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02 21:10:23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2년 7월 28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7월의 네번 <청취자의 >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 함께하는 아나운서 임봉해(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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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목요일인 7 28일은 양력 한해의 209일째 되는 날입니다. 한해가 마감할 때까지 156 남았습니다.

역사 속의 오늘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928 7 28, 9 올림픽경기대회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렸습니다.

올해 7 28일은 당산 대지진 46주년이 되는 기념일입니다. 1976 7 28, 중국 하북성 당산시 일대에서 리히터 규모 7.8 이상의 대지진이 일어나 24만명이 숨졌습니다.

우크라이나가 7 28일을 처음으로 우크라이나 국경일로 경축하게 됩니다.

현지시간으로 24,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정례 화상연설에서 우크라이나가 7 28 처음으로 우크라이나 국가일을 경축하게 된다고 선포했습니다.

이에 앞서 우크라이나는 해마다 8 24일을 국경일로 삼고 우크라이나가 1991 8 24 독립선언을 통과한 것을 기념했습니다. 젤렌스키는 2022 5 명령서에 수표하고 7 28일을 우크라이나 국경일로 확정했습니다.

해마다 7 28일은 세계 간염의 날입니다.

간염은 간장의 염증입니다. 간염의 원인은 여러 가지인데, 있는 간염은 바이러스로 조성된 것입니다. 이밖에 자체 면역 때문에 조성된 것입니다. 음주도 간염을 유발할 있습니다. 간염은 급성간염과 만성 간엽으로 나뉩니다. 바이러스로 조성된 간염은 바이러스의 계열에 따라 A 간염, B 간염, C 간염, D 간염, E 간염, F 간염 6 유형의 바이러스 간염으로 나뉩니다.

간염은 식욕이 감퇴되고 소화기능이 차하며 식사 배가 붓는 조기 증상과 표현이 있습니다.

1 세계 간염 인지의 홍보활동은 2004 10 1 벨기에 브류쎌에서 열렸습니다. 주제는너와 함께였으며 의료계, 정부인원과 대중에 병형 간염의 예방과 선별조사, 치료 지식을 선전하는데 목적을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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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는 승려를 따라 찾은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황제보살 위해 설법한 고려의 승랑 말씀드리겠습니다.

황제보살 위해 설법한 고려의 승랑僧朗

사찰로 통한 대문은 뭔가를 감추려는 꽁꽁 닫혀 있었다. 알고 보니 이곳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풍경구의 입구를 이용해야 한단다. 사찰은 대륙 중부의 강소성江蘇省 소재지인 남경南京 서하산栖霞山 풍경구의 일부로 되고 있었고, 따라서 사찰로 들어가려면 25위안을 내고 풍경구의 티켓을 구매해야 했다.

실제로 서하산 풍경구의 백미는 산의 이름처럼 노을이 물든 단풍이라고 한다. 일행이 탑승했던 택시의 기사는 현지 태생이었는데, 언제인가 가족과 함께 일부러 서하산을 찾은 것은 단풍 구경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나라 건륭乾隆 황제도 한때는 서하산의 단풍을 찾아왔다. 그래서 서하산 동쪽 봉우리의 부근에는 건륭 황제의 행궁이 있었다. 건륭의 남방 순시에서 사용된 여러 행궁에서 제일 행궁이다. 건륭 황제는 6차의 남방 순시에서 선후로 5차에 걸쳐 45 서하산에 머물렀으며, 심지어 서하산을 금릉金陵 제일 아름다운 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금릉은 남경의 별칭이다.

금릉이 옛날 부근의 산에서 따온 성읍의 지명이라면 서하산 도장의 이름에서 따온 지명이다. 그렇다고 해서 산보다 도장이 먼저 생겼다고 하는 부질없는 얘기가 아니다. 원래 산은 약재가 많아 섭생攝生 있다고 해서 섭산攝山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남조(南朝, 420~589) 시기 명승소明僧紹 섭산에 있는 그의 거소를 서하정사栖霞精舍 명한다. 명승소는 산동山東 사람으로 한때 정직랑征直郞, 참군參軍, 정원외랑定員外郞 등으로 있었으며, 때문에 명정군明征君이라고 불렸다. 명승소는 그와 가깝게 보내고 있던 선사禪師 법도法度 청해 정사에 머물면서 예불禮하게 했다. 도장이 동네방네 소문을 놓게 되면서 도장이 자리하고 있는 산은 서하산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양쪽에 늘어선 석등石燈 모양의 장식물이 사찰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사찰 입구에 버티고 서있는 동상銅像 유달리 눈길을 끌고 있었다. 여느 사찰과 달리 사자가 아닌 대상(大象, 코끼리)이었기 때문이다.

