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22 09:58:07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2년 7월 21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7월의 세번 <청취자의 >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 함께하는 아나운서 임봉해(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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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목요일인 7 21일은 양력 한해의 202일째 되는 날입니다. 한해가 마감할 때까지 163 남았습니다.

역사 속의 오늘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원전 776 7 21, 세계의 고대 올림픽경기대회가 고대 그리스에서 열렸습니다.

기원전 356 7 21 세계 7 기적의 하나로 불리는 아디미 신묘가 방화, 소각되었습니다.

541, 7 21 수문제인 양견이 출생했습니다.

628 7 21, 당고종인 리치가 출생했습니다.

2012 7 21, 베이징이 61년만에 폭우가 내렸습니다.

7 21일은 벨기에의 국경일입니다.

벨기에는 1830 네덜란드를 탈리하고 독립을 선포했으며 벨기에왕국을 건국했습니다. 벨기에 왕국은 왕위 세습입니다. 레오폴트 친왕이 초대 국왕으로 추대되고 레오폴트 1세로 개칭했으며 1831 7 21 등극했습니다. 이날이 벨기에의 국경일로 되었습니다.

국경일은 국가 자체를 기리기 위한 법정 휴가일입니다. 국경일은 일반적으로 나라의 독립, 헌법의 제정 혹은 중대한 의미가 있는 주년 기념일입니다. 나라 수호신의 성스러운 날이기도 합니다. 비록 대부분 나라에 모두 유사한 기념일이 있지만 복잡한 정치 관계 때문에 일부 나라의 이런 명절은 국경일로 부르지 않습니다. 일례로 미국은 독립일이 있을 뿐이며 국경일은 없습니다.

일부 나라에서는 국가원수의 생일을 국경절로 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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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창南昌, 도시는 중국 사람들에게 각별한 의미를 갖는 고장입니다. 남창을 모른다고 하면 수부로 소재所在 강서성江西省 물론이고, 중국 대륙의 사람이 맞느냐고 의심할 정도입니다. 사서에 페이지로 기록될 만큼 아주 특별한 역사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고장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에는승려를 따라 찾은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혜능慧能 대사의 머리를 베어간 신라승려 말씀드리겠습니다.

                     혜능慧能 대사의 머리를 베어간 신라승려

  남창은 도시 역사가 오랜 것으로 유명하다. 나라 고조高祖 5(B.C.202) 성읍을 구축하면서 벌써 역사를 시작하는 것이다. 남창은 시초에남방의 창성昌盛’, ‘남부 변강의 창대昌大南疆’ 기원하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다. 지명은 2천년 동안의 풍운변화를 거치면서 여러 번이나 바뀌었다. 한나라 때는 예장豫章이라고 했고 나라 때는 홍주洪州라고 했으며 나라 때는 융흥隆이라고 했고 나라 비로소 남창이라고 정명定名 되었다.

  그러나 정작 이름 것은 기의起義’, 다시 말해서의병을 일으킨다 의미의기의 때문이다. 바로 기의 때문에 남창은 종국적으로영웅의 도시英雄城’ 불린다. 과연난세에 영웅이 난다 했던 옛말이 그른 없나 보다. 1927 8 1, 일명 ‘8.1기의라고 일컫는남창기의 일어났다. 남창에서 일어난 무장반항사건은 중국공산당이 독립적으로 영도하는 무장투쟁과 혁명군 창설의 서막을 열었다. 이로써 민국(民國, 1912~1949) 군사수도에서 공화국의 군기軍旗 최초로 휘날린 것이다.

  ‘남창 8.1기의 기념관 시가지를 남북으로 종단縱斷 장강의 동쪽연안에 위치하고 있다. 그때 당시 기의를 친솔한 지도자들이 머물던 총지휘부의 옛터라고 한다. 평일이지만 삼삼오오 관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기념물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정말로 남창 하면 빠뜨릴 없는 특이한 명물로 되고 있는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옛터는 원래 관광객을 상대했던 강서성 대여행사行社 1924년에 세운 건물이라고 한다.

  기념관을 나선 곧바로 우민사佑民寺 향했더니 택시 기사는 몹시 놀란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사찰을 찾는 외지의 손님은 정말 오랜만이라는 것이다. 기사의 말을 따른다면 외지의 여행객들은 대개 ‘8.1기념관 찾으며 고찰 우민사를 찾는 경우가 아주 드물다고 한다. 기사는 실은 우민사가 남창의 손꼽히는 명물이라고 말하면서 고찰을 도외시하는 현실에 무척 아쉬워했다.

