침입을 받기 시작했다. 1206년 테무진이 칭기즈칸으로 자처하며 키르기스족을 포함한 일부 백성들을 자신의 남동생에게 봉해주었다.

원나라 멸망 후 키르기스족의 이웃인 몽골 오이라트부(瓦剌部)가 강성해져 키르기스족은 또 오이라트부에 예속됐다. 15세기 상반기 오이라트부의 수령이 죽으면서 그들의 세력이 약화돼 서쪽으로 이주하며 키르기스족도 오이라트부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된다.

16세기, 예니세이강 일대의 키르기스족은 네 부분으로 나뉘며 네 개의 왕국이 세워진다. 16세기 말, 17세기 초반 준갈이부가 점차 강대해지면서 키르기스족의 대부분은 준갈이부에 예속되며 이 곳은 준갈칸과 안탈칸이 쟁탈하는 중요한 지역의 하나가 된다. 이 때 제정러시아가 동으로 침략확장하며 키르기스지역을 노린다. 키르기스족 인민들은 제정러시아의 침략에 강하게 반발해 나서나 열세에 처해 대부분이 고향을 떠나게 된다.

청나라는 키르기스족을 부루터(布鲁特)라고 지칭한다. 18세기초 이들은 봉건농노제 단계에 처하며 유목업을 위주로 했다. 준갈의 약탈에 반대해나서 이들은 카자흐, 위구르족과 함께 준갈 귀족의 노역과 약탈을 반대하는 항쟁을 한다. 이런 항쟁은 준갈 농노주 귀족과 싸운 옹정제와 건륭제에 일정한 도움을 주게 된다.

18세기 중엽 제정러시아가 점차 동으로 확장해 청나라 정부와 ‘중러 베이징조약’을 체결하게 되고 무능한 청정부는 키르기스족 부락의 많은 지역을 제정러시아에 할양해준다. 1864년 제정러시아는 재차 청정부를 강박해 불평등조약을 체결해 키르기스족의 대부분 부락을 손에 넣는다. 1884년 청정부가 신강에 성을 세울 때 청나라 판도내의 키르기스족은 당시 키르기스족 인구 의 20분의 1밖에 안되게 된다.

1916년 중아시아지역의 카자흐족과 키르기스족은 제정러시아의 장기적인 폭압정치에 못이겨 반기를 들지만 처참하게 진압당한다. 이 때 약 15만명의 키르기스족 피난민들이 신강 북부의 이리지역과 신강남부의 아커쑤(阿克苏), 우스(乌什), 카스(喀什), 가시(伽师)현에 몰려든다.

항일전쟁이 발발한 뒤 키르기스족은 항일활동에 용약 참가하며 목축민들은 항일전선에 가축과 각종 물품을 기부하기도 했다.

1949년 9월25일, 키르기스족인민들은 여러 민족 인민들과 함께 신강의 평화적인 해방을 맞게 되며 이로써 고난의 역사를 종말짓는다. 1954년 커즈러쑤 키르기스족자치주가 창립을 선고한다. 커즈러쑤(克孜勒苏)는 붉은 강이라는 뜻이다. 커즈러쑤키르기스족자치주에는 키르기스족과 위구르족, 한족, 타지크족, 우즈베크족, 카자흐족, 만족, 회족, 시버족 , 러시아족, 타타르족 등 11개 민족이 모여산다. 오늘 날 자치주 소재지 아투스(阿图什)시는 이미 커즈러쑤키르기스족자치주의 정치와 경제문화의 중심이 되었고 신강 남부의 중요한 도시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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