기실 코끼리는 덕망과 위용을 상징하는 것으로 석가모니의 태몽으로부터 불교와의 인연을 시작한다. 그러나 대답을 하기도 전에 하나의 물음표가 홀연히 떠올라서 발부리에 걸리고 있었다. 산문山門 밖에서 수항정이라고 하는 괴이한 이름의 우물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명정군 기리여 나라 세운 비석은 바로 우물가에 서있었다. 명정군 비석은 남경에 잔존한 당나라 시기의 제일 비석으로 고종高宗 어서御書 씌어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수항降이라고 하면 항복을 받았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렇다면 명승소가 정사를 세울 누군가에게서 무슨 항복을 받을 일이 있었던가

한참이나 빗나간 생각이었다. 수항정에 있는 안내문은 왕창 다른 시공간의 이야기를 적고 있었다. 민국(民國, 1912~1949) 34(1945) 8, 국민정부가 본국으로 송환할 일본군 포로의 일부를 서하사에 집중시켰는데, 그때 포로들이 식수용으로 우물을 팠으며 그래서 지은 이름이 수항정이라고 한단다. 기왕 말이 났으니 말이지 중일전쟁 남경을 점령한 일본군은 중국인 포로와 민간인을 무차별로 학살했다. 이로 인해 1937 12 13일부터 1938 2월까지 6주간 30 명의 중국인이 무고하게 죽음을 당했다. 수항정 실은 80 남경에 있은 피비린 기억을 땅에 유물로 깊숙이 파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찰의 전의 기억은 폐허에 묻히고 상당 부분이 발굴, 복구되지 않고 있는 했다.

객당客堂 있던 각준覺俊 장로는 승랑僧郞 대사의 위패에 참배하러 서하사에 일부러 왔다고 말했더니 대뜸 사찰 뒤쪽의 법당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장로의 뒤를 따라섰더니 법당은 신도와 사찰에 있던 승려들의 위패를 봉안奉安하고 있는 추모의 시설이었다.

보아하니 서로 한심한 엇박자를 만들고 있었다. 장로는 승랑 대사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는 했다.

미구에 우리가 당도한 곳은 조사당祖堂이었다. 조사당은 객당客堂 바로 맞은쪽이니 바퀴 돌아서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었다.

그런데 헛걸음을 해야 했다. 어둔 조사당에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아서 위패의 이름을 읽을 없었다. 이윽고 각준 장로님은 손전등을 찾아들고 다시 조사당에 들어왔다. 사찰의 역대 조사祖師 위패는 그렇게 약간 굴곡적인 길을 걷게 만든 후에야 비로소 우리에게 진신을 드러냈다.

선대先代 40여명 주지와 고승을 열거한 위패에서 승랑의 이름은 인차 눈에 뜨이지 않았다. 잠깐 후의 일이지만, 승랑은 위로부터 줄에서 오른쪽으로 열한 자리에 적혀 있었다. 생각보다는 너무 뒤로 밀린 위치였다. 이름 못할 아쉬움이 조사당의 어둔 그림자처럼 스멀스멀 기어들었다.

승랑은 한국 불교사의 페이지를 장식, 삼론종 창설의 선구자로 중국 불교사에도 기어이 등장하는 인물이다.

다른 잠시 제쳐놓더라도 승랑은 그때 시절 일명 황제보살이라고 불리는 독실한 불자 양나라 무제(武帝, 464~549)에게 설법하여 소승小乘 버리고 대승大乘으로 돌아서게 했다고 하니 그의 막강한 영향을 가히 짐작할 있겠다.

승랑은 요동에서 태어났고 30 내륙으로 건너와서 명승 승조(僧肇, 383~414) 계통의 삼론학三論學 공부했다. 그는 대륙 서쪽의 돈황敦煌까지 가서 담경曇慶으로부터 삼론을 배웠고 대륙 남쪽의 회계산會稽山 있는 강산사岡山寺 머무르기도 했다.

삼론학은 3 중론中論,백론百論,십이문론十二門論 널리 내세움으로써 얻은 이름이다.

유감스럽게도 승랑의 생몰일 연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가 나중에 왜서 고려로 귀국하지 않았는지도 없는 천년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승랑의 자세한 구법 노선도 역시 베일에 가려 있다. 혜교(慧皎, 497~554) 고승전高僧傳 등에 수록된 승랑과 관련한 내용들은 거개 단편적인 내용들이다. 그러나 승랑이 요동 일대부터 내륙으로 이어지는 육상 실크로드 따라 이동했다는 추론은 여전히 가능하다. 당시 고려와 중원의 여러 나라가 바닷길은 물론 육로를 통해 서로 인적, 물적 왕래를 했던 기록은 많은 고대 문헌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승랑의 저술은 현존하지 않지만, 길장(吉藏, 549~623) 저술 중국과 일본에 현존하는 삼론관계의 문헌들에 그의 논설이 적지 않게 인용되고 있다. 길장은 승랑에서 시작한 일가 전통의 충실한 계승자로 삼론종학 크게 완성하여 삼론종의 창시자로 간주되기도 한다. 삼론종은 모든 것은 본성적으로 실체가 없다(諸法性空) 설을 거듭 천명하기 때문에 법성종法性宗이라고도 불린다.