  우민사는 남창 시내에 현존하는 유일한 불교 사찰이다. 지방문헌인 남창부지南昌府志》 기록에 따르면 사찰은 양梁나라 무제武帝 태청太淸 원년(547) 세웠다. 우민사는 원체 앞뒤가 7,8 미터에 달하는 사원이었다고 한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훼손되었고 1986년에 사찰을 재건했다. 1991년에 비로소 산문山門 천왕전天王殿, 대웅보전大雄寶殿, 약사전藥師殿 등을 완성했다. 명색이 천오백년의 고찰이지 뚜껑을 열고 보면 기껏해야 30년에 불과한 신찰新刹 셈이다.

  문득 차가 멈춰서 일이나 했더니 벌써 사찰에 도착했단다. 정말이지 기사가 귀띔하지 않았더라면 사찰을 얼핏 지날 했다. 사찰은 전의 위용을 아파트의 회색의 수림 속에 깊숙이 묻어버리고 있는 했다.

  우민사는 경학經學 강의하던 남창의 도장이었다. 신라의 많은 승려들이 보리심을 등불로 삼아 남창에 와서 구법을 하고 귀국했다. 한반도의 승려들이 우민사에서 수학修學 옛일은 객당에 있던 젊은 승려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전에는 한국 스님들이 사찰에 비석을 세우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비석은 한국 불교 최대 종단인 조계종曹溪宗 종사宗師 도의道義 입당구법入唐求法 기념비였다. 기념비는 사찰 동불전銅佛殿 모퉁이에 우뚝 서서 기억을 더듬게 하고 있었다.

  동불전의 구리불상은 20 전에 새롭게 주조한 것이었다. 나라 가경(嘉慶, 1796~1820) 연간 주조했던 시초의 구리불상은 동란 시기에 훼손되었다고 한다. 구리불상은 우민사의 구리종과 보현사普賢寺 철불鐵佛 더불어 남창의삼보三寶’ 불렸다.

  현지에는남창이 암만 가난해도 3 6천근의 구리가 있다 하는 속담이 있다. 민간 속담은 바로 우민사의 구리불상을 이르던 말이라고 한다.

  동불전에서 만난 스님은 구리불상의 행방을 묻는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1960년대의 동란 시기에 구리불상을 폐철더미로 만들었다고 한다. 보현사의 철불도 시기에 사찰과 함께 훼손되었다. 현재는 구리종만 홀로 남아삼보 이름을 떠올리고 있다.

  구리종은 우민사 서쪽 골목에 있는 종루鐘樓 있었다. 아파트의 마당에 있는 종루는 안내가 없으면 미궁의 궁전처럼 찾기 힘들다. 사찰 입구에서 입장권을 팔고 있던 여성 신도는 아예 구리종이 뭔지도 모르고 있었다. 동란 시기에 유독 구리종이 잔존하게 원인이 아닐지 한다.

  각설하고, 조계종의 종사 도의는 속명이 왕원적王元寂이며 법명이 명적明寂이다. 784 당나라에 유학, 광부廣府 보단사寶檀寺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훗날 그는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 지금의 우민사에 와서 중국 선종禪宗 9 지장智藏 법맥을 이어받았다.

  9 지장은 8 도일(道一, 709~788) 수제자이다. 도일은 7 회양懷讓에게서 득법得法 개원사에 도장을 열고 불법을 설파했다. 그는 선후로 제자 130명을 두었는데, 이런 제자는 훗날 모두 일방一方 종주宗主 고승으로 되었다. 도일은 때문에 개원사의 개종開宗 조사로 추대된다. 도일 본인도 속성이 이기 때문에 불문 제자들에 의해 마조馬祖 존숭되며 마조 도일이라고 불린다.

  중국의 선종禪宗 6 혜능彗能 이르러 남북종南北宗으로 나뉘었다. 남선종南禪宗 혜능으로부터 시작된다. 8 마조 도일은 자심즉불自心卽佛 타고난 마음이 부처로 된다 설파한다. 도일이 있던 지명을 홍주종洪州宗 참모습이다. 그런데 홍주는 황제黃帝 시대 음악을 관장하던 홍애洪厓 수도하던 고장이라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도교의 발원지가 불교의 일파인 홍주종의 발원지로 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우민사는 홍주종으로 인해 비로소 해내외에 명성을 날리게 되는 것이다. 신라승려 도의는 남창에서 바로 홍주종을 익히고 한반도의 서라벌에 돌아갔다.

