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14 15:51:40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2년 7월 14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7월의 두번 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임봉해(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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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목요일인 7월 14일은 양력 올 한해의 195일째 되는 날입니다. 올 한해가 마감할 때까지 170일 남았습니다.

‘역사 속의 오늘’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789년 7월 14일, 파리의 인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공략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이로써 폭발했습니다.

1900년 7월 14일, 8국연합군이 천진을 점령했습니다.

1917년 7월 14일, 중국의 첫 클럽인 ‘대세계’가 개업했습니다.

7월 14일은 실버 데이 다시 말해서 실버 발렌타인 데이입니다. 이날이면 사랑하는 사람을 집에 데리고 가서 부모에게 인사를 시키거나 상대방을 기타 자기가 존경하는 어르신들에게 소개하는 좋은 기회입니다. 물론 이날의 전부의 소비는 모두 이런 ‘사랑스런 어르신들’이 담당합니다. 실버 데이는 또 연인끼리 서로 은장식품을 선물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전통적인 풍습에 따르면 이날 감미로운 심정의 실증으로 은가락지를 손에 낍니다.

영국정부는 해마다 7월 14일을 어린이의 날로 정했습니다.

1925년 8월, 54개 나라의 대표가 스위스에서 ‘어린이의 행복 국제대회’를 열고 ‘제네바 어린이 보장 선언’을 통가했습니다. 이 선언은 어린이의 정신 향수, 빈곤 어린이의 구제, 어린이의 생계도모 획득 등 문제에 대해 열렬한 호소를 했습니다. 대회 후 여러 나라 정부는 자국 ‘어린이의 날’을 정하고 이로써 어린이들을 격려했으며 그들이 행복과 즐거움을 느끼게 했고 또 사회적으로 어린이를 중시하고 사랑하며 아끼게 했습니다.

영국의 학교는 어린이의 날을 쇨 때 벌써부터 행사 절차를 준비합니다. 학생의 부모들은 꼭 학교에 와서 함께 어린이의 날을 함께 즐겨야 합니다. 그리고 각이한 국적의 부모는 저마다 꼭 자국 풍미의 간식을 갖고 와야 하는데, 이 간식은 제일 좋기는 자체로 만든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행사 당일 학교의 바자모임에 이 간식을 내놓습니다. 학생의 수예, 그림 등 작품은 학교에서 경매할 수 있습니다. 이날의 학교 행사에서 얻은 소득은 모두 가난한 지역 학생들을 위해 기부합니다.

[간 주]

소림사는 일반적인 무협소설의 배경인명, 청 시대에도 천년소림이라 불릴 정도로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사찰입니다.

이 시간에는 ‘승려를 따라 찾은 옛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소림사에서 쿵푸功夫를 배운 신라의 승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소림사에서 쿵푸功夫를 배운 신라의 승려

입구의 거석에 있는 입상立像은 검을 추켜든 무승武僧이었다. 그래서 사찰이라기보다 홀제 어느 무술 도장에 들어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소림사少林寺 하면 너도나도 눈앞에 떠올리는 것은 다름 아닌 쿵푸이다. 쿵푸는 ‘숙달된 기술이나 재간’을 이르는 말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무술武術을 뜻한다. 소림사는 1982년 무협영화 《소림사》가 상영되면서 더구나 쿵푸와 한데 이어져 크게 명성을 떨쳤다.

매표구의 근처에는 여기저기에 관광객이 웅기중기 모여서 시끌벅적했다. 아스팔트를 따라 골짜기에 늘어선 호화스런 건물은 그제 날의 기억을 말끔히 지우고 있는 듯 했다.

사찰은 도장이라기보다 관광명소가 되고 있는 것 같았다. 승려들의 선경禪景은 여행객들의 선경仙境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소림사는 하남성河南省 등봉登封에서 서북쪽으로 10여㎞ 상거한다. 695년, 무측천武則天이 신하들을 데리고 등정하여 제천祭天의식을 가졌으며, 이에 따라 황제가 숭산崇山에 올라 봉선封禪을 했다는 의미로 연호를 ‘만세등봉萬歲登封’이라고 했다. 숭산 기슭의 숭산현이 등봉현으로 개명된 것은 이때부터라고 한다.

갑자기 앞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길가의 넓은 마당에 무술 경기장이 만들어져 있었고, 도복을 입은 수련자들이 경기장 주위를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가이드에 따르면 사찰 주변의 무술학교 수련자들이 이곳에서 자주 무술경합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소림사의 유명세를 타고 부근에는 무술학교가 우후죽순처럼 일떠서고 있었다. 등봉에는 수련자가 만 명 단위인 무술학교만 해도 2개, 기타의 크고 작은 무술학교는 세 자리 수로 헤아린다고 한다.

