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자(여): 안녕하세요. 임봉해입니다.
사회자(남): 안녕하십니까. 김민국입니다.
여: 김민국씨, 서로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두 나라간 교류와 협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남: 퀴즈 프로그램으로 가는 건 아니죠?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교류에서 우선시 되어야 하는 부분이 소통이니 양국의 언어를 구사하는 인력이 없으면 안 되고 따라서 그런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을 빼놓을 수 없지 않을까요?
여: 맞습니다. 숫자로 보아도 양국간 교육분야의 교류와 협력을 읽을 수 있는데요 양국의 유학생수는 30년전 제로에서 현재 서로 최대의 유학생 내원국이 되고 있습니다. 그 만큼 양국간에 언어인력에 대한 수요가 많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남: 그렇습니다. 최고로 한국의 재중 유학생은 약 6만 7천명, 중국의 재한 유학생은 약 6만명에 달했습니다.
여: 그리고 베이징 외국어 대학교를 망라한 전문 외국어를 가르치는 대학교는 물론이고 베이징 대학교와 같은 종합대학들에도 한국어 학과가 설립되어 정확한 숫자는 아닙니다만 한국어 학과가 있는 중국의 대학교는 거의 2백 개에 달합니다.
남: 반이 넘는 중국의 대학들에 모두 한국어를 가르치는 조선어학과가 설립되었다는 말인데요 한국에도 마찬가지로 반이 넘는 대학들에 모두 중어중문학과가 있습니다. 또 양국의 대학교들 간에 교환교수와 교환학생수도 아주 많구요.
여: 네. 그럼 오늘은 중국과 한국 교육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남: 이와 관련해서 중한 수교 전부터 상대국의 언어를 배우고 수교 후에는 계속 한국어 교육에 몸을 담고 있는 리리추(李麗秋) 베이징 외국어대학교 아시아 대학 조선어 학과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어봤습니다. 들어보시죠.
(사진설명: 2022년 8월, 중앙방송총국 스튜디오에서 중한 수교 30년 특집방송 녹음 중인 李麗秋 교수)
리리추 교수: (음향)
(질문) 오늘은 베이징 외국어 대학교 아시아 대학 조선어 학과의 리리추 교수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잠깐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1992년 8월 24일 중국과 한국이 대사급 외교관계를 공식 수립했는데 당시 당시 어디서 근무했는가요?
(답변) "그 때는 학생 신분이었습니다. 사실 1990년 10월에 평양으로 유학 가서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유학하고 있었는데 1992년 8월 24일 한중 수교 당시에 마침 방학기간이라 2년만에 여름 방학을 마치고 베이징에서 평양으로 돌아가기 이틀 전이었는데 그 때 수교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평양으로 유학간 1990년까지만 해도 한국과 중국이 수교가 안 된 상태였기 때문에 앞으로 이 전공을 어떻게 살려야 할지 무척 걱정되고 고민이 많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한중 수교 소식을 듣고 앞으로 한국어를 쓸 일이 많겠구나,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었습니다."
여: 리리추 교수의 한국어 실력이 대단하네요.
남: 그렇죠? 저도 인터뷰를 하는 동안 리리추 교수의 완벽한 한국어 능력에 내내 감탄했습니다.
(사진설명: 1994년 4월 15일, 김일성 종합대학 김일성 동상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여: 1990년에 평양으로 유학 갔다고 했으니 중한 수교 전부터 조선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네요.
남: 리리추 교수는 원래 러시아어를 전공하려 했는데 고등학교 때 마침 국비장학생 코스가 있었고 부친의 권유로 그 코스에 지원해 시험을 봤는데 1등을 해서 평양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95년 김일성종합대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베이징 외국어 대학교에 취직을 해서 지금까지 거의 30년 동안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 부친의 권유로 지원한 전공에 평생을 바치고 있네요.
남: 리리추 교수는 처음에는 부친의 권유로 지원했지만 그 뒤에는 자발적으로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땄습니다. 그 사연도 들어볼까요?