각설하고, 승랑은 양무제의 초청을 마다하고 지금의 남경인 수도 건강(健康) 번화가에서 멀리 떨어진 서하산에 은둔했다. 이때 그는 초대 주지住持 법도法度 스승으로 모시며 법도가 원적圓寂 그의 뒤를 이어 서하사의 주지를 맡았다고 전한다. 천감天監 12(512), 양무제는 당시의 승정僧正이었던 지적智寂 비롯하여 승전僧詮 고승 10인을 특별히 선발, 파견하여 승랑의 가르침을 받게 한다. 승랑의 학설은 승전僧詮으로부터 훗날 삼론종의 대사로 법랑(法郞, 507~581)으로 이어지는데, 법랑의 후계자가 바로 삼론종의 가르침을 체계화한 길장이었다.

궁극적으로 서하사는 강남 불교인 삼론종三論宗 발원지로 거듭나며, 나라 때에 이르러 중국 대륙의 4 명찰의 하나로 되었다. 사찰에 당나라 황제의 친필 글씨가 남아있을 한다. 그런데 삼론종의 초조初祖이자 사찰의 2 주지인 승랑의 이름이 조사의 위패 명부에서 뒤로 밀려 있다는 서운하지 않을 없었다.

그런데 서운한 일은 뒤를 잇고 있었다. 아니, 서운하다고 하기보다 못내 쓸쓸하기까지 했다.

사찰의 뒤쪽에는 산에 기대어 만든 천불암千佛岩 유적지가 있다. 집계에 따르면 천불암에는 294개의 불감佛龕 515존의 불상이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불감에는 주불 1존이 있으며 주불 양쪽에 제자거나 보살이 보좌한다.

명승소가 운명한 그의 아들과 선사 법도는 먼저 암벽에 무량수불을 파서 만들었다고 전한다. 이에 앞서 법도는 사찰에서 무량수경無量壽經 여러 강설했는데, 경전은 무량수불이 중생의 서원誓願 인도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완성된 불감에서 난데없는 광채가 뿜겨 나왔다는 것이다. 소식을 들은 나라와 양梁나라의 귀족, 선비들이 저마다 달려와 산의 바위에 불감을 만들고 불상을 새겼다고 서하사비栖霞寺碑 기록하고 있다.

그맘때 서하정사에서 수행에 정진하고 있던 승랑은 모름지기 천불암의 탄생을 상당 부분 현장에서 지켜본 최초의 견증자로 되고 있었던 것이다.

천불암의 불상은 1960년대의 동란 기간 사찰과 함께 크게 훼손되었다. 불감에 옹립되고 있던 불상들은 적지 않게 머리가 뎅강 잘려나가는 전례 없는 법난法難 당했던 것이다.

건륭은 천불암 불상의 참모습을 만날 있은 마지막 황제였다. 서하산의 단풍도 구경할 있었으니 과연 황제다운 호화스런 행운이렷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기거했던 화려한 행궁은 뒤이어 함풍咸豊 연간의 전란에서 훼손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서하산은 행궁이나 사찰이 아닌 단풍으로 중생들의 단체기억에 남으려고 작정을 듯하다.

천불암에서 내리는데 신도 여럿이 불호佛號 외우면서 사리탑을 돌고 있었다. 사리탑은 남당南唐 시기의 유물로 서하사에서 제일 가치가 있는 건물이라고 한다. 장강 남쪽에서 제일 오랜 석탑의 하나라고 전한다.

팽이처럼 사리탑을 돌고 있는 신도들을 묵묵히 지켜보고 섰는데, 그들 중의 누군가 자기들의 대열에 함께 들어서라고 권한다. 탑을 바퀴 돌면 한해 내내 평안하다는 것이다.

미상불 사리탑은 본의를 떠나 미신으로만 추앙되고 있는 했다. 불자들의 참선과 수행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순간이었다..*

, 승려를 따라 찾은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황제보살 위해 설법한 고려의 승랑 말씀드렸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법기사는 대륙 초기의 사찰인데요, 법기사는 어떻게 지어진 이름일까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법기사는 대륙 초기의 사찰인데요, 법기사는 어떻게 지어진 이름일까요.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16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

MC: ,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시간 진행에 임봉해(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 함께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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