실제로 소림사가 세상에 이름을 알린 것은 바로 승복을 입은 무인들 때문이다. 수隋나라 말년, 천하가 크게 혼란했다. 당시의 소림사 주지는 대세를 파악하고 이씨李氏의 당조唐朝가 천하를 통일하게 될 것을 예견했다. 그래서 소림사의 무승武僧을 인솔하여 근처의 성을 빼앗아 이씨의 당군唐軍에 귀순했다. 이 일화가 ‘열세 명의 승려가 당왕唐王을 구한 이야기’로 후세에 전했으며 한때 대륙에서 흥행한 무협영화 《소림사》를 만들게 된 것이다.

가이드는 소림사가 무술과 인연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사찰은 골짜기에 깊숙이 들어와 있어요. 산에 출몰하는 맹수를 대처하려면 자위용으로 쿵푸를 익혀야 하겠죠?”

소림사는 또 개봉開封에서 낙양洛陽에 통하는 길목의 산속에 위치한다. 어느 조대든지 눈독을 들이는 군사 요충지였으며 전란을 비켜갈 수 없었다. 이에 따라 현지에서는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무술을 수련하는 게 풍속으로 되고 있었다.

무술은 고대 전쟁에서 전승된 예술로서 전쟁의 기술이다. 호반虎班 무武 자체가 바로 창을 들고 달리는 모습을 나타낸 것. 소림사는 종국적으로 이 전쟁의 기술을 선禪의 수행으로 개발, 발전시킨 것이다. 선의 수행은 “행行, 주住, 좌坐, 와臥” 등 방식으로 나뉘는데, 무술의 수련 즉 무선武禪은 그 중의 ‘행선行禪’으로 된다.

그렇다고 해서 신라의 불자 혜소慧昭가 무술에 혹해서 소림사를 찾은 건 아니다. 혜소는 일부러 소림사에 와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고 전한다. 구족계는 출가한 사람이 정식 승려가 될 때 받는 계율이다.

혜소는 천 년 전의 전라북도 금마(金馬, 지금의 익산) 사람으로 속성이 최씨이다. 그는 31세의 나이에 출가했는데, 당나라에 유학하여 먼저 북쪽의 창주滄州에서 남종선南宗禪의 유명한 선사禪師인 신감神鑑 대사를 만나 계를 받았다고 한다. 대륙 오지의 종남산終南山에 들어가서 수련을 하기도 했다.

혜소가 하필이면 소림사를 선택하여 구족계를 받은 이유를 밝히기는 어렵지 않다. 소림사는 당시 대륙에서 불학의 중심으로 되고 있었다.

북위北魏 태화太和 19년(495), 효문제가 그의 숭앙하는 인도 고승 발타跋陀를 안치하기 위해 낙양에서 마주 보이는 숭산 소실산少室山의 북쪽 기슭에 사찰을 세웠다. 소림사는 소실산의 무성한 죽림에 에둘려 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때 인도 고승 달마達摩가 중원에 도착, 소림사에서 전법傳法하면서 처음 마음으로 마음을 인가하는 ‘이심인심以心印心’의 선종 교법을 창도했다. 달마가 창립한 선종 교파는 중국 불교의 최대 종파로 흥성했다. 이로써 소림사는 선종 조정祖庭의 숭고한 지위를 확립했다.

“소림사는 대륙에서 선종 교파의 메카로 된 겁니다.” 가이드가 자랑스레 하는 말이다.

정말로 ‘메카’라는 왕씨의 말이 실감났다. 승복을 입은 길손 가운데는 다른 대륙의 백인과 흑인도 나타나고 있었다. 그보다 방방곡곡의 각양각색 관광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소림사는 2천년 무렵부터 급속하게 세속화되면서 상업적으로 전례 없이 흥성했다. 소림사의 입장권 수입만 해도 3억 위안이나 되는 등 각종 이권의 ‘삼국’ 분쟁은 한때 세간의 열띤 화제로 떠올랐다.

소림사에서 여러 해나 머물렀던 혜소가 여느 승려처럼 무선武禪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쉽게도 혜소의 무술의 ‘쿵푸’가 어느 경지인지는 알 수 없다. 옛 문헌은 혜소가 배워서 반도에 전한 ‘쿵푸’를 범패梵唄의 음곡音曲과 창법唱法으로 기록하고 있다. 무림武林이 아닌 범패의 종장宗匠으로 된 것이다. 참고로 범패는 절에서 재를 올릴 때 부르는 불교음악이다. 인도의 소리라는 뜻으로 범음梵音 또는 어산魚山이라고 한다.

혜소는 소림사와 불연佛緣을 맺은 스님인데, 왜서 무술 이야기는 하나도 없을까?

미상불 범패의 소리가 하도 높아서 무술의 기예를 가려버렸을까… 어디에 있을지 모를 대답을 얻고자 이곳저곳 부지런히 찾아 다녔다. 소림사의 대웅보전에 들려 향불을 피웠고 또 고승들의 안식처인 탑림塔林을 지나 오유봉五乳峰 기슭의 초조암初祖庵에 이르렀다.

초조암은 달마가 전법하던 곳에 세운 암자이다. 가이드의 안내는 거기서 끝났다. 암자의 뒤로 산길이 나타났고, 그 산길의 끝머리에 달마가 면벽, 좌선하던 동굴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동굴은 거리가 너무 멀다고 해서 안내코스에 빠져있었다.