(사진설명: 2009년 2월 26일, 서울대학 박사 졸업, 인문대학 자하연 신위 동상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리리추 교수: (음향)
"베이징 외국어 대학교에서 근무를 하다 보니 공부를 더 해야겠구나 그리고 또 학생들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조선어와 한국어가 굉장히 다르다 라는 느낌이 들어서 더욱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1999년에 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원래 개인적으로 고전 한시와 사, 당시, 송사 이런 것을 좋아했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할 때도 한문 수업이 있어서 그 때 조선에서도 오랫동안 한자를 사용해왔다는 사실에도 놀랐고 또 한자로 그렇게 많은 작품을 남겼다는 것도 너무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과연 어떤 작품이 있었는지 또 그러한 작품에 어떤 내용, 어떤 정서를 담고 있는지, 또 한국의 한시와 중국의 한시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서 고전문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서울대학교에 유학 가기 전 1997년도에 한국국제교류 재단에 팰러십으로 6개월동안 잠깐 다녀왔는데 그 때 한국에 있는 동안 서울대학교 고전문학의 대가이신 조동일 교수를 만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만남이 인연이 되어 고전문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여: 리리추 교수가 평양에 유학을 갈 때는 중국의 대학들에 조선어 학과가 많지 않았고 그 후 중국과 한국이 수교하면서 양국간의 활발한 교류와 함께 양국의 많은 대학들이 집중적으로 상대국 언어학과를 설립했죠.
남: 그렇습니다. 그 중 리리추 교수가 몸담고 있는 베이징 외국어대학교의 상황을 들어보겠습니다.
리리추 교수: (음향)
"베이징 외국어 대학교 조선어 학과는 1994년도에 설립되었습니다. 처음에는 2년에 한 번씩 학생을 모집했고 한 번에 모집한 학생은 18명에 불과했습니다. 한중 교류가 많아지면서 2005년부터는 해마다 학생을 모집하기 시작했고 2015년부터 1년에 두 개 반, 그리고 한 반에 24명씩 모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규모가 지금까지 유지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학부생만 모집하다가 2007년에 한국언어문학 전공 대학원생을 모집하기 시작했고 2015년부터 통번역 석사 즉 MTI 과정이 설립되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부터 박사과정도 생겼고 지금까지 약 학부생은 700여명, 대학원생은 약 150여명을 배출했습니다."
여: 처음에 모집한 학생은 많지 않았는데 그 뒤에 점점 더 많아졌네요.
남: 네. 베이징 외국어 대학교의 조선어 학과 학생 모집 그 변화과정이 중한관계의 축소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리리추 교수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겠습니다.
리리추 교수: (음향)
"사실 조선어 학과의 학생 모집의 변화과정에는 한중관계의 변화의 과정도 투영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기억으로 한 때 한류를 너무 좋아해서 저희 조선어과를 지원한 학생도 있었습니다. 특히 2006년 전후로 많았는데 그 때는 한국 노래와 드라마가 엄청 인기가 많아서 한국어 공부 열풍도 불기 시작되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지원동기에 대해 물어보니 가끔 한류 때문에 지원하게 되었다는 그런 대답이 나왔습니다. 심지어 입학하기도 전에 한국노래를 듣고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어를 독학한 학생도 있었고 그래서 첫 수업시간에 한국어 발음을 듣고 정말 깜짝 놀랐던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여: 베이징 외국어 대학교 한 학교에서만 이렇게 많은 언어인재를 육성했으니 중한 양국의 관련 인력이 어느 정도로 많을지 짐작이 갑니다.
남: 그렇죠. 그리고 이런 인력들은 또 각 분야에서 활약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직접 들어보시죠.