  기실 우민사에는 홍주종에 앞서 선림禪林 들썽케 비사秘事 있다. 수학修學 왔던 신라승려 김대비(大悲, 생몰일 미상) 6 혜능의 머리를 훔쳐가려 했던 것이다. 구리불상을 톱으로 켰던홍위병운동 이처럼 전에 벌써 일어나고 있었다.

  조계대사별전曹溪大師別傳》 나라 이후의 육조단경六祖壇經》 혜능은내가 죽은 동방의 인물이 목을 탈취하리라 유언을 남겼다고 전한다. 제자들은 말을 기억하여 혜능의 부분을 쇠로 감아서 탑에 모셨다. 아닐세라, 당나라 개원開元 10(722), 김대비가 6 혜능의 머리를 얻어 해동에서 공양하려고 했다. 김대비는 역사力 장정만張淨滿에게 2만냥을 주어 육조탑六祖塔 가서 혜능의 머리를 훔치게 했다.

  이때 한국측의 기록에 의하면 김대비는 6 혜능의 머리를 훔쳐서 신라로 무사히 귀국했으며 이것을 지리산의 쌍계사雙磎寺 공양하였다. 쌍계사의 탑전에 있는 6 정상탑頂相塔 바로 그것이라고 전한다. 중국측의 기록은 이와 다르다. 722, 괴한이 6 정상탑에 접근하자 그를 붙잡았다는 것이다. 관아는 국법으로 다스리면 중죄가 되겠지만 고승 공양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죄를 사면했다고 한다.

  사실상 혜능의 진신眞身 현재 광동성廣東省 남화사南華寺 공양되고 있다. 정말이지 지리산 쌍계사의 육조 정상탑의 진실은 무엇인지 궁금한 대목이다.

  일각에서는 그때 괴한 장정만이 칼로 혜능의 목을 쳤다고 전한다. 그러나 목에 감은 때문에 종당에는 머리를 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설은 혜능의 육신을 철로 가공한 사실을 미화하려고 일부러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 혜능의진신眞身’ 실제로 가공품의 조각상이라는 것이다.

  시야비야를 떠나서 혜능의진신 칼에 의해참모습 드러낸 있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던 1940년대에 있은 일이라고 한다. 어느 , 남화사에 일본군 명이 찾아왔다. 그들은진신 거짓이라고 의심하고 칼로진신 등에 작은 구멍을 냈다, 구멍으로 육신 내부의 골격과 내장이 드러났다. 명의 일본군은 불교 신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육신보살에게 절을 올린 다소곳이 물러갔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화가 복으로 된다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것이 아닐지 한다. 일본군의 칼은 혜능의 잔등에 상처를 남겼지만 때문에 완정한 남화사를 세상에 남겨놓았다. 일본군이진신 경외심을 품지 않았던들 남화사가 잿더미로 변할 있었기 때문이다.

  6 혜능의 영골靈 불원 선사 등에 의해 비밀리에 보존되며 1979 당시 광동성 정부의 고위관리로 있던 습중훈習仲勛 명령에 의해 사찰에 다시 공양된다. 사찰에서 천년을 이어오던 법난法難 이로써 단락을 맺게 되는 것이다.

  우민사의 천년의 역사를 전하는 종소리는 끝끝내 들을 없었다. 구리종을 보관한 종루에 자물쇠가 잠겨 있었고, 열쇠를 관리하는 승려가 마침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종루 아래의 뜰에서는 종소리 대신 웃음소리가 간간이 터지고 있었다. 끼리끼리 모여 앉은 동네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 정말이지 대륙과 한반도의 과거와 현대, 거짓과 진실이 하나로 뒤섞여 남창의 고찰에 소설 같은 굴곡적인 이야기를 만들고 있지 않나 싶었다.*

승려를 따라 찾은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혜능慧能 대사의 머리를 베어간 신라승려 말씀드렸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법기사는 대륙 초기의 사찰인데요, 법기사는 어떻게 지어진 이름일까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법기사는 대륙 초기의 사찰인데요, 법기사는 어떻게 지어진 이름일까요.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16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

MC: ,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시간 진행에 임봉해(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 함께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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