뒷이야기이지만, 가파른 산길은 왕복 2시간 정도 걸렸다. 길이 멀고 험해서 웬만한 사람은 손을 들고 나앉을 법 했다. 산속에 우거진 숲속으로 길이 숨바꼭질하듯 숨고 있었고,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마치 땅속에서 솟아나듯 문득문득 숲속의 어디선가 샘물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달마는 바로 이 산꼭대기의 동굴에서 무려 9년 동안 면벽, 수련을 했다고 전한다. 달마로부터 시작된 중국의 선은 6조 혜능慧能에 이르러 비로소 ‘선의 중국화中國化’ 즉 인도의 것에서 떠나 중국의 성격에 맞는 불교를 이룬다.

혜능이 단순히 선종의 법통을 이어받는데 그치지 않고 변혁을 시도했다고 한다면 혜소는 귀국한 후 화엄경의 유포를 중심으로 이뤄지던 화엄종의 방식과는 달리 범패를 통해 선禪의 사상을 확대한다. 그는 850년 나이 76세에 입적하며 헌강왕憲康王 때 그를 진감眞鑑이라고 시호하고 비를 세우는데 비문에 이르기를, “(혜소는) 범패를 잘하여 그 소리가 금옥 같았다… (그 소리가) 멀리까지 전해지니 신라에서 어산魚山의 묘음을 익히려는 사람들이 다투어 옥천에서 남긴 음향을 본뜨려고 하니, 어찌 소리로써 제도하는 교화가 아니겠는가?” 혜소를 이어 신라의 선사들이 범패를 수행의 한 방법으로 많이 사용하였다.

백의민족의 정서에 어울리는 이 범패는 훗날 가곡, 판소리와 함께 한국 3대 전통 성악의 하나로 된다.

혜소가 반도에 가져간 ‘쿵푸’는 음악의 범패만 아니었다. 그는 대가람大伽藍을 중창한 후 중국에서 차나무의 씨앗을 가져다가 사찰의 주위에 심었다. 이 가람은 훗날 쌍계사雙磎寺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는데, 바로 의상義湘 대사의 제자인 삼법三法이 지리산에 창건했다고 하는 옥천사玉泉寺이다.

옥천사는 불교사佛敎史의 천년의 미스터리가 깃든 사찰이다. 혜소가 이 사찰을 선택, 중창한 이유가 아닐지 한다. 여기서 이야기는 다시 6조 혜능에게 돌아간다. 삼법은 당나라에서 구법을 하던 도중 “혜능의 머리를 모셔다가 삼신산三神山의 눈 쌓인 계곡 위의 꽃이 피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삼법은 홍주洪州 즉 지금의 남창南昌 개원사開元寺에서 남종南宗 선법을 배우고 있던 신라승려 김대비金大悲와 모의하고 중국인 역사力士 장정만張淨滿을 시켜 혜능의 머리를 탈취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삼법은 그날 밤으로 김대비와 더불어 낮에는 숨고 밤에는 길을 재촉하여 한반도에 도착, 지금의 지리산 쌍계사 금당金堂 자리에 이른 후 꿈에 본 자리임을 깨닫고 혜능의 머리를 봉안하며 사찰 이름을 옥천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중국 옛 문헌에 나타나는 ‘장정만의 난’은 개원開元 23년(722)에 일어나며, 옥천사의 창건은 신라 성덕왕聖德王 23년(723)년이다. 사찰을 창건하는데 걸리는 시간 등을 고려할 때 ‘혜능 정상頂相의 해동 봉안설’은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실제로 혜능의 초상화를 안치한 7층의 육조 정상탑은 쌍계사의 상징물로 되고 있다.

그런데 혜능의 진신眞身은 대륙 남쪽의 광동성廣東省 남화사南華寺에 공양되고 있는 현 주소이다. 이에 따라 쌍계사에 세워진 혜능 정상탑은 전설과 더불어 지리산에 커다란 물음부호를 만들고 있다.

산길에 문득 패루가 나타났다. 뒤미처 비탈의 동굴이 보였다. 달마가 면벽, 수련하던 곳이 바로 이곳이라고 한다. 그가 선정禪定에 든 후 새가 어깨에 내려앉아 둥지를 틀려 했다는 일화는 항간에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동굴의 벽에는 사람의 형상이 비껴 있는데, 달마가 오랫동안 면벽하면서 그 형상이 그대로 사진처럼 찍힌 것이라고 전한다.

네, 장장 9년이나 면벽한 ‘쿵푸’라면 정말로 그림자라도 바위에 그림으로 새겨질 수 있지 않았을까요.

‘승려를 따라 찾은 옛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소림사에서 쿵푸功夫를 배운 신라의 승려”를 말씀드렸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법기사는 대륙 초기의 사찰인데요, 이 법기사는 어떻게 지어진 이름일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법기사는 대륙 초기의 사찰인데요, 이 법기사는 어떻게 지어진 이름일까요.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임봉해(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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