(사진설명: 2019년 12월, 한국어 수업 중인 리리추 교수)
리리추 교수: (음향)
"졸업생들도 정말 훌륭한 학생들도 많았고 특히 1기 졸업생들이 제가 가르쳤던 첫 반이고 또 3년 동안 항상 같이 보내서 굉장히 애정이 많이 가는 학생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장쟈, 한자 발음으로는 장가 가고 싶다는 장가인데 공부를 굉장히 열심히 해서 한국어 웅변대회에서 상도 받고 졸업하고 차이나 유니콤에 취직했는데 그 동안 한국 텔레콤과 차이나 유니콤과의 교류를 담당하고 한국어도 꾸준히 사용해왔는데 지금 신예 엔지니어가 되어 지난 2월 베이징 동계 올림픽 때 맹활약을 했습니다. 그리고 외교부에도 저희 졸업생들이 정말 많이 들어갔습니다. 지금까지 약 50명 가까이 되고 그리고 인민일보, 신화통신사 등 언론기관, 또 중국은행, 중국 공상은행 등 금융기관에 들어갔고 정말 다양한 자리에서 나름의 역할을 잘 수행해 나가고 있습니다."
여: 이런 인재들이 우선적으로 하는 일은 양국간 소통을 위한 가교역할이 아닐까 합니다만.
남: 그렇습니다. 소통이 교류와 협력의 시작이라면 통번역은 소통의 발달이라 하겠습니다. 리리추 교수는 통번역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들어보겠습니다.
리리추 교수: (음향)
"통역이 번역보다 쉽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또 일반 회화는 쉬울지 몰라도 통역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저의 느낌으로 정말 많은 번역 경험이 있어야지만 통역을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제가 한 첫 동시 통역은 제가 한 첫 통역이기도 합니다. 평양에서 돌아오고 나서 1995년도 7월에 졸업하고 10월인가 11월쯤에 동아시아 청년지도자 회의가 있었습니다. 공청단 중앙이 주최한 회의였는데 저희 외국어 대학교에 협조 공문서를 보내왔습니다. 통역 한 명 좀 보내달라고 해서 학교에서 저를 보냈는데 통역이 뭔지도 모르고 가서 했습니다. 그것도 일반 통역이 아닌 동시 통역을 말입니다. 그래서 해보니깐 어렵지만 재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조선과 한국이 모두 대표가 회의에 참석했고 그 때 조선어와 한국어가 이렇게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1999년에 한국에 가서 5년간 공부했고, 한국에서 공부하는 동안에도 통역을 많이 했습니다. 동시 통역은 아니지만 일반 통역, 수행통역을 정말 많이 했고.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동시 통역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통역을 하는 과정도 배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과정에 많은 것을 배웠고 하면 할수록 경험도 많아지고 동시 통역을 잘 하려면 언어, 말만 잘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지식도 배워야 된다는 점을 깨닫게 되어 스스로 뉴스, 여러 가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배우며 지금까지 죽 해왔습니다."
여: “두 가지 언어만 잘 하면 통역을 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지식도 배워야 한다” 좋은 말입니다. 두 나라의 소통과 교류와 협력을 위해서는 두 나라의 언어도 알고 두 나라의 문화도 잘 아는 인재가 많이 필요합니다.
남: 리리추 교수가 바로 그런 인재를 키우는 교육현장에서 뛰고 있는데요. 중국과 한국의 지난 30년을 지켜본 리리추 교수는 중한관계 미래 30년을 어떻게 전망하는지 들어볼까요?
리리추 교수: (음향)
"지난 30년 동안 한중관계는 정말 놀라운 속도로 발전해왔습니다. 여러 가지 외부요소도 있지만 양국 국민들 간에 마음의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다른 나라들에 비해 한중 양국이 오랜 문화적 전통도 있고 또 서로 알기 위해 노력한다면 지난 30년 보다 더 좋은 30년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기대합니다. 상대방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사회 전반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인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런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미약하게나마 기여하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제 자리에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여: 상대방의 언어와 문화, 사회 전반을 잘 아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양국의 교류와 협력이 더 잘 되어 중한관계가 삼십이립을 딛고 장기적으로 안정된 미래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남: 네. 중한 수교 30년 특별 기획 <중국과 한국의 30년을 지켜보다> 교육편을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남, 여: 청취자 여러분 안녕히 계셔요.
